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는 많지만 지식이 되기가 어려운 이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버트런드 러셀은 이런 말을 했다.
"단순하지만 매우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했다. 사랑에 대한 갈망, 진리의 탐구, 그리고 고통받는 인류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이다."
나 역시 이 말에 매우 동의한다. 물론 나는 그릇이 작아서 사랑에 대한 갈망과 고통받는 인류의 대한 연민은 내 인생에 그렇게 큰 동기가 되지 못하지만 적어도 진리에 대한 탐구는 언제나 내가 추구해 왔던 것이다. 나는 세상을 쉽고 통찰력 있는 단어들로 비유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우울증으로 지적 능력이 스스로도 하락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집중이 전보다 덜 된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는 재즈나 클래식 외에 아예 소음이 될 만한 것들은 피한다.) 나는 책을 읽는 것은 그래도 꾸준히 해왔다. 아주 어렸을 때 어린이용 셜록 홈스의 주홍색 글씨를 읽는 것을 시작으로 평생에 걸쳐서 해온 몇 안 되는 일이다. 왜 책이 좋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면 추리소설이 재밌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꽤나 어릴 때 텍스트를 읽어 버릇해서 그 습관이 나이 먹은 지금까지도 잘 버텨주고 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똑똑해질 거라는 어른들의 바람과 다르게 나는 그렇게 똑똑한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텍스트를 꾸준히 읽는다는 작업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어떠한 것을 빨리 추론해 내는 데는 도움이 된 것 같다. 그거 말고는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똑똑해지는지는 잘 모르겠다.
요새 들어하는 생각이지만 책을 많이 읽는 것과 책을 소화하는 능력이 있냐는 좀 다른 것 같다. 양으로 치면 나의 독서량은 꽤 되는 편인데 그 많은 지식들을 소화하거나 정보 이상의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스스로 많이 떨어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가끔 무슨 책을 읽었는지 기록하거나 생각해내지 않으면 잘 떠오르지 않는 책들도 있다. 책의 있는 정보들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스스로의 모습도 있다. 내가 어떠한 학문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깊게 알았다면 좀 더 쉽게 이해하고 능동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로 텍스트를 해석했을 것 같은데 나는 그 정도 그릇이 되는 사람은 아직 아닌 것 같다. 정보의 양을 많이 받아들인다고 해서 사람이 창의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그렇다고 비판적으로 무언가를 사고하고 도출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구나. 요새는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람의 수명은 정해져 있어서, 일생 내가 집구석에 처박혀서 텍스트만 본다고 해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의 양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진리들을 깊게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많은 지식의 분야에서 언제나 능동적이고 비판적인 완벽한 사람이 되는 건 애초에 쉽지 않다. 그럼 나는 내가 가진 지식을 최대한 잘 정리하고 요리해서 나만의 사고를 키워가야 한다.
이게 지적 허영심이 가득했던 20대 때와 가장 크게 달라진 점 같다. 20대 때는 지식을 습득하고 나와 비슷한 지식을 좋아하는 그리고 토론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기 바빴다면 (그러니까 어디 가서 떠들기에 바빴다면) 지금은 내가 생각보다 무색무취의 인간이구나. 생각한다.
몇 년 전부터 머릿속에 들어있는 정보를 모으는 작업에 비해서 요리를 잘해서 뭔가 나만의 색의 어떠한 지식을 내놓는 작업을 하진 않는다.
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점점 양극단화 돼 가는 세상에서 어설픈 지식이라고 지껄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혼란과 피로를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제일 크다.
정말 요새는 정보가 엄청나게 넘쳐나는 만큼 뭐가 사실인지 알기 어려운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그 과정에서 내가 갖고 있는 정보들을 요리해서 뭐라 뭐라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것이 정말로 '사실'을 기반으로 한 정보인지 또는 정말로 내가 남에게 말할 만큼 어떠한 것을 요리할 정도의 많은 재료를 갖추고 있는지는 언제나 의문이다.
인터넷 댓글이나 글을 보면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으로 판단하는 말은 많은데 어떠한 사실이나 통계를 기반으로 말하는 글이 줄어든 이유는 아마 그래서가 아닐까 싶다. 세상에 정보가 넘쳐나고 그걸 가져다 쓰기 쉽게 된 만큼 반대로 내가 경험하지 않은 -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대해서 그것이 내 의견과 반하는 정보라면 그것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점점 말을 아끼다 보니, 그렇다고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들을 재료로 남과 소통할 기회가 많은 것도 아닌 사람이라 책으로 얻은 지식들이 둥둥 떠다닐지언정 하나로 카테고리를 만들지는 못하는 것 같아서 요새는 책을 많이 읽어 절대적인 양을 폭발적으로 늘리는 대신 내가 정말로 관심 있어하는 분야를 몇 개 추려 그것을 깊게 파고드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이를 '지식 기우기'라고 표현하는데 지식을 갖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지식들은 그것을 연결하여 하나의 흐름으로 기억해 두면 훨씬 내가 꺼내 쓰기 좋을 것 같아서이다.
가령 나는 19세기말 유럽의 미술사에 대해서는 좀 알지만 음악사에 대해서는 깊게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당시 유럽이 정치적으로 어떤 환경이었는지 지식은 있지만 그것들이 서로 어떠한 영향을 주고받는지 중간중간 조각이 빠진 퍼즐처럼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를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그 분야에 대해서 좀 깊게 책을 읽으므로 지식을 하나로 기우는 과정을 완료했다.
문제는 내가 지금 이걸 해야 하는 분야가 무척이나 많다는 것이다. 지적 호기심이 많다는 것이 꼭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새로운 지식이 궁금하다고 지식을 계속 확장시키며 새로운 지식으로 가지를 치기보다는 몇 개의 큰 가지를 튼튼하게 만드는 일에 빨리 착수했으면 좀 더 지적인 성장이 지금보다는 빠르지 않았을까 생각이 돼서 더욱 그렇다. 정보가 지식이 되려면 상당히 많은 작업과 두뇌의 노동이 필요하다. 요새 서점가에 책 읽는 방법을 강의하는 책들을 보면 그런 것을 잘하시는 분이 꽤 많은 것 같은데 부럽다.
어쨌든 지식을 습득하는 뇌가 굴러가는 속도가 폭발하던 시절에 했으면 좋았겠지만.. 지금에라도 선택과 집중을 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 것은 잘 된 것 같다. 과연 이 여정의 끝에 뭐가 있을지 뭐가 남을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지금은 쓸모가 없다. 돈벌이가 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내 인생에 커다란 명예를 가져다주지도 않는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너무 많으니까.
하지만 스스로의 만족이 있다. 무언가를 알면 알수록 무언가를 읽으면서 답답한 기분은 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