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nia Mar 07. 2021

마지막 곡을 마주하다

소소한 삶의 이야기 #2

강의를 준비하다 눈이 너무 아파서

첼로를 잡아보았다.


연습곡을 하나 둘 해보다

손 다친 날 무대에서 연주했던 곡의 악보를 꺼냈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에 애써 눈을 거두던 악보.

그 당시엔 얼마나 하기 싫었던지,

교수님이 메모라 하라고 한 내용들이 

마구 갈겨 쓰여있는 그 악보.


다시 조심스레 읽어 보았다.

여전히 손과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마지막 여덟 마디..


첼리스트 지망생으로, 음대생으로

마지막 연주했던 곡.

마주해보았다.


마음은 생각보다 괜찮았고,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손과 몸에 고마운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굳은살이 조금 다시 생겼다.


언젠가 손이 나으면

다시 이 곡을 연주해 봐야지.

작은 무대에서라도..

아주 아주 늙어서라도..




무언가를 마주한다는 것.

나에게는 많이 어려운 일이었다.

눈을 가려버리고, 도망치는 것이 가장 편한 일이었으니까.

그냥 없었던 일처럼 무심한 듯 살아가면서 아프지 않은 척하는 게 덜 아팠으니까.


2017년, 인생에서 가장 힘든 1년을 보내면서

조금씩 '마주하기'의 걸음마를 떼어놓고 그 이후 하루하루 새로운 걸음을 걸으며 살아가고 있다.

오늘 읽어본 악보 역시 그 걸음마 중 한 걸음이었다.


첼로는 나에게 애증의 상대였기에

하면서도 힘들었고, 그만두고서도 힘들었다.

아름다운 첼로 선율이 들릴 때면 다시 연주하고 싶은 마음과 시작조차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충돌했다.


독일 음대에서의 마지막 무대는 그래서 다시 제대로 기억하기 쉽지 않은 기억이었고,

그 악보를 꺼내어 다시 연습해 본다는 것은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무대에 홀로 앉아 조명을 받으며 관객과 교수님 앞에 앉아 피아노 반주를 따라

나의 시작점을 기다리던 시간.

악보를 읽어 내려가며 한 줄 한 줄 연주하다 결국 주먹을 쥐고 마쳐야만 했던 기억.


오늘 다시 마주하며 든 생각은

긴 시간 도망 다니지 말걸 그랬다, 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든 생각은

그래, 오늘이 바로 딱 그 날이었을 거야, 이기도 했다.


한 걸음씩 걷다 보니 이제는 조금 근육이 생겼나 보다.

내일은 또 어떤 도전을 해볼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하나하나 마주해나가는 것.

더 이상 도망하지 않고 부딪쳐 보는 것.

인간관계든, 일이든, 새로운 시작이든, 내가 두려워하던 것을 이겨내 보는 것.

꽤 해볼 만한 일이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누군가에게도 내일이 그런 날이기를 기도해본다.


#첼로 #파우어 #그리운무대 #이젠아마추어 #도전 #새로운삶 #걸음마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시작한 첼로 레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