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번째 이야기
중학생이 된 나에게 기초생활수급 가정의 아이로 살아간다는 것은 친구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우유와 같은 것이었다. 그 시절, 중학교에서는 방학식 날이 되면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방송으로 불러내어 교무실 앞에서 우유를 받아가게 했다. 내 기억으로는 각 반에서 최소 3명씩은 모두 교무실 앞으로 모였다.
"자, 1학년 1반 이기명, 한다혜, 전진우 그리고 1학년 2반 김석우, 최형식... 교무실 앞으로 오세요"
방학 동안 아이들이 굶주릴 것을 염려한 학교의 배려였지만, 나를 포함한 그 아이들이 교무실 앞에서 받아서 반으로 들고 간 것은 우유가 아니라 놀림감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다행히 옷 깃이 빳빳하게 다림질된 옷을 입고 있던 내 친구들은 처음 교복을 산 이후로는 다림질을 해본 적이 없는 교복을 입고 있던 내가 들고 온 우유를 문제 삼지 않았다. 누구 하나 자기는 왜 우유를 주지 않냐고 불평하는 아이도 없었다. 그들도 뭔가를 아는 눈치였지만, 애써 티 내지 않았다.
“우유 한 박스네. 이따가 집갈 때 무겁겠다”
“응. 그러게…“
그때의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 말을 해줄 텐데. 그때 모른 척해줘서 고마웠다고. 기회가 된다면 서울우유를 하나씩 사서 손에 쥐어주고 싶다. 그래도 상하목장 우유는 안돼. 너무 비싸잖아 그건.
그렇게 나는 하루 치의 불안감을 지불하고 한 달 치의 우유를 얻었다. 그 무렵, 그렇게 질풍노도의 시기에 진입한 나는 점점 내가 느끼는 멍한 상태의 실체에 가까워졌다. 그것은 언젠가 반 아이들에게 불우한 가정의 아이라는 사실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차라리 다 까발려져서 더 이상 이런 불안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는 충동의 대립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양쪽이 너무 극렬히 대립하는 중이어서 와중에 그 둘 사이가 텅 비어있는 그런 느낌이기도 했다.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짜장도 아니고 짬뽕도 아닌 동적평형의 그 상태는 다른 자식을 흉보는 나의 할머니, 남편과 자식을 떠나간 어머니 그리고 다른 아빠들처럼 멋지게 양복 입고 출근하지 못하는 나의 아빠를 모두 품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그렇게 방학 내내 나는 흰 우유에 문방구에서 산 100원짜리 제티를 타서 초코우유를 만들고는 홀짝홀짝 마셨다. 어쩐지 그 맛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은 날에는 딸기맛 제티를 사서 타 마셨는데 흰 우유의 색이 날에 따라 초코색 혹은 핑크색으로 변해갔다. 어른들이 우유를 많이 마시면 다 뼈로 간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내 뼈에는 불안감 조금, 고마움 조금 그리고 초코색과 핑크색이 뒤엉켜 남아있으려나.
그 무렵, 아빠는 단칸방의 월세를 자주 밀리는 듯했다. 국가에서 매 달 지원해 주는 지원금으로는 우리 다섯 식구의 생활비가 부족했던 탓이었을까.
"죄송합니다. 1달만 더 기다려주시면..."
"아휴, 그래요 알았어요..."
다행스럽게도 우리 집주인아주머니는 뺑덕어멈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영화 속에서 보면 ‘10일까지 안 낼 거면 식구들 다 데리고 나가세요‘ 아니면 ’처음부터 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하던데. 역시나 현실은 영화가 아니니깐. 선한 인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악한 인상도 아니었던 파마머리의 아주머니는 그렇게 단칸방에 사는 다섯 식구를 조금은 헤아려주셨다.
집 밖에 있는 화장실을 가야 할 때면 주인집을 지나쳐야 했는데 나는 그러다 주인아주머니를 만나면 바닥을 쳐다보곤 하였다. 그런 나를 보고 주인아주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렇게 화장실에서 똥을 누고 나오면 그날은 왠지 모르게 더 찝찝했다.
중학교 때 나는 학교 앞에 있던 ‘금강학원’에 다녔다. 학원에 다니고 싶다는 나를, 그래도 공부를 조금 하는 나를 아빠는 어떻게든 학원에 보내주었다. 그리고는 학원비를 내야 할 때가 되면 아빠는 단칸방의 집주인아주머니에게 미리 연습한 그 문장을 재활용했다.
“죄송합니다. 1달만 더 기다려주시면..."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캠퍼스커플이던 아내와 결혼해 순천시로 내려와 학원을 차린, 조금은 투박하게 생기셨던 학원 원장선생님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학원차도 직접 운전하였는데 싫은 내색 없이 학원비를 밀린 아이를 30분에 걸려서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고 했다.
낮 시간에 아이들을 태워 학원으로 향하는 노란 차에서는 라디오가 흘러나왔는데 그것은 ‘잠깐만 우리 이제 한번 해봐요 사랑을 나눠요’ 혹은 ‘라라라라…반짝이는 아침 햇살 속으로 꿈을 안고 차오르는 새처럼 푸른 가슴 따사로운 숨결로 달려가는 여성시대’로 시작했다. 특히나 여성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저 노래가 어찌나 밝던지, 학원으로 가는 길이 다 따사로웠다.
저녁에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다 줄 때는 원장선생님이 사랑했던, 영국밴드 Queen의 노래가 무조건 흘러나왔는데 주로 ‘Don’t stop me now’ , ‘We are the champions’ , ‘We will rock you’ 등이었다. 우리 집은 다른 아이들을 모두 내려준 뒤에야 향하는 곳이었기에 나는 그렇게 친구들보다 더 오래 Queen의 노래를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Queen의 노래를 읊조리게 되었고 나는 그중에서도 특히 무대를 발로 세 번 구르는 ‘We will rock you’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We will, we will rock you
We will, we will rock you‘
Queen에 대한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나는 어른이 된 뒤에도 그들의 노래를 종종 즐겨 듣는데 하루는 ‘We will rock you’의 가사가 의미하는 ‘진짜‘ 뜻을 알아버리고는 돌에 맞는 기분이 들었던 적이 있다. 그동안 나는 전투장면, 스포츠 응원가와 어울리는 이 노래를 들으며 ‘rock you’가 의미하는 것이 ‘너에게 돌을 던질 거야’, ‘너를 물리칠 거야’라는 뜻으로 지레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Queen이 가사에 진정으로 담고 있던 내용은 ‘우리가 너를 흔들어 위로해 줄게‘ 였다. 인생의 덧없음과 약하고 실수하는 사람을 흔들어 위로한다니, 가만 보니 박완규 같은 로커가 로커인 이유가 긴 머리를 찰랑찰랑 흔들어서 그 로커인 건가. 아니, 혹시 진짜 그건가. 어찌 되었던 학원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던 그 시간 길 위에서 나는 본의 아니게 Queen에게 위로를 받았던 셈이다.
나는 학원 내에서도 공부를 곧잘 하는 아이였다. 중학교 2학년 때 한 번은 기말고사에서 전 과목 1문제를 틀려서 전교 1등을 한 적이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업적 중 하나인데 그때 원장선생님은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으시며 학교 앞에 이런 현수막을 내걸으셨다.
"금강학원 출신 산남중학교 2학년 전진우 기말고사 전교 1등 경축 (전 과목 1문제 틀림, 자랑이라서 한번 더 적음)“
원장선생님이 자랑스럽게 현수막을 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 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밀린 학원비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조금은 덜어냈다. 아주 조금.
비슷한 시기에 하루는 하교 길에 평소 날 예뻐하시던 학교 담임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러내어 이런 질문을 하신 적이 있었다.
“진우야, 너는 선물을 받는다면 뭘 받고 싶어?”
“저 휴대폰이요…”
나는 그때 휴대폰이 없었고, 휴대폰을 가지고 있던 친구들을 속으로 내심 부러워하고 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답했다. 선생님은 “그렇구나”라고 하시며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알았으니 내일 보자”라고 하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선생님이 그걸 왜 물어보셨을까‘ , ’나에게 선물을 사주시려는건가‘ 생각이 들었는데 그 일이 진짜로 일어났다. 그 주 주말 선생님은 나를 모토토라 매장에 데리고 가서 내 생애 첫 휴대폰을 사주셨다. 그리고는 이 말을 붙이셨는데.
“늘 하던 것처럼 앞으로도 씩씩하게 지내라고 선생님이 선물해 주는 거야”
나는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선생님‘이라고 했지만 왜인지 담임선생님이 사주는 휴대폰을 선물 받는 게 조금은 쑥스러워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분명 사비로 사주셨을 텐데, 이 자리를 빌려 쑥스러워하지 않고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말씀드립니다 선생님. 모토토라는 망했지만 제 가슴속 모토로라는 선생님과 함께 영원할 거예요.
담임선생님은 이후에 나를 한 장학재단에 이어주셨는데 그곳에서 나는 한 분의 정기후원자와 연결되었다. 그 후로 매 달 1일이면 내 통장에는 ‘부스러기 장학재단 이XX 후원자 100,000원’라는 글자가 찍혔는데 그 돈은 내 책값, 군것질 비용 혹은 비상금이 되었다.
하루는 후원자님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기억을 되살려 각색한 내용은 ‘장학재단에서 진우를 소개해줘서 알게 되었어. 힘든 환경 속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며 꿈을 키워나가는 모습을 열심히 응원할게. 씩씩하게 지내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번 꼭 만나보고 싶다‘ 였다. 나는 담임선생님께 ‘감사합니다’를 할 때처럼 쑥스러움을 꾹꾹 눌러서 후원자님께 답장을 적었는데 끝에는 ‘저도 보고 싶습니다’를 적는 것을 잊지 않았다.
20살이 되어 서울에 올라온 후 한 번은 장학재단의 주선으로 실제로 후원자님을 뵐 기회가 있었다. 백발의 선한 인상을 가지신 할머니셨는데 자신을 두 딸의 엄마라고 소개하셨다. 그리고는 내가 K대에 진학해서 너무 자랑스럽다고, 근데 생각보다 키가 너무 커서 놀라셨다고. 놀라게 해드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내가 그분이 상상하셨던 귀여운 이미지는 아니긴 하니깐, 그냥 상상 속의 유니콘으로 남아있을 걸이라는 생각이 조금 들긴 했지만 그래도 후원자님에게 자랑스러운 아이가 되어서 뿌듯했다.
조금씩은 부족했던 것들에 대해 세상은 나를 채워주며 길러갔고 모른 척해줬던 나의 친구들, 단칸방의 주인아주머니, 학원 원장선생님, 담임선생님, 후원자님 그리고 Queen은 우유 속의 칼슘처럼 지금도 내 몸 어딘가에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그렇게 세상을 부모로 둔 나는 2023년의 어느 늦은 여름날, 이집트의 카이로에 있었다.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이집트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그곳에 도착한 직후였다.
이집트는 북아프리카에서도 꽤나 안정된 국가였지만, 그럼에도 역시나 빈부격차가 매우 상당한 곳이었다. 카이로 길 위에서는 이를 보여주는 장면들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는데 이가 몇 개 빠지고 발음이 새는 흰 수염이 덥수룩한, 신발 한 짝이 없는 중년의 남성. 때 묻은 히잡을 쓰고 길 위에 멍하니 앉아있는 노파. 여기저기서 구걸하는 맥없는 아이들. 그리고 그러한 장면들의 반복. 여행자인 나는 그들을 둘러싼 사연을 상상해 보며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아이가 내 곁에 바짝 붙어서는 구걸을 했다. 유난히 멍한 눈망울에 힘이 없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던 아이를 보고는 마음이 동했다. 그리고는 경험상 돈을 주는 것보다는 먹을 것을 주는 게 좋다는 걸 알아서 가방 안에 있던 빵을 건넸다.
“자 여기 빵”
“No. money”
빵을 받기를 거부한 그 아이는 돈을 달라고 했다. 만약 원래 같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인데 왜인지 그 아이에게는 돈이 정말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에게 50파운드 지폐 한 장을 건넸고 그 아이는 들떠서 자리를 떠났다. 그러더니 잠시 후 그 아이는 자기 친구를 데려왔다며 자기 친구에게도 돈을 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문제가 터졌음을 직감했다. 친구에게 돈을 주면 친구는 친구의 친구를 데려올 것이고 그 친구의 친구는 또 자기의 친구를 데려오는 그런 문제.
나는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아이들에게 “I’m sorry”를 연신 외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약한 사람을 흔들어 위로해 주는 사람이고 싶었는데, 나는 그날도 그렇게 아이들의 마음만 흔들고는 도망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