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님의 직업은 무직입니까, 프리랜서입니까

넌 신경 쓰지 말고 글이나 써라

by 정그믐

회원님의 직업은 무직입니까, 프리랜서입니까

종종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가 있다. 누군가 내게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하고 물어볼 때 그렇다. 졸업 후 한동안은 글이든 작사든 하고 싶은 일만 하겠다고 선언한 뒤 유독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많았다. 이 질문에 대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보기는 총 2개였다. 무직이거나, 프리랜서이거나.사회로 나가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로 ‘보험 가입’을 꼽았다. 집안에 가족력이 의심되는 ‘암’이란 질병이 있기도 했고, 우리 가족 4인 중 2명이 이미 암에 걸렸기 때문이다. 같은 질병으로 몸과 통장이 고생하는 모습을 본 나로서는 보험이, 기왕이면 암 전문보험이 시급했다. 그런데 당장의 나는 월마다 몇만 원씩 보험비로 납부할 금액이 없었다. 그렇다고 보험비 때문에 급하게 일할 회사를 찾기도 싫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지금 아니면 안 될 것만 같았고, 보험 가입도 일찍 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었다. 고민하던 중 아직 실비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단 어처구니없는 사실과 실비보험료가 만원도 채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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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언을 구하고 검색도 해보며 나름대로 가장 합리적인 곳이라 판단된 데에 실비 보험 가입을 했다. 인적사항을 하나하나 기재한 후 직업분류를 선택하려는데, ‘프리랜서’라는 선택사항은 보이지 않았다. 있어도 양심에 찔려 선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근 코로나19로 생긴 프리랜서 재난지원금도 기준 미달로 신청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수입은 나라가 재난지원 대상으로 삼는 소득 기준 턱 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2달간 50만 원 이상의 소득을 입증하라는데, 내게는 그런 서류가 없었다. 보험이든 재난지원금이든 일정 수준 수입이 있어야 믿고 돈을 줄 텐데, 일정하긴 커녕 없는 날이 더 많으니 기준을 맞출 수 없었다. 실비보험에 가입하던 달, 창작활동을 통한 수입은 저작권료 619원이 다였다. 그 이전 달에는 그것보단 약 40원 많은 660원이었다. 은행 이자나 펀드 수익에도 훨씬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재난지원금도, 보험 가입도 이런저런 제약에 부딪혀 타협하고 그나마 나은 걸 골라야 했다. 그래서 ‘무직’으로 직업을 선택하고 가입 완료 버튼을 눌렀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처리 중입니다’라는 말이 씁쓸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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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이전에 같이 작업했던 동요 작곡가님께 연락이 온 적이 있었다. 동요제에 같이 작업한 곡을 내려고 하니 나의 이름, 연락처, 주소, 직업을 적어서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꽤 예전에 작업한 가사가 다시 쓰인다는 사실에 반가워하며 양식을 술술 적다가 직업을 적어야 하는 차례에 이르러서 망설였다. 실비보험에 가입한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프리랜서’라는 정체성보다 ‘무직’이라는 정체성을 더 강하게 느꼈다. 그래서 결국 ‘무직’으로 써서 회신했다. 몇 분 후 작곡가님의 답신이 왔다.


- 무직이라니요^^ 동시 작가라고 할게요~^^


작곡가님의 답신 내용을 보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를 탓하는 내용은 아니었으나 민망했다. 작사가로 동요제에 응모하는 거면 직업을 ‘작사가’라고 당당하게 적었어도 됐는데 난 왜 ‘무직’이라고 적었을까. 두 달 합쳐 1,200원 수입인 나를 다른 사람들이 작사가라고 인정해주지 않을 거란 생각이 은연중에 들었던 것 같다.

동요제에서 나는 ‘동시 작가’로 불리고, 실비보험회사에서는 나를 ‘무직’으로 분류하고, 나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프리랜서’로 소개하고 싶어 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정답은 있겠지만 거기에 따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어떤 순간에는 작가로, 또 다른 때는 작사가로, 상황마다 변하는 내 직업과 정체성에 슬슬 익숙해져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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