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번째 이야기
그 시절, 나는 시외버스로 1시간 거리의 광양에 있는 고모네집에 놀러 가는 것을 좋아했다. 가는 날에는 어찌나 설레던지 동생이랑 둘이 터미널에 가 2,100원짜리 티켓을 사서 버스에 오르는 것도 무섭지 않았다. 고모네 집은 형태를 갖춘 아파트였고 집 안에 화장실이 있는 곳이었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이불을 개는 그곳에서 나는 고모의 자식들, 그러니깐 나의 사촌 동생들과 여름이면 메뚜기를 잡고, 겨울이면 눈놀이를 하며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곳은 어쩐지 사람이 사는 곳 같았다.
8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그때부터 단칸방에 5명이 사는 것이 특별하다는 것을 점점 느끼게 되었다. 특히나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에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 그들이 주말에 엄마아빠를 따라 Outback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더욱 그랬다.
“나 주말에 생일이라 아웃백 가서 스테이크 먹고 왔는데, 샐러드바에 음식 종류가 엄청 많았어“
“근데 아웃백이 뭐야?”
“아빠가 패밀리레스토랑이라던데, 미국식 식당인가 봐”
그때부터였던 걸까. 나는 우리 집에서 Outback까지의 거리를 찾아봤고 그것의 여파는 실로 상당했다. 화살은 주말 내 Outback에 다녀온 내 친구들로부터 시작해서 나의 할머니와 아빠에게로 향했는데 그들은 내 마음속에서 속절없이 화살을 맞고 있을 뿐이었다.
할머니와 아빠, 모두 나에게 하나뿐인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언제나 멋진 영화 속의 슈퍼맨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에게 일찍 들켜버리고 말았다. 물론,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산타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은 더 일찍 알아버린 후였지만.
그들은 그저 어떤 한 인간의 군상이었다. 겨울이면 손주에게 홍합국을 끓여주는 엄마 같은 할머니와 사업 실패 후 다마스를 운전하며 어떻게든 재고로 있는 유기를 팔아보려고 발버둥 치는 하층민 아빠. 그들은 나에게 밥을 주는 부모임과 동시에 Outback에 데려가주지 못하는 부모였다. 그것은 어쩐지 낮에 하늘에 떠있는 달과 같아서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머리가 멍했다. 그놈의 아웃백이
뭐라고. 수업이 모두 끝난 나는 터덜터덜 신발주머니를 차며 집으로 향했다.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어버린 찝찝한 기분을 영 지울 수가 없었는데 돌아온 집에는 할머니가 끓여놓은 홍합국이 한가득이었다.
20살이 된 후 하루는 영어를 공부하다가 Outback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사람이 살지 않는 내륙의 오지’였다. 내가 부러워했던 그것이 사실은 오지였다니. ‘뭐야, 나 오지에 갔다 온 친구를 부러워했었던 거네’ 이런 생각이 드니 해묵은 찝찝함이 조금은 가셨다.
이후로 하늘에서 달이 수 없이 뜨고 지기를 반복하는 사이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며 날로 키가 커갔고 멍한 날도 함께 많아졌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였을까. 나는 왜인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어쨌든 나는 공부에서 손을 놓지는 않았다. 할머니와 아빠에게 일말의 희망을 가져다주는 소위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고 싶다는 최소한의 책임감은 가졌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그냥 전부였다.
주변 사람들은 이런 나를 꽤나 기특해했다.
"진우야. 집안 형편도 안 좋은데 너라도 열심히 공부하고 의젓하게 자라서 참말로 다행이다"
"네..."
최소한의 책임감을 이행한 나는 어느새 불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묵묵하고 의젓하게 자라고 있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초등학교 시절 이미 키 170cm를 넘어섰던 나를 보며, 어른들은 나를 그럴싸한 어른취급했다. 단지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공부를 조금 한다는 이유로 애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저도 아직 어리답니다’를 내뱉기보다는 세상이 나에게 주는 그 타이틀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의 아빠는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까지 제 발로 일어서기 위해 그 간 매우 다양한 일을 했다. 갯벌에 나가 짱뚱어를 잡는 일, 잡은 고기를 금호고속버스 짐칸에 실어 광주에 있는 식당으로 올려 보내는 일, 개고기 식당 운영 그리고 리어카를 끌며 족발을 파는 일까지. 바다에서 땅으로, 그는 마치 인어라도 된 마냥 사방으로 물을 튀기며 쏘다녔다.
특히나 아빠가 리어카를 끌며 족발을 팔았던 그 시절은 나에게는 시리게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추운 겨울날 아빠와 함께 족발장사를 따라다니면서 얻어먹었던 그 고기의 맛은 돼지의 다리만큼 맛있었기 때문이다.
“족발 하나 주세요”
“네 앞다리로 드릴까요 뒷다리로 드릴까요?”
“뒷다리가 더 싸죠?”
“네 이천원 더 쌉니다”
“그럼 뒷다리로 주세요”
아빠는 족발을 썰고난 후 손님에게 나갈 수 없는 잔 고기 조각을 나와 동생에게 주었다. 맛있었는데, 또 먹고 싶다.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 요즘도 걸어가다 노점상의 아저씨들을 볼 때면 가끔 그때의 추억이 떠오른다는 핑계로 붕어빵 몇 개를 집어먹는다. 응? 족발이랑 붕어빵이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붕어빵에서 족발 맛이 난다.
어른이 되어서는 내가 족발빵을 한번 만들어서 팔아볼까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지만, 족발빵에 진짜 족발을 넣어서 판다면 생각보다 잘 팔릴 수도 있지 않을까. 아버지, 날 보고 있다면 정답을 알려줘.
아빠의 발버둥이 무색하게 역시나 우리 집에는 영화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꿈은 점점 사그라들었고 그렇게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다. 요즘 애들은 줄여서 ‘기생수’라고 부르는 그 상태는 좋게 말하자면 국가의 지원을 다른 가정에 비해 좀 더 적극적으로 받는 것을 의미한다. 나쁘게 말하자면 그냥 ‘기생수’다. 단어의 어감이 뇌리에 직격 하는 바로 그 느낌처럼 국가에 기생하는 상태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요즘 애들은 정말이지 예리하다.
국가에 대한 기생을 공식적으로 허가받은 이후, 단칸방에서 가장 생기 있는 것은 하루 종일 재잘거리는 TV 뿐이었다. 그것은 마주한 상대에 따라 그때그때 목소리를 바꾸었는데 주로 동물의 왕국, 6시 내 고향, 인간극장 혹은 일요일 점심의 전국노래자랑 같은 것들이었다.
그 무렵, 작은 삼촌은 술이 늘어만 갔다. 그리고 술이 느는 만큼 분노도 차올랐을까.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면 그는 아빠에게 한 소리를 퍼부었다.
“그때 형이 그 사업만 손대지 않았어도!”
“…”
주로 말없이 듣는 것으로 아빠는 동생의 원망을 감당했지만 하루는 사단이 나고야 말았다. 그날도 같은
레퍼토리로 작은 삼촌이 분을 토하고 있을 때 참다못한 아빠가 밖으로 나가 작은 삼촌에게 주먹을 휘둘러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정적과 함께 작은 삼촌이 집 밖으로 나갔고 나와 동생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그저 TV를 보며, 지금 보고 있는 내용에 집중하고 있는 척하며 싸늘한 공기가 물러가길 기다릴 뿐이었다.
그때 TV에서는 동물의 왕국이 한창 방영 중이었는데 성우의 내레이션 중 한 부분이 계속 내 귓가에 맴돌았다.
“치타가 가젤을 뒤쫓습니다. 가젤은 그런 치타를 피해 잽싸게 도망칩니다. 형제가 성공을 뒤쫓습니다. 성공은 그런 형제를 피해 잽싸게 도망칩니다. 동생이 형을 욕합니다. 형은 그런 동생을 칩니다. 치타가 가젤을 뒤쫓습니다. 가젤은 그런 치타를 피해…“
치타가 가젤을 사냥하는 것을 보고 치타를 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가젤이 무조건 도망치기만을 바라며 치타가 굶어 죽기를 바라는 것은 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형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생을 허비한 동생들, 그런 동생들의 원망을 등에 업은 형. 어렸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 후로도 작은 삼촌은 한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