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번째 이야기
나와 나의 여동생은 그때부터 아빠, 할머니 그리고 작은 삼촌과 함께 작은 주방 겸 거실이 딸린 단칸방에서 지내야 했다. 단칸방에서 겨우살이 한다는 것은 한 번 끓인 국은 최소 3일은 연속으로 먹는다는 것과 동의어였다. 겨울만되면 우리 집 국 솥에는 홍합이 항상 들어앉아 있었는데 할머니가 시장에서 싸게 업어온 홍합은 우리 집의 훌륭한 국거리였다. 국과 함께 상에 올라오는 반찬은 주민센터에서 불우한 이웃에게 보내주는 김치와 가끔 시장에서 저렴하게 사온 야채로 할머니가 만들어주는 나물이 전부였다.
"또 홍합국이야...?"
"먹기 싫으면 먹지 마"
내가 물으면 아빠는 퉁명스럽게 답하곤 했다. 먹기 싫으면 먹지 말라니. 요즘 애들은 밥을 안 먹으면 엄마가 어떻게든 달래서, 무릎 꿇고 사정이라도 해서 먹인다던데. 단칸방에서는 금쪽이가 탄생할 수 없는 법이다. 나는 그렇게 국에 밥을 말아 우걱우걱 먹고는 학교에 가곤 했다.
밤에 오줌이라도 마려울 때면 방 안에 있는 요강을 이용해야만 했는데 왜냐하면 화장실은 집 문 밖으로 나가 왼쪽으로 돌아야 겨우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똥이라도 마려우면 그것은 매우 번거로운 일이었다. 가끔 저녁에 동생이 큰일이 왔다고 신호를 주면 우리 둘은 벽돌만 한 배터리를 집어삼킨 손전등을 들고 화장실로 향하곤 했다.
단칸방에서 아침저녁으로 이불을 개고 펴는 일은 사치였다. 이불은 바닥에 항상 깔려 있었으며, 그것은 아침밥을 먹을 때는 방석이었고 오후에는 카펫이 되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비로소 본래의 역할로 돌아갔던, 1인 3역의 그것들은 내 기억으로는 계절에 한 번씩 겨우 세탁질을 당했다. 현대인들의 이슈 중 하나인 집먼지 진드기는 우리 다섯 식구의 동거인이었다. 아마 나의 할머니와 아빠는 집먼지 진드기라는 단어가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물론, 그들도 그렇게 지내는 게 몸에 좋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세상의 그 많은 우려도 우리 집 공중에 떠다니는 가훈 앞에서는 숙연해졌다.
"죽을 일도 아닌데 뭐..."
이런 배경 때문인지 지인들과 대화하며 가끔 청소에 유난 떠는 모습을 마주할 때면 내 어릴 적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는 욕구가 턱 밑까지 차오를 때가 있다. 물론, 하지는 않는다. 그래봤자 돌아오는 건 둘 중 하나일 게 뻔하기 때문. 연민 아니면 어쩌라는 눈빛. 그렇다고 내가 지금도 이불을 계절에 한 번씩만 빨래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빨래는 그때 그때 한다. 지금처럼.
그 당시 우리 집에는 바퀴벌레가 많았는데, 밤에 자기 전 이불속에 누워있으면 짐을 넣어둔 박스 사이로 파드득 소리를 듣는 게 일상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점점 익숙해지기도 했거니와 박스 전부를 다 헤집어서 바퀴를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저 내가 자는 사이 내 옆으로만 오지 않기를 바라며 파드득 소리와 함께 매일 밤 인간극장을 보며 잠에 들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길 가다가 길 위에 누워있는 바퀴벌레를 마주할 때면 인간극장의 BGM이 머릿속을 메운다. 따라라라 라라... 그것은 나에게는 마치 한평생을 빌어먹으며 많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피해 고단하게 살다가 이제 곧 숨을 거둘 바퀴를 위한 추모곡과 같은 것이다. 다큐멘터리 바퀴극장 다음 이 시간에.
그 당시, 나와 내 동생의 최애 놀잇감은 자전거였다. 아빠는 중고로 사 온 1인용 보라색 자전거의 핸들과 안장사이의 공간에 스펀지와 노끈을 이용해서 앉을만한 공간을 만들어줬다. 의자가 아닌 그것은 그럴싸한 의자역할을 했고 나는 거기에 동생을 태운 후 동생의 뒤통수를 마주하고는 온 동네를 휘저었다. 동생은 10분마다 엉덩이가 아프다며 불평을 쏟아내곤 했는데 의자 역할을 하는 그것은 역시 진짜 의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보라색의 2인용인 척하는 1인용 자전거는 이후로 고장 한번 안 났던 단칸방에 어울리는 꽤나 튼튼한 자전거였다.
토요일이 되면 아빠는 주말 내 우리 남매가 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낼 것을 꽤나 우려했는데 그는 일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찾은 최선의 양육정책은 내 손에 10,000원권 한 장을 쥐어주는 것이었다.
그의 양육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우리 남매는 그 돈을 가지고 매주 주말 아침이면 보라색 자전거에 올라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울트라 PC방으로 향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름이 울트라가 뭐람. 아무튼 PC방에 도착하면 단발머리에 조금 통통했던 주인아주머니가 우리 남매를 방과후학교 선생님처럼 반갑게 맞아주셨다.
"왔구나"
"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그녀는 주말이면 항상 방문하는 우리 남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고, 나는 매주 주말 아주머니의 ‘왔구나’를 들었을 때 포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곳은 우리 남매가 주말이면 있어야 할 곳이었다.
나는 그 당시 유행했던 디아블로라는 게임을 했는데 아이템이 강해질수록 악마를 쉽게 잡을 수 있는 그 게임을 하며 또래 아이들보다 더 강해지기 위해 아이템 수집에 열을 올리곤 하였다. 그러다 희귀 아이템이라도 떨어지면 그 순간 PC방에 있던 모든 또래 아이들은 모두 내 모니터 앞으로 모였다.
“야 대박대박”
“오 멋진데”
악마를 제거하는 영웅의 무기가 날로 강해지는 경험, 그것은 초등학생이던 나에게 가장 큰 과업이자 보람이었다.
그러다가 저녁밥을 먹을 때쯤이 되면 나와 내 동생은 다시 보라색 자전거에 올랐다. 게임 속 악마가 자기를 다시 때려잡아달라는 환청이 들리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페달을 밟아 동생과 집으로 향했다.
아빠는 장사 혹은 일을 마치고 늦은 저녁 돌아올 때면 항상 우리 남매에게 간식을 사다 주곤 했는데, 메뉴는 주로 붕어빵, 떡볶이, 크림빵 같은 것이었다. 부족한 아비 노릇을 그렇게라도 메우려던 거였을까. 아버지의 마음을 먹은 우리 남매는 날로 살이 올랐다. 그렇다고 지금의 과체중까지 그때의 아빠 탓을 하는 건 상식적으로 아니긴 하지만.
하루는 아빠가 우리 남매에게 한 일정을 통보했다.
"다음 주말에 우리 다 같이 광주에 있는 동물원에 놀러 가자!"
항상 PC방 가는 것으로 채워져 있던 나의 주말 일정에 생각지 못한 변수라니, 어린 나에게는 꽤나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아주머니의 ‘왔구나’를 다음 주말에는 못 듣는다는 사실이 서럽기까지 하였다.
아빠는 아마 지인과 막걸리 한 잔을 걸치다가 그로부터 한 소리를 듣고 온 모양이었다. 그 한소리는 추정컨대 아마 이런 내용이지 않았을까.
“자네가 아무리 바빠도 애들이랑 동물원은 한번 다녀와야 그게 진짜 아빠 아니겠는가“
그렇게 그다음 주말 할머니를 포함한 우리 가족은 진짜 아빠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기차를 탄 후 광주의 동물원으로 향했다. 우리 가족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호랑이 우리였는데 그것은 역시 맹수의 왕이어서인지 꽤나 자연스러운 발걸음이었다. 도착해서 창살 넘어 마주한 그것은 풀이 죽어있었고, 왜인지 호랑이 같지가 않았다. TV에서 동물의 왕국을 볼 때는 달랐는데. 으르렁 소리를 듣기 위해 꽤 오랜 시간 기다렸지만 그것은 지쳐 보였다.
이후에는 하마를 지나 코끼리를 보러 향했다. 아빠는 호랑이가 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코끼리가 풀만 먹는다는 사실은 그날 처음 안 듯했다.
"덩치가 큰 놈이 뭐든지 더 많이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세상에는 엄연히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이 존재하는 법이었다. 잡식이었던 아빠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을지도 모르겠다. 이후로도 아빠는 그날 하루 그럴싸한 진짜 아빠의 역할을 이행했다. 이를테면 우리에게 핫도그를 사주고, 회전목마를 태워주는 식의 그런 것들 말이다.
내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어린 시절의 추억은 위에서 말한 에피소드 혹은 무궁화 기차칸을 쏘다니는 카트에서 할머니가 나에게 사브레를 사줬을 때, 동생이 없는 날에 혼자 자전거를 타고 동네 강아지를 골려서 나를 쫓아오게 만들었을 때 정도가 전부다.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기네 집에는 어릴 적 사진첩 혹은 부모님이 캠코더로 찍어둔 10gb 메모리 카드를 가득 채운 영상 따위가 있다던데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그냥 확인하지 않기로 한다.
실물 사진도 아닌, 머릿속을 맴도는 색 바랜 몇 장의 장면들. 그래도 장면이 수두룩하다면야 엄지손가락으로 스르르 넘기면서 동영상인 척 흉내라도 내볼 수 있으련만 몇 장 남지 않은 것들로는 그 마저도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