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번째 이야기
고등학교에서의 3년의 생활은 월화수목금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이어지는 수업, 그리고 자율이라는 가명을 가지고 저녁 10시가 되어서야 끝나는 야간학습의 연속이었다. 이미 수많은 선배들이 거쳐간 빛바랜 갈색 책걸상에 앉아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친구들은 좋든 싫든 그것을 견뎌내고 있었다.
나는 우리 학교 내에서도 공부 꽤나 하는 아이들을 모아놓은 소위 ‘장학반’에 배정되었다. 반에는 PMP로 당시 아이돌이었던 소녀시대와 원더걸스 뮤직비디오를 보는 친구들,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거나 스도쿠를 하며 딴짓을 하던 친구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 책과 씨름하는 분위기 속에서 나도 펜을 놓지 않았다.
다만, 의자에 앉아있던 시간에 비례해 성적이 올라가는 케이스는 아니어서였는지 중학교 때까지 전교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던 내 학업 능력에 대해서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던 차였다.
더욱이 오른쪽 어깨가 틀어진 상태로 성장기에 하루 10시간 이상 의자에 앉아있다 보니 골반과 몸이 정상
궤도를 엇나간 신호를 보내왔는데 어느 순간이 되니 이상하게도 그 틀어짐 자체가 원래의 내 몸인양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라고 했는데 아마도 그때부터 나는 궤도를 엇나간 개체로 그렇게 강해지고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기숙사에서 지내며 학교를 다니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 멍한 날은 많이 줄었는데, 어차피 우리 모두 당장은 같은 환경에서 ‘입시’라는 공통의 적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비교할 수 있는 건 오직 숫자로 적힌 시험 성적과 의자에 앉아있는 시간뿐이었다.
내가 가장 어려워하던 과목은 수학이었다. 중학교 때까지의 나에게 수학은 공식을 외워서 푸는 ‘암기’에 가까웠다면 고등학교의 수학은 ‘암기‘하는 나 같은 학생을 걸러내는 것에 가까웠다. 이 시기에 나는 같은 반의 J가 꽤나 부러웠다. 이 자식은 평상시 야간학습시간에 스도쿠를 풀다가도 내가 수학문제를 물어보면 척척 풀어나가는 애였는데,
“이거 어떻게 풀면 좋을까?”
“잠깐만 마저 하던 스도쿠 좀 풀고, 아 이거?, 이거 그거네. 이렇게 하면 돼 봐 봐…”
아니, 왜 방정식은 답이 하나인거지? 내 생각에는 하나의 질문에 여러 개의 답이 가능할 수도 있는데. 수학은 어쩌면 재능의 영역인가? J를 봐, 스도쿠를 풀다가 갑자기 미적분을 풀어버리네. 이후로도 내 수학 성적이 J를 따라잡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어쩌면 스도쿠가 천재들의 특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진우야, 어디 보자, 성적이…”
“…”
고3이 되어 수능을 치르기 전, 입시에 대해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나눴다. 선생님은 내 성적과 성장 환경을 언급하시며 나에게 한 입시 제도를 언급하셨다.
“진우야, 솔직히 네 성적이면 겨우 인서울이 가능한 수준이야. 그래도 네가 자란 성장 환경을 입시에 녹여낼 수 있는 제도가 있어. 너 혹시 ‘기회균형’에 대해서 들어봤니?“
선생님의 이야기를 쉽게 종합해 보자면 ‘나 같은 아이’가 서울의 상위권 대학에 갈 수 있는 제도였다. 기회균형, 균형 잡힌 기회라니. ‘균형이 무슨 뜻이었더라’ 그리고 ‘기회가 무슨 뜻이었더라’ 갑자기 처음 듣는 영어 단어처럼 생소하게 다가와 생각에 잠겼다.
“네 성적이랑 성장 환경을 종합하면 충분히 괜찮을 것 같으니 지원을 한번 해보자“
그렇게 나는 선생님과 상의해서 S대, K대, Y대의 수시 기회균형전형에 지원했다. 다만, 이 전형에서도 한 가지의 조건이 붙었는데 그것은 수능 언어, 수학, 영어 중 최소 1과목에서 1등급을 받는 것이었다. 세 과목 중에서 내가 1등급에 가장 근접했던 것은 그나마 ‘암기‘였던 영어였다. 나는 그렇게 대학이 나에게 던진 기회와 균형을 잡기 위해, 영어시험 상위 4%에 들기 위해 수능 전 날까지 의자에 앉아 영어단어를 외웠다.
ABCDEFG…Bula Bula Thanks!
마침내 수능 날이 되어 나는 시험을 봤고 마지막 지구과학까지 모든 시험이 끝난 후 수험장을 나오며 내가 뱉은 첫마디는.
“망…”
2011년도 수능은 불수능으로 유명했었는데, 더욱이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했던 영어가 매우 어렵게 출제된 해였다. 특히 영어 29번 지문에는 이런 문제가 나왔었는데.
‘It is a fundamental mistake to imagine that when we see the non-value in a value or the untruth in a truth, the value or truth then comes to an end. It has only become relative. There is no finite end to it‘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구조적 실수였고, 유한한 끝이 없다는 지문과 달리 이제는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 이제 그만 타이틀을 내려놓을 때가 된 건가’ 싶었다.
수능이 끝난 날, 나는 친구들과 함께 난생처음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셨다. 이미 수시에 붙은 친구, 수능을 잘 본 친구도 있었지만 나처럼 아직 결과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 친구도 있었다. 그래도 우리 모두는 그렇게 술잔을 부딪히며 수험 생활이 끝난 것을 기념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조금 어지러웠지만 그래도 한 편으로는 코가 빨개지고 꽤나 들뜨는 일이기도 했다.
수능 점수가 나오기까지는 1달이 넘는 시간이 더 걸렸고 그러는 사이 학교는 들뜬 망아지들을 자율학습이라는 가명을 가진 자유시간으로 반에 잡아두었다. 그 시간에 우리는 이제는 한 명도 빠짐없이 다 같이 원더걸스 소희의 뮤직비디오를 봤고 소녀시대 멤버 중 누가 더 예쁘니하는 난상토론을 이어갔다. 참고로 나는 태연에 한 표를 줬다.
그러다가 수능 성적표가 공개되는 날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고 자리에 앉았고 선생님이 하나 둘 성적표를 나눠주셨다. 여기저기서 탄식 혹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나도 드디어 성적표를 받았고, 영어 점수를 가장 먼저 확인했다.
“1등급 커트라인 : 90점“
“나의 영어점수 : 91점”
1등급 커트라인보다 1점 높은 영어 1등급, 분명 29번 지문을 찍었던 것 같은데 그게 정답이었던 건가. 나는 1문제 차이로 최저조건 달성의 경계를 넘어 기회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고 시작과 끝은 역시나 상대적이었다. 그날은 너무 기뻤기에 그다음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너무 망한 내 언어와 수학의 점수도 역시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최저조건을 달성한 나는 3개의 대학 중 K대로부터 면접 통보를 받을 수 있었다. S와 Y로부터는 면접의 기회를 받지 못했지만, S는 너무 인간미가 없어 보였고 Y는 차가운 도시 느낌이라 나랑 안 어울리니깐. 그렇게 합리화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나았다.
K대에 면접을 보러 서울로 올라가기 전 날, 나는 기숙사 때 같은 방을 썼던, 당시 K대를 다니고 있는 형에게 연락했다.
“형, 잘 지내시죠?”
“응 그래, 무슨 일이야?”
“제가 이번에 K대에 면접을 보게 되어서 내일 서울에 가게 될 것 같은데 혹시 형 방에서 하룻밤 신세 좀 질 수 있을까요?”
“그래, 당연히 괜찮지. 그럼 내일 올라와서 연락해”
막상 크게 친하지 않았던 고등학교 1년 선배에게 불쑥 연락해서 1박을 부탁하는 것은 되게 머쓱한 일이었지만, 면접 준비에 들떠서 혹은 정신이 없어서 이게 머쓱한 일이었다는 것은 면접이 다 끝나고서야 뒤늦게 알아차렸다.
다음 날, 고속버스에 올라 서울로 향했다. 버스 창가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구름이 그럴싸하게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분명 무슨 모양을 닮은 것 같은데‘ 중얼거리다 결국 떠올리지 못하던 차에 지금 하늘에서 날 지켜볼 할머니와 아빠가 떠올랐다.
“잘하고 오라는 거지?”
서울에 도착한 당일은 선배집에서 1박을 신세 지고, 다음 날 면접장으로 향했다. 면접 대기장에는 나와 같은
전형에 지원한 다른 지원자들이 이미 수 십 명 모여 있었다. 그들과 쑥스럽게 목인사를 나누고 대기장에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미리 출력한 자기소개서와 지원서를 읽으며 내가 지금까지 어떤 궤도의 인생을 살아왔는지 한번 다시 되돌아봤다. 종이 속 정보의 나열로만 봤을 때는 나는 객관적으로 꽤나 불우했다. ‘부모의 이혼’ , ‘중학생 때 부 사망’ , ‘고등학교 때 조모 사망’ 그리고 ‘소년가장’. 하지만 그런 정보들의 총합이 나 자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그래도 꽤나 씩씩하게 자라왔고 좋은 친구들 그리고 그들과 좋은 생각, 시간을 공유해왔으니깐. 종이 속의 정보들은 불우했지만, 그 순간 자리에 앉아있었던 나는 불우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다 성경 시간에 S와 함께 시시콜콜한 철학자 행세를 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떨지 말고 하던 대로 할 말을 하고 오자고”
그리고는 차례가 되어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면접관은 내가 지원한 과의 교수님들이었다. 그들은 나의 자기소개서와 국가가 증명한 서류를 훑어보고는 다시 나를 바라봤다. 어릴 때부터 날 바라보던 어른들의 얼굴에서 익히 봤던 그 표정이었다. 연민과 대견함이 적절히 배합되어있어 마치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들과 비슷한 표정. 면접관들이 나에게 질문을 이어갔다.
“자, 오시느라 수고 많았어요. 자기소개 한번 해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저는 전진우입니다. 저는…”
어릴 때 생긴 말을 더듬는 버릇을 누르기 위해 침착하게 답변을 이어갔다. 내가 누구인지, 왜 이곳에 지원했는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모든 발언을 이어나갔고 말을 마치자 개운한 기분마저 들었다.
“잘 들었어요.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원할게요. 수고했어요. 나가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면접장을 나왔고 다시 고속버스에 올라서 고향으로 향했다. 내려가는 길 위에서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역시나 어제랑 비슷한 구름들이 몽실몽실 떠있었다. 이제는 무슨 모양인지 알 것 같기도 해서 괜히 설렌 마음까지 들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휴대폰으로 문자가 하나 왔다.
“K대 xxxx학과에 최종 합격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향후 일정과 관련해서 추가로 문자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나에게 주어진 그 기회를 다시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너무 기뻤지만 동시에 면접장에서 봤던 또래의 다른 지원자들이 생각났다. 분명 그들에게도 어떤 사연이 있을 터인데, 내가 그들의 기회를 빼앗은 것은 아닌지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같은 시간 대에 같이 떡볶이와 맛동산을 먹었던 내 친구 K와 P도 나와 같은 대학의 합격 문자를 받았다. 물론 그들은 온전히 자기 힘으로 이룬 것들이었기에, 나는 내가 왜인지 1/3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영어 1등급 하나 덕분에 가까스로 서울에 상경하게 된 그런 느낌이랄까. 그래도 친구들 앞에서는 이런 내 작은 기분을 애써 티 내지 않았다.
그렇게 서울에서의 대학생활을 위해 모든 짐을 정리해서 다시 서울행 고속버스에 오르는 날, 내 옆에는 K와 P도 함께 앉아 있었다. 그렇게 우리 7/3은 함께 서울로 향했다.
그러는 중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 위에서 1/3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날도 하늘에는 구름이 뭉게뭉게 가득했고 그것은 왜인지 그를 부풀게 해서 어쩌면 나머지 2/3가 채워질지도 모른다는 설렘마저 들게 했다.
2014년의 한 여름날, 나는 대학교 4학년의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있었다. 그날은 지난봄에 이미 신청해서 최종으로 선발된 ‘네팔 해외봉사’를 떠나는 날이기도 했다. 취업 준비를 대비한 하나의 스펙을 추가하기 위해 신청한 해외봉사였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만날 생각에, 그리고 첫 해외출국이었기에 나는 꽤나 들떠 있었다.
전국에서 모인 11명의 대학생 봉사단원들은 각 자의 이유를 가슴에 품고 설레는 마음으로 다 같이 네팔행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는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한 후 승합차에 올라 2시간여의 산길을 다시 달렸고 마침내 산 중턱에 있는 한 학교에 도착했다. 수업을 듣던 아이들이 뛰쳐나와 아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리들을 해맑게 반겨주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학교 시설 보수 및 특별수업을 준비하는 등의 일을 맡았다. 특히나 학교 시설을 보수하는 날이면 아이들과 함께 돌을 나르고 학교 담장에 페인트칠을 했는데 아이들은 페인트를 칠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다가와 물을 먹여주기도 했고 그러다 장난을 치며 도망가기도 했다.
총 15일의 봉사 기간 중 나는 ‘강가’라는 한 여자아이에게 특히 많은 정을 붙였다. 5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였는데 똘망똘망한 눈 덕분인지 첫날부터 나의 시선을 끌었고 성격도 어찌나 귀여웠는지 다른 봉사단원들도 한번 씩은 그 아이를 안아보려 애를 썼다.
그러던 중 하루는 강가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모든 봉사단원들이 걱정하고 있던 차에 현지 선생님이 가끔 있는 일이라는 표정을 지으시며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우리 학교에는 가끔 학교에 나오지 않는 아이들이 있어요. 아이들의 일손도 그들의 부모에게는 귀한 노동력입니다“
몇몇 아이들은 학교에 나와야 할 시간에 부모를 도와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현지 선생님은 말을 이어갔다.
“차라리 그런 아이들은 형편이 나은 편이에요. 아예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부모도 있어요. 우리가 가서 설득해도 달리 방법이 없어요”
교육에 대한 기회가 노동력의 손실이라는 벽 앞에 막히는 곳. 그렇게 강가가 오지 않은 그날, 걱정을 품은 우리에게 달리 방법은 없었다. 현지인들의 삶의 무게 앞에서 15일 동안 잠깐 왔다가는 외국인들이 감히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기다리는 것 뿐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정말 다행이었던 것은 다음 날 강가가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는 점이었다.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보니 전 날의 걱정은 그렇게 사르르 녹아버렸다.
짧았던 봉사를 마치고 학교와 아이들을 떠나던 날, 우리 봉사단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눈물, 콧물을 훌쩍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이 많이 들었는데. 나는 다른 단원에게 부탁해서 강가를 안고 사진을 찍었다. 언젠가는 기억 속에 묻힐 소중한 순간을 그래도 되도록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한없이 가벼웠던 5살의 여자아이는 지금도 사진 속에서 손가락 하나를 입에 물고 환하게 웃고 있다.
나중에 인도에 가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강가’라는 이름은 힌디어로 ‘갠지스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강가는 그 이후에도 학교를 갔을까. 내가 세상으로부터 기회를 받았던 것처럼 그 아이에게도 기회가 갔을까. 요즘도 가끔 그 아이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