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 유난히 걱정이 많은 사람이 있다. 별거 아닌 일에도 안절부절 고민을 하며,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만약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들은 일이 닥치면 고민과 걱정에 빠져 잔뜩 예민해지고 표정은 일그러져 도통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특히 걱정이 많은 사람들의 빗나간 상상력은 밤에 더욱 빛을 발한다. 새벽에 찾아온 ‘걱정’은 친구의 사소한 메신저 대화에서 정치, 경제, 사회를 넘어 국제 분쟁에까지 개입하면서 스케일은 뻗어나간다. 그들은 그렇게 제풀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상상을 쏟아낸 후에야 피곤에 못 이겨 잠이 든다.
아쉽지만 중학교 2학 때 걱정에 중독된 이후 나의 삶이 이러하다. 사춘기가 한창일 무렵 나는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과 발칙한 장난을 쳤다. 1년 선배인 중학교 3학년 교실에 반 청소할 때 나온 쓰레기를 투척한 것이다. 하지만 어설픈 계획은 중3 형들에게 걸리고 말았고 우리는 주말이 지나 월요일에 ‘선배와의 면담’을 예약받았다. 이게 내 걱정사(史)의 서막이다. 친구들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지만 나는 아니었다. 결국 나는 온갖 걱정으로 주말을 보내고 난 뒤 월요일 아침 두근대는 마음으로 반에 들어갔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아침 조회부터 종례가 끝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레카! 그때부터 나는 ‘걱정’을 신봉했다. 걱정할수록 일이 해결될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유일무이한 생각을 한 것이다.
그 후 걱정은 몇 번씩 나를 구원해주면서 ‘걱정론’의 사례는 쌓여갔다. 좋아하던 여자애가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에 3일 밤낮 근심을 안고 살았더니 그녀의 남자 친구는 얼마 안 가 전학을 가버렸고, 집에서 가까운 고등학교에 배정이 안 되면 어떡하나 걱정하니 너무 근처인 곳으로 가게 돼서 밥 먹듯이 지각을 했다. 이렇듯 내 걱정이 워낙 신통(?)한 덕에 남들에겐 우스꽝스러운 생각이지만 나는 그것을 꽤 의미 있다고 여겼다. 가끔씩은 ‘내게 남들이 모르는 초능력이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상상에 빠져 우쭐대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만의 걱정론도 슬슬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걱정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깨달은 때는 20살, 성인이 되고나서부터다. 갑작스럽게 고향을 떠나 타지로 이사를 가야 할 때, 그 소식을 듣고 한 달이 넘게 걱정했다. 새벽에도 잠 못 이루며 걱정을 쏟아냈지만 이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고향의 골목, 친구 심지어 마트까지도 새롭고 소중하게 느껴질 때쯤 나는 떠나야 했다. 그 후로 ‘대학교 합격 발표 때’, ‘군에서 부대 배정될 때’ 등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걱정을 해봐도 결과는 안 좋았다. 걱정만으론 해결되지 않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계속되는 걱정의 배신이었다.
이젠 나는 오랜 시간 동안 흔적이 남아 관성처럼 이끌려 습관적으로 걱정을 한다.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받아들여 마치 걸어 다니는 개복치 같다. 이런 나를 요즘 가장 괴롭히는 것은 취업이다. 꽤 긴 시간 동안 나를 괴롭힌 취업 걱정은 떠날 줄을 모른다. 매일같이 들려오는 청년 취업률 하락 소식은 나를 더 몰아세운다. 가끔씩 친구나 동기의 취업소식을 들을 때면, 그날 밤은 맥주 한 캔 없이는 잠들기 어렵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걱정론을 머릿속에서 다시 펼쳐본다. 안 되는 줄 알면서 눈을 질끈 감고 걱정과 고민 속에 빠져본다. 학창 시절 때 경험했던 몇 번의 기적들이 다시 이루어지길 희망하면서.
‘걱정만으론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이것이 현재 내가 15살 때 생각하던 걱정론의 현재 결론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지금 영위하고 있는 것들 중 대부분은 걱정만으로 얻을 수 없었다. 지금은 기억이 흐려졌지만 어쩌면 과거 사례들도 아마 걱정과 함께 노력, 희생, 행운 등이 함께했을 것이다. 이제 새로운 걱정론을 가지고 현재 고민을 해결해 나가려고 한다. 10년이 넘게 걱정하고 고민했던 습관을 쉽게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법을 사용해볼까 한다. ‘밤새 걱정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 ‘만약을 가정할 때 최악보다는 최선을 염두하는 것’, ‘고민이 걱정에서 그치지 않는 것’ 그리고 지금 갖고 있는 내 어려움들이 새로운 걱정론의 사례들로 남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