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만수르였던 14살 중학생은 어디로

작사 오디션 보기

by 정그믐

작심삼일이란 말에 공감하는 나날이 많아졌다. 예전보다 열정이 떨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글이든, 공부든 그 대상이 무엇이든 열정이 예전만 못하다. 작심삼일을 100번 하면 1년을 채울 수 있다고 하지만, 한번 꺾인 열정은 잘 되살아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실패를 너무 많이 맛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부터 내 꿈은 ‘작가 and 작사가’였다. 내성적인 성격에 책 읽기가 좋아서 글도 쓰기 시작했고, 그래서 작가를 꿈꿨다. 중학교에 들어서는 대중가요에 눈을 떠 가사도 쓰고 싶었다. 그래서 도전했던 수많은 기회는 아쉽게도 쓴맛만을 주었다. 특히 작사가가 되기 위해 달렸던 시기에는 서류든, 면접이든 떨어진 기억이 너무 많았다.

작사가의 꿈을 가진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대중가요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중학생 때 내 짝꿍이었던 아이의 꿈은 가수였다. 그 친구를 따라 쉬는 시간에 종종 이어폰을 나눠 꽂은 채 음악을 듣고, 하교하는 길에는 오디션 이야기를 했다. 원래 글쓰기를 좋아해 작가를 꿈꾸던 나는 음악도 좋아하게 되면서 노랫말을 쓰는 ‘작사가’란 직업을 알게 되었다. 글과 함께 가사를 노트에 쓰는 날이 많아졌고, 그즈음 자연스레 꿈에 ‘작사가’가 추가되었다. 그 무렵에는 작사 학원이나 작사 공모전이 있다는 사실을 잘 몰랐다. 왠지 가수 오디션도 있으니 작사가 오디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주요 기획사 몇 군데의 오디션 페이지를 먼저 찾아봤다. 그러다 이메일로 작사/작곡 오디션 신청을 받는 몇 군데를 찾아냈다. 내 열정이 불타오르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부터였다. 회사별로 작곡가도 아닌 작사가는 잘 뽑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러나 나는 주어진 기회의 횟수를 더 늘리고 싶었다. 그래서 검색창에 ‘엔터테인먼트’라고 친 뒤 ‘사이트’로 세부 검색해, 1페이지부터 100페이지까지 하나하나 다 들어가 오디션 지원 분야를 확인했다. 그리고 ‘작사 부문’만 따로 오디션 신청을 받는 회사의 이름을 공책에 정리했다. 지금 기억으로는 30~40곳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만의 리스트를 만든 뒤 나는 주말마다 습작 노트를 뒤적거리며 쓸 만한 작사를 지원서와 함께 이메일로 제출했다.


14살의 나는 노트에 매일의 감상을 일기가 아닌 작사로 남겼다. 중학교가 끝나갈 무렵 작사는 스프링 노트로 세 권, 약 200편 정도의 분량이 되었다. 그땐 자신감이 넘쳤다. 내가 느끼기에도 난 아직 무궁무진한 나이이고, 만약 연습의 시간이 필요하다 해도 몇 년쯤은 투자할 수 있는, 어린 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어린 나이에 이만큼 습작을 했다는 것에 스스로 뿌듯해했다. 이 정도면 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너무 달랐다. 내가 보낸 메일을 확인하는지 알 길이 없었고, 수신확인에 ‘읽음’ 표시된 것을 확인해도 언제 다시 연락이 올지 알 수 없었다. 간혹 확인된 답변은 아쉬운 내용이었다.


지원해주신 내용은 꼼꼼히 살펴보았으나 우리 회사의 취지와 맞지 않아 아쉽게도...


TV에서 보던 가수 지망생이 된 기분이었다. 이제 ‘칠전팔기로 도전한 끝에 오디션 1등을 했어요!’라는 헤드라인을 향해 가야 하나 싶었다. 그러나 실상은 8번 도전으로 끝나는 게 아닌 수십 번 지원에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서류만 넣던 중, 마침내 서류에 통과하는 날이 왔다. 긍정적으로 답변이 온 곳은 2차 오디션을 위해 회사를 방문하라고 했다. 그래서 미성년자였던 나는 아빠를 대동한 채 서울의 기획사 몇 곳을 방문했었다. 품에 딱 봐도 중학생이 쓸 것 같은 스프링 습작 노트를 안고서 회사로 들어가던 순간은 여전히 생생하다. 내가 갔던 오디션은 가수, 배우, 작사 나눌 것 없이 같은 대기실, 같은 면접실에서 오디션이 이뤄졌다. 그래서 앞 순서의 지원자가 얼마나 패기 넘치게 인사하는지도 들을 수 있었다. 한낱 촌사람에 불과했던 나는 긴장감에 달달 떨었다. 나도 다른 가수 지원자처럼 각 잡히게 인사해야 할 것 같고, 우렁차게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다 결국 내 순서가 닥치고 면접실로 미끄러지듯 들어가자, 나와 눈을 맞추는 심사위원들의 기에 눌러 모기만 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자, 작사 부문 지원하는 14살 김혜원이라고 합니다...!”

“작사면 혹시 작사한 거 들고 왔어요? 그거예요?”

“아, 네, 네!”

“이쪽으로 줘 보세요.”


심사위원들은 내 노트를 쭉 넘겨보더니 다시 돌려줬다. 지금 생각하면 심사에 필요하니 두고 가라고 하지 않아 줘서 고맙다. 몇 가지 더 물어봤던 것 같은데 너무 떨렸던 나머지 질문도, 대답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긴장해서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것이 무색하게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기대와 걱정을 안고 밖으로 나온 나를 쳐다보는 아빠에게 뭐라고 말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터미널에서 먹은 가락국수가 긴장감에 비비 꼬인 속을 잘 풀어주었다. 아무튼 나의 첫 오디션은 그렇게 끝이 났다. 정말 그렇게 끝났다. 왜냐하면 더는 연락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몇 번의 서류 통과가 있었지만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진 못했다. 그렇게 나는 파란만장한 중학생 시절을 보내고 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이후로는 그때만큼 미친 듯이 기획사를 찾지도, 지원하지도 않았다. 대신 간혹 올라오는 작사 공모전에 응모하며 결과 발표 날까지 기대감에 부풀어 있곤 했다. 그 역시도 잘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한창 꿈 많고 쉽사리 기대하던 시기에 탈락을 많이 해서일까, 나는 그 뒤로 어딘가에 도전하는 게 두렵고 무서웠다. 14살 열정이 차고 넘치던 아이는 ‘떨어진다’는 느낌을 너무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10년이 지난 지금도 새롭게 도전하는 걸 꺼린다. ‘에이, 설마 내가 되겠어.’라는 마음에 시작도 안 하고 마음을 접는 일이 잦다. 주어진 일은 열심히 하지만, 내가 일을 개척하는 건 어렵다. 어쩌면 가족에게 통보한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다짐은, 내 안의 죽은 열정에 불씨를 마련하기 위한 마지막 발악일지 모른다. 다시 한번 그날의 나를 찾고 싶은 마음으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회원님의 직업은 무직입니까, 프리랜서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