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붐비는 카페에 혼자 앉아있으면 재밌는 일이 너무 많다. 옆 테이블에 커플이 꽁냥꽁냥 거리며 가까운 미래는 보지 못하고 영원한 사랑을 속삭이는 소리, 맞은편에 앉은 사내놈들이 좋아하는 스포츠 팀을 두고 썰전을 벌이는 것들을 보면 도저히 귀를 땔 수가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이목을 집중시키는 행동은 바로 찰칵찰칵 소리와 함께 핸드폰 앞에서 한껏 멋진 척, 예쁜 척을 하는 사람들이다. 음료와 케이크를 먹기 전, 그것을 향한 두 세 방의 사진은 예열에 불과하다. 핸드폰을 들고 이리저리 양질의 조명과 가장 적합한 각도를 찾고 ‘내가 이 세상 최고의 끼쟁이다’라는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야말로 본론에 해당한다. 그리고 마무리는 SNS를 통해 이 같은 인증을 올리는 것으로 이뤄진다. 이 갬성터지는 행동을 듣고만 있는 것은 고역이다. 그들의 표정을 곁눈질로만 봐야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안방극장에서 누구의 눈치도 안보고 타인을 마음껏 쳐다볼 수 있는 관찰프로그램이 왜 이렇게 각광받는지 알 것만 같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증명한다. 내가 어디서 무엇을 먹었고, 마셨으며, 어떻게 즐겼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인증한다. 물론 과거에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터넷의 보급화와 스마트폰 그리고 SNS의 대중화는 우리를 본격적인 인증과 증명의 시대로 인도했다. 짧게나마 아날로그 시대를 겪었고 인터넷이 보급되는 시기를 경험했으며 SNS가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 때, 그 행렬에 동참했었던 내 경험이 이를 보증한다. 이처럼 누구나 증명을 하고픈 인증 홍수가 범람하는 때, 단순한 글, 사진 그리고 동영상은 경쟁력이 뒤떨어진다. 내 사진에 좋아요가 하나도 없고, 열심히 써서 올린 글에 댓글이 한 개도 없는 것은 쉽게 넘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인증에 특별함을 첨가해야 했다. 갬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는 온갖 인증 수단에 갬성을 한 스푼 넣었다. 인스타그램 검색창에 갬성을 검색해보면 ‘새벽갬성 오지는 야경’, ‘인스타 갬성 터지는 셀카’, ‘갬성터지는 여행지 사진’ 등이 무수히 쏟아지는 게 이를 방증한다.
갬성은 감성의 친척정도 되는 녀석이다. 우선 갬성은 감성이란 단어를 한껏 ‘힙’하게 굴려서 발음한다. ‘갬.성.’하고 딱딱하게 말하는 순간, 당신은 갬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된다. 따라서 갬성을 받아들이기 전에 “갬~성~”하고 혀를 굴려 연습하는 것이 좋다. 나아가 갬성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본디 갬성이란 것은 다 똑같은 인증의 행렬에서 돋보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개성 넘치는 친구다. 갬성은 특별해보이려고 태어났으며,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기 위해 만들어졌다. 어떨 때는 감성보다 소극적이며, 어느 순간에는 감성보다 적극적이다. 갬성을 한정지을 수 없다. 우리가 전자제품에 박혀있는 KC인증마크를 이해하려하지 않은 것처럼, 글과 사진 그리고 동영상 속 갬성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냥 받아드리면 된다. 그 뿐이다.
물론 개인과 특정한 세대에게 특화된 갬성을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갬성은 워낙 제멋대로 생긴터라 때로는 나의 도덕적, 정서적 가치관을 침범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일본에는 일부 젊은이들의 ‘인정욕구’가 너무 넘쳐 자신의 일터에서 엽기적인 행각을 SNS에 인증해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들의 빗나간 갬성터지는 SNS 인증은 쥐어터지도록 혼나야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SNS 속 모든 갬성러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쏟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 만큼 독특한 갬성은 개인이 개선해야 할 사항이다. 실제로 일본의 지나친 갬성러들을 잡아낸 것은 SNS 세상 속 다른 유저들이었다. 모든 갬성러들이 이를 용인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나는 아직도 카페에서 인증샷과 함께 셀카를 찍는 갬성러들을 볼 때면 어색하고 신기하기만 하다. 이는 내가 지닌 소심하고 나서기 싫어하는 성격과 정반대의 행동을 보고 있음에 느껴지는 감정일 것이다. 또 내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을 때마다 전면 카메라 모드 시 적나라한 나의 모습에 깜짝 놀라 허둥대는 반면에 카메라 앞에서 자신감 넘치는 갬성러들이 모습이 부러워서일 수도 있다. 허나 생각해보면 내가 받은 조신하고 얌전한 아이를 최고로 치는 교육과 시대정신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나보다 더 딱딱한 시대를 보냈던 기성세대가 갬성러들을 마주할 때 나오는 반응을 보면 이 같은 추측에 신빙성이 든다. 그러나 어쩌면 나와 기성세대가 갬성러들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것은 내로남불이다. 양재역 사거리가 말죽거리였을 때, 교련복이 ‘힙’하게 느껴져 갬성으로 통했던 기성세대도, 샤기컷을 하기위해 뒷머리를 전력으로 사수하던 현재 2030세대도 모두 그 시절 갬성에 의존한 적이 있다. 교련복이 샤기컷이 왜 그렇게 멋지게 보였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현재 갬성을 정의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이처럼 갬성은 그냥 받아들이는 게 가장 좋은 것이다. 혀를 끌끌 찰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