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속으로 사회 출마
매 학기 아등바등 살던 대학교 생활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전공과 사이가 좋다가, 싫다가 하면서 버틴 4년 하고도 반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입추가 지나 날씨 좋은 날의 졸업사진을 기대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졸업식은 취소되었다. 마땅히 학교로 갈 일이 없어지자 졸업장을 제때 찾으러 가지 못했다. 예정대로였다면 졸업식을 했을 날에 방에 박혀있으니, 왠지 상반기를 허무하게 날린 것 같아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부터 졸업식에서 많은 축하를 받으며 학사모를 던지는 건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원하는 대학으로 진학했으나 막상 졸업을 앞두고 보니 그 성과가 시원찮아 보였다. 사실 학교에 불만도 많았다. 그래서 졸업식을 기점으로 이젠 정말 학생이 아닌 사회인으로서 출발하는 마음을 절실히 가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언젠가 학과 사무실을 방문하였을 때 간단한 인적사항과 함께 취업 현황을 기재해야 하는 종이를 받은 적이 있다. 취업 여부를 묻는 말과 더불어 어떤 직종, 직무에 종사하고 있는지 기재해야 했는데, 나는 아무 곳에도 표시할 수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을 딱히 뭐라고 정의 내리기도 힘들었고, 구체적으로 어떤 직무라고 설명할 수 있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해당 없음’에 체크 표시했다. 텅텅 빈 종이를 제출할 때 생각보다 마음이 심란했다. ‘졸업유예를 신청할 걸 그랬나.’하는 후회도 했다. 나는 지금껏 많은 일을 한 것 같은데, 뒤돌아보면 그 흔적이 반듯한 길이 아닌 삐뚤빼뚤한 낙서로만 남은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일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불규칙한 수입, 아니 수입이라고 부르기도 낯부끄러운 금액을 보고 있자면, 이 길이 아닌데 나만 모르는 건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어쨌거나 당장에 마주한 현실은 대학을 졸업해서 더는 학생이 아닌 사회인1이 되었다는 것이다.
친구들이 방학 때마다 어학성적을 만들기 위해 종로의 학원에 다니고, 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자격증을 따는 걸 지켜보면서 신기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는 목표가 없으면 딱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성향이라, 자격증과 어학성적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졸업이 눈앞에 닥쳐서야 졸업 기준인 어학성적을 맞추기 위해 벼락치기로 공부했고, 자격증 시험은 공부를 많이 하지도 않고서 늦잠을 핑계로 미루거나 취소했던 적이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친구들보다 먼저 졸업을 했다. 사회로 나갈 준비가 제일 부족한 사람이 과연 사회에서 걸음마라도 뗄 수는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어쩌면 평범한 직장인으로서의 삶과 조금은 다른 내 계획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사회가 보기에는 철없는 행동으로 보일 것 같았다. 그런 시선을 무릅쓰려다가 20살 때보다 도태될 것만 같은 기분은 그저 기우일까.
주변 사람들 다수는 대학까지 졸업했으니 현실적으로 살라고 말해주었다. 물론 소수의 사람은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맘껏 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수의 대표주자는 가족이었고, 소수의 대표주자는 대학교 동기에서 죽마고우가 된 친구들이었다. 대학 졸업이 1년여 정도 남은 시점부터 가족들은 원래 내 전공을 살리는 방향이 아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곤 했다. 물론 가족들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집안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예술계열이 적성에 맞다 선언하더니 결국 대학도 같은 계열로 진학했으니 말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소위 ‘예술가’들은 늘 배고픔과 사회 문제에 맞서고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사람을 만나지 않고 지내는 모습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술 분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꼭 그렇게 살지만은 않으며, 말 그대로 ‘대박’을 터뜨린 사람들도 있으니 나를 믿어달라고 설득하는 것밖에 없었다. 대박.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건 욕심이었다. 가족들을 설득한 시간 역시 4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내가 하는 일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으로 여겨졌다. 자의든, 타의든 학생으로서 보호받던 시기가 더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본격적인 나의 일을 하게 되었다.
2020년 8월, 그렇게 나는 무소속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