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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희 Oct 26. 2021

꽃노을

전염된 풍경



주홍색 노을에 휩싸이며 이상한 감각이 전염되는 순간을 늘어놓는다. 길을 걷다 무의식중에 뒤를 돌아봤을 때 눈에 들어오는 풍경. 지하철 문이 열린 틈새 사이로 스며드는 빛. 여행의 귀가 버스. 멀어지는 전철 소리. 시골에 있는 녹슨 낡은 간판. 한밤중 인기척이 없는 길에서 깜박이는 신호등. 열차를 타기 전 역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간.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달무리가 생긴 보름달.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 때의 공기. 봄을 맞이하는 여린 잎. 심야의 공중전화. 비 오는 날의 가로등. 아이가 움켜쥔 바람개비가 바람에 팽그르르 돌아간다.


골목길을 걸었다. 노을이 비친 구름이 황홀하고 아득하게 다가왔다. 새빨간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만발하고 있었다. 비눗방울이 살랑이며 날아왔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밟고 올라간 다락방에서는 포근한 냄새가 났다. 새 필름카메라의 프레임으로 새롭게 바라보며 초점을 맞췄다. 낡은 생각이 선명해졌다. 구석에 있던 물건들이 유물이나 골동품의 형용을 하여 서먹하게 다가왔다. 맨방바닥이 천창으로부터 쏟아지는 빛을 안고 있었다. 생생하던 꿈에서 벗어나 보니 작위적인 몸부림이었다. 꿈의 연장선에 서 있다. 기억 속에서 다시 골목길을 걷는다.


다리 위에서 건너편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버스, 택시, 새, 오토바이, 광고판, 신호등.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 천천히 걸어가다 멈추기를 반복하는 사람. 비슷한 속도로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발밑의 그림자를 보고 뒤를 돌았다. 유리창에 반사된 햇빛에 슴벅슴벅 찔리는 듯했다.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일렁이는 물결에 비치는 잔흔 때문일까, 광채가 일었기 때문일까, 서느렇고 따뜻한 바람 때문일까. 풍경이 흐릿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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