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모들

3 번째 이야기

by 우두커니

"할머니, 나 어묵 사줘"


할머니, 고모를 따라 시장으로 놀러 간 6살 나의 관심사는 갓 튀겨낸 500원짜리 어묵이었다. 내 고향, 전라남도 순천시에는 매 월 2,7일로 끝나는 날에 전라남도 최대의 장터가 열린다.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시장을 방문한다. 직접 키운 농작물을 팔아서 용돈벌이를 하려는 노파, 김장 준비를 위해 배추 값을 천 원이라도 깎아보려는 앞치마를 두른 뚱보 아줌마, 그리고 나처럼 그런 사람들 틈을 비집으며 간식을 챙겨 먹는 아이들까지.


"자 진우야, 여기 있다 어묵. 뜨거우니깐 조심해"


할머니가 나에게 어묵을 쥐어주며 넌지시 말했다. 나의 할머니는 60살이 넘는 나이에도 그 시절 다른 할머니들과는 달리 파마를 하지 않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머리에 기름을 발라 참빛으로 아침저녁 머리를 정돈하고는 짧게 묶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그녀는 20대 시절, 전라남도 벌교의 한 남자에게 시집을 왔다고 한다. 심성이 여렸고 놀기를 좋아했다던 그 남자, 나의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 40대 이른 나이에 단명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3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혼자 키워냈다. 물론, 2명의 딸은 이미 아기 시절 병으로 잃은 후였다. 그 시절, 여인네 혼자 4명의 자식을 키워낸 인생의 무게는 그녀 손에 있는 주름과 굽은 허리에 온전히 흔적을 남겼다. 어쩌면 그녀가 파마를 하지 않고 정갈한 머리를 고집했던 것은 풍파 속에서도 놓고 싶지 않았던 한 소녀의 닻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장손이었다. 첫 째 아들의 아들. 그 무게감만큼 그녀는 나를 매우 예뻐하였다. 나 역시 그런 할머니를 잘 따랐고, 어릴 적 할머니와 떨어질 때가 되면 항상 울곤 하였다. 마치 다시는 못 만날 것처럼 울어대서 어른들이 나와 할머니를 떼어 놓으려고 할 때면 손에 꼭 사탕을 쥐어주며 관심을 돌리곤 했다.


"진우야, 여기 사탕 봐봐 여기"


그러는 사이 할머니는 고모의 차를 타고 고모네집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1시간 거리 광양에 있는 고모네 집에서 지내는 일이 잦았다.


그녀는 4명의 자식들을 따로 만날 때면, 가끔 그 자리에서 다른 자식의 흉을 보곤 하였다.


"아이고, 둘째는 요즘 왜 그런다니...“


어린 나는 옆 자리에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멍하니 어묵을 받아먹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지금 마주하고 있는 자식과의 관계를 다지는 일이었으며, 가슴속 응어리를 털어내는 일이었으리라. 이제는 다 큰 내가 그렇게 지레 짐작해 본다.


나의 아빠는 일찍 아비를 여읜 집안의 장남이었다. 그는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이후 할머니를 도와 어린 나이부터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요즘 말로 못 배운 자식이었다. 그래도 그는 인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예의 바른 청년이었고, 꽤나 달변가로 사람을 대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청년이 된 그는 할머니, 작은 삼촌 그리고 고모와 함께 순천시의 시내에서 이불가게를 시작했다. 가게는 꽤나 번창했고, 그 무렵 그는 한 층 더 커진 사업에 대한 야망과 함께 나의 어머니를 만났다고 한다. 중매쟁이를 통해 그가 만난 어머니는 전라북도 진안의 한 처자였다. 그는 그 당시 여러 다른 여자들도 많았지만 170cm나 되는 큰 키에 매료되어 어머니를 선택했다고 가끔 술을 한 잔 걸칠 때면 이야기를 풀어놓곤 했다.


"그때는 사업이 잘 될 때라서 여기저기서 중매해 준다고 여자들이 줄을 섰었지..."


이후 그 둘은 채 1년이 되지 않는 짧은 연애기간을 가진 후 결혼하였고, 1992년 나를 세상 밖으로 내보냈다. 나는 태어날 당시 4kg이 넘는 우량아였다고 하는데 머리가 어찌나 컸던지 할머니가 나를 등에 업고 다닐 때면 항상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져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가족은 혹시나 내가 큰 병에 걸려 세상으로 나온 것은 아닌지 속앓이를 했다고 한다. 내가 큰 머리통을 가진 것에는 이러한 역사가 있다.


그리고 그 이듬해, 1993년에는 내 동생 진화가 세상으로 나왔고 2자녀를 책임지게 된 가장은 사업에 더욱 욕심이 붙어 유기(제사상에 쓰는 그릇)를 크게 도매하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정말 대한민국 경제발전과 함께 사람들이 조상님 모시기에 더욱 열성적으로 임할 거라고 굳게 믿었던 걸까? 역사의 흐름을 배운 지금의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잠깐 갈 수 있다면 그에게 이 말을 꼭 전할 텐데.


"아빠 5년만 기다려, 5년만 있다가 IMF 터진 이후에 그때 유기장사를 하면 그때는 제사가 풍년일 거야. 그러니깐 제발 5년만 기다렸다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현재의 나는 타임머신이 아직 개발되지 않고, 인터스텔라는 이미 개봉한 시대에 살고 있다. 내 바람은 책장 속의 작은 진동 수준이었고 역시나 예상되는 결말처럼 내가 5살쯤이던 1997년 무렵 IMF시기와 겹쳐 그는 모든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물론 많은 빚, 형제들의 원망과 함께.


그의 사업 실패 후, 다음 해 나의 어머니는 우리들 곁을 떠났다. 그녀는 뉴밀레니엄이 채 되기도 이 전인 그 당시에 소위 요즘 말하는 당찬 MZ 같은 선택을 내린 것이다. 사업 말아먹은 남편을 떠나기는 감히 쉬운 결정이었다고 치더라도 2명의 자식을 놔두고 떠나는 것은 그녀에게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다 커버린 지금의 나는 당시 어머니의 MZ식 결정을 99% 응원하고 51% 이해한다. 나의 어머니도 지금의 내가 그러는 것처럼 자신의 인생을 살 권리가 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태어날 당시 4kg이 넘는 대두의 사내아이를 자연분만으로 출산하신 나의 어머니, 이미 그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면죄부는 차고 넘친다. 그래도 자식 된 도리로 어머니에 대한 아무런 감정을 안 가질 수는 없으니 0.1%의 원망은 가슴속에 살며시 남겨본다.


당시 어렸던 나는 이런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눈뜨고 멍하니 바라보는 게 전부가 아니었을까.


"이 할미가 뭐 맛있는 음식 해줄까?"


할머니가 떠난 어머니의 빈자리라도 채우듯 나에게 묻곤 했다.


"할머니, 나 어묵 사줘"


나는 답했다. 그래, 나는 할머니가 있으니깐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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