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지칠 때 힘을 주시옵소서 ‘ - 증오의 기도문
예전에는 자본주의의 망령이 세계를 떠돌았다면 지금은 증오라는 망령이 세계를 떠도는 것 같다. 끊임없이 미워하고 쉽게 미워한다. 나와 조금이라도 다르다고 생각되면 공격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심지어 전 세대에 걸쳐있는 것 같다. 무엇인가를 혐오하는 것은 어른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린 친구들이라고 하여 또래를 증오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약자라고 하여 같은 약자를 증오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바야흐로 증오의 시대다.
증오와 혐오는 무엇이 다를까? 단순한 내 생각으로는 더러워서 피하면 혐오 미워서 죽이고 싶으면 증오라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에 기본적으로 만연했던 감정은 혐오이다. 외국인 이민자를 혐오하고, 나보다 못 사는 동네의 사람들을 혐오하고, 장애인들을 혐오했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순간 내가 말종 시켜야 하는 증오로 변했다.
그 증거로 누군가를 죽일 듯이 쫓아다니는 스토커 범죄가 끊임없고 전혀 일면식 없는 타인을 살해하는 묻지 마 살인이 갑작스럽게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주말의 광화문에 가면 다른 진영의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서 (일면식이 분명 없을 텐데도)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혐오를 뛰어넘는 육두문자의 증오의 말을 내뱉는 것을 아주 쉽게 구경할 수 있다. 장애인이나 사회생활을 하는 엄마 등은 바로 공격의 대상이 된다. 이제 더러워서 피하는 시대는 갔다 상대가 죽어야 사는 증오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다.
부모를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라면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지금은 그냥 쉽게 누구나 증오의 대상이 된다. 마녀사냥과 뜬소문으로 얼마나 많은 연예인들, 사람이 죽었던가. 그들이 꼴 보기 싫었을 수 있을지언정 직접적인 피해를 줬냐고 물으면 누구도 그렇다고 대답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들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 만으로 (또는 권리를 주장하는 개인이 뭉치는 것 만으로) 그들은 잠재적으로 나의 권리를 빼앗는 빌런이 되고 바로 증오의 대상이 된다.
왜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을 멈출 수 없을까? 물론 개인의 문제라면 단순하게 마음에 안 든다부터 시작하여 온갖 이유가 붙겠지만 지금의 증오는 매우 조직화되어 있다. (전에도 말했지만) 기술의 발전은 사람들을 쉽게 뭉치게 만들기에 뭐든지 한 사람의 목소리보다 더 큰 목소리를 조직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냥 텔레비전을 보며 재수 없네라고 하는 혼잣말이 이제는 조직화되고 무엇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모여 거대한 증오를 형성한다.
이와 겹쳐 가장 큰 문제는 점점 살기가 빡빡해지는 시대라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 생각한다. 어렸을 때 책상에 금 그어두고 여기 넘어오지 마라고 하는 어린아이들이 자라 상대가 나보다 조금만 더 배려받거나 편의를 주장한다고 생각하면 바로 네가 그럴 권리가 있냐고 공격을 가하는 어른이 되었다. 이 증오의 시대에 롤즈의 보이지 않은 장막은 이미 빛을 잃었다. 상대가 내 금을 조금이라도 넘는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얼마나 정당 한 지와는 상관없이) 과하게 흥분하는 담론만이 남았다.
증오를 형성하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증오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상처되는 말과 밑도 끝도 없는 감정적인 비난을 가하지는 않을 테니까. 많은 사람이 모이면 증오조차 정당한 것이 된다. 사실과는 관계없다. 단순하게 무슬림들이 자신의 성전을 만들고 싶다는 이유가 증오가 합쳐지면 바로 무슬림은 테러리즘이다라는 혐오와 증오로 변신한다. 한국에 있는 동남아 사람들은 쉽게 불법체류자로 의심받고 그 개인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이루는 것과 관계없이 증오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 증오의 대상이 되는 존재는 '존중받아야 하는 개인'이라는 권리가 박탈당한다.
다만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은 쉽게 누구나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오늘 누군가를 증오하는 사람이 나라고 한다면 다음날은 내가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쉽게 누군가를 증오할 수 있고 사람 하나 정도 쉽게 뛰어내리게 만드는 말을 내뱉을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글과 말이 얼마나 많은 무게를 갖고 있는지 점점 잊어가는 것 같다. 나와 같이 증오에 불탄 사람이 내 뒷배를 봐주고 있으니 과격한 내 언행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면 적어도 사람에게 관심 끄는 것조차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증오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적어도 스스로가 증오를 증폭시키는 불쏘시개가 되지 않을 수는 있지 않을까? 무관심은 분명히 나쁜 거지만 약간의 무관심이 증오에서 누군가를 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추운 날 광화문 앞에서 오늘도 서로를 향해 큰 스피커로 증오의 소리를 내뱉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