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번째 이야기
중학교 2학년의 생활도 마무리에 다다른 어느 늦은 가을날, 그날도 나는 반 당번이 되어 교단에 쌓인 낙엽들을 한 곳으로 치우고는 3교시 기술과 가정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담임선생님이 나를 급히 밖으로 불러내셨다.
"진우야, 아버지가 쓰러지셨다고 연락이 왔어”
나와 동생은 소식을 듣자마자 택시를 타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과학 실험시간에 종종 맡았던 쾌쾌한 소독약 냄새 그리고 사람들의 앓는 소리로 범벅된 침울한 병원 공기 한가운데 아빠가 누워있었다. 파란색 병원이름 글씨가 빼곡히 들어찬 시트로 덮인 병상 위에 산소호흡기를 찬 낯선 모습의 아저씨가 누워있었다.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아빠는 그날따라 집에 남은 상한 고등어를 굳이 먹었다고 한다. 반찬을 버리는 것이 아깝다며 중얼거리면서 고등어 뼈를 발라먹는 아빠의 모습이 그럴싸하게 눈에 선했다. 그러다 일을 가기위해 집을 나섰고, 당시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어딘가의 불편한 기색과 함께 바닥에 머리부터 떨어졌다고 한다. 의사는 우리 남매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머리부터 넘어지셔서 혈관을 다친 것 같아. 그리고 추가적인 검사를 해보니 평소에 당뇨도 조금 있으셨던 것 같고”
인생이 짠 만큼 그에 비례해서 아빠의 오줌은 달달해져만 갔던걸까. 아마 아빠는 그동안 자기한테 당뇨가 있었는지도 몰랐겠지. 맞다, 죽을 일 아니면 괜찮은 집안이었지 우리 집안이. 그렇게 아빠는 고등어의 살과 자신의 뇌 핏줄을 바꿨다. 다행히 병원 치료를 통해 큰 고비는 넘겼지만 한쪽으로 굉장히 치우친 물물교환의 결과는 뇌졸중 진단이었다. 그렇게 널배를 타고 갯벌 위를 쏘다니던 나의 아빠는 왼쪽 팔이 접힌 채 지팡이에 의지해 겨우 걸을 수 있는 절름발이가 되었다.
이후에 아빠는 1년이 넘는 시간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재활을 했지만, 당뇨로 인한 합병증이 심화되어 건강은 날로 악화되었다. 장손이라는 핑계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사춘기라는 자기 합리화로 내가 아빠의 병실을 방문하는 시간은 그렇게 날로 줄어만 갔다. 그때 고개를 돌린 15살 나의 모습이 지금도 뇌리 속에 아리게 선명하다. 그러는 사이 내 동생 진화가 아빠를 위해 병원을 오가는 시간이 잦았고 그런 동생에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어느 늦은 봄날, 그렇게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이어가던 아빠는 잠시 우리 단칸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날따라 집에는 나와 아빠 단 둘이었고 어딘가 어색한 공기 속에 아빠가 나에게 “치킨이 먹고 싶네“라고 넌지시 말했다. 나에게는 후원자님에게 받아 모아놓은 비상금이 있었기에 ”그럼 내가 치킨 시킨다“라고 말한 후 냉장고 위 자석에 적힌 전화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치킨이랑 피자랑 세트 메뉴 있죠?“
“네, 있어요. 배달해 드릴까요?”
“네, 치킨은 순살로 부탁드릴게요”
“네, 금방 해서 보내드릴게요”
배달이 도착한 직후, 아빠와 나는 치킨을 먹었다. 별 말없이 집중하면서 먹어서 치킨에서는 닭냄새가 조금 올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날따라 치킨은 눅눅했고 튀김이 조금 두꺼웠다. 치킨을 다 먹은 후 아빠가 나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아들놈이 사주는 치킨 먹어서 좋네”
나는 딱히 뭐라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다음에 또 사줄게”라고 하고는 말았다. 아빠는 옅은 미소를 띠었다. 다음 날 아빠는 지팡이를 집고 절뚝이며 병원으로 돌아갔고 그로부터 몇 주 뒤 내가 중학교 3학년이던 그 해에 그렇게 하늘로 갔다.
아빠가 떠난 날, 나는 상주가 되었다. 장례식장에서 급하게 빌린 어른 사이즈의 양복을 헐렁하게 입고 노란색 상모를 썼다. 어딘지 불편했다. 몇 안 되는 아빠의 지인들이 왔고 친척들이 왔고 담임선생님이 오셨다. 담임선생님은 나를 말없이 안아주셨다. 장례식장에는 도통 우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것은 그럴듯하게 이상했다. 호상이니, 어차피 더 살아봤자 좋은 꼴 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니 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더 이상 절뚝이며 걷지 않아도 되는 게 호상의 이유라면 호상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의 아빠는 참 많은 사람들의 원망을 등에 업은 사람이었다. 부모보다 단명한 자식, 사업을 말아먹은 형, 대학 가고 싶다는 동생 앞 길을 막은 오빠, 누군가의 돈을 갚지 않은 빚쟁이. 머리부터 땅에 떨어진 이유가 그 무거운 어깨 때문이었을까.
아빠를 화장하기 전 우리 남매는 아빠를 마지막으로 만질 수 있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삐쩍 말라버린 몸, 조금은 부풀어 오른 배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손. 과학 시간에 사후경직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었다. 모든 동물은 죽은 후 몸이 굳는다고 했다. 살아생전 바삐 움직였던 근육과 조직들이 더 이상 그럴 이유를 잃는 순간. 아빠의 몸이 딱딱해진 걸 손으로 만진 순간 아빠가 진짜 죽었다는 게 실감되었다. 그리곤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그전까지 꾹 눌려있던 내 눈물샘이 이제는 주체할 수 없이 날뛰고 있었다. 아빠가 진짜 죽었네. 우는 동안 동물원과 코끼리가 떠올랐고 족발이랑 고등어가 떠올랐다. 그놈의 고등어는 왜 그때 시장에서 사 와서 빨리 먹어 해치워버리지 않은 거야. 미안했고 그냥 미안해서 계속 눈물이 났다. 그러다 치킨을 맛있게 먹던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또 사준다고 했는데. 비상금도 많이 모아뒀는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물을 닦고 있는 내 옆으로 마침내 작은 삼촌과 고모가 관 뚜껑을 닫았고 딱딱해진 아빠는 그렇게 화장터로 들어갔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카메라를 통해서 관이 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는데 불길이 어찌나 세었는지 타고난 뒤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생각에 덜컥 겁이나니 눈물이 그쳤다. 1시간이나 지났을까. 다행히 아빠가 다 타버린 그 자리에는 얼룩진 하얀 조각들이 남아있었다. 전문가들은 능숙하게 그것을 수습해 어딘가로 가져갔다. 이후 그것은 흰 도자기에 담겨 내 품으로 돌아왔는데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열기를 머금은 아빠의 조각들, 하마터면 나는 그것을 놓아버릴 뻔 했다.
그렇게 아빠를 보내고 바로 다음 날은 월요일이었다. 친구들에게는 아무 말하지 않았고 슬픈 눈을 하며 학교를 다닐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아빠를 떠나보낸 것에 경황은 없었지만 학교는 늘 다니던 방식으로 다니면 되는 곳이었다.
얼마 있다가 학교 운동회 시즌이 다가왔고 반마다 반 장기자랑 무대를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 반은 남학생들이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여학생이 그 위에 앉는 율동을 선보일 예정이었다.
그러다 안무를 연습하던 중, 내 몸에 사단이 나고야 말았다. 반 친구이던 누리가 윗몸일으키기를 하던 내 위에 앉는 순간 오른쪽 어깨에서 강한 통증과 함께 뼈가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누리가 황급히 놀라서 나에게 물었다.
“괜찮아?”
“응. 괜찮은데 오늘 연습은 이만해야 할 것 같아. 조금 아프네”
나는 그렇게 집으로 돌아갔고, 어른들에게 병원에 데려가달라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았다. 아빠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경황도 없거니와 그전에도 다친 후 시간이 지나 알아서 나은 경험이 많았으니깐. 더군다나 나는 우리 집 허공에 떠도는 그 가훈을 항상 잊지 않았다. 그렇게 그날 이후로 내 오른쪽 어깨는 조금 틀어진 채로 굳어갔다.
성인이 된 후에는 돌릴 때마다 우두둑 소리가 나는 내 오른쪽 어깨를 보며 그때 병원에 데려가달라고 말하지 않은 나 자신을, 운동회 준비에 윗몸일으키기를 넣은 학교를 원망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가만 생각해 보니 나를 단칸방의 아이로 자라게 한 것에 대하여, 아비를 일찍 여읜 것에 대하여 한탄하는 게 순서상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아무 의미 없는 원망과 한탄이라는 뜻이다. 고등어는 아마 날 보며 왜 자기는 사람 말고 고등어로 태어나게 했냐고 따질 테지.
“저는 왜 저런 헛소리하는 인간보다 나은 존재인데 고등어로 태어나게 하신거죠? 제가 더 고등생물인 것 같은데 말이죠“
2025년의 어느 봄날, 나는 인도에 있었다. 그전까지 인도는 나에게 약간은 밀린 숙제 같은 곳이었다. 내가 여행을 많이 다니는 것을 아는 지인들이 나에게 했던 단골 질문 중 하나는 ‘여행 좋아하는 사람들은 인도 무조건 간다던데 너도 다녀왔어?‘였고 나는 ‘나중에 한번 가봐야지‘라는 대답을 누적하고 있던 터였다.
내가 이미 여행했던 제3세계 나라들, 이를테면 남미와 동남아에서 받은 느낌들과 미디어에서 접한 장면들을 조합하면 이미 내 안에서 인도의 이미지는 스케치를 넘어 거의 색을 입고 있는 중이었다. 더욱이 이미 수년 전에 인도의 접경국가인 미얀마를 다녀온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그 이미지는 더욱 그럴싸했다.
뉴델리에 도착해서는 머릿속 이미지와 실제 장면이 교차되었는데 ‘내가 이제는 진짜 여행 좀 했구나‘라는게 실감이 났다. 길 한편에서 오줌을 누는 사람들,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드는 파리들, 쓰레기를 먹는 소. 빤히 나를 쳐다보는 시선들. 마치 인도를 2 번째 방문하는 기분으로 그 모든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아 여기가 인도가 맞네. 인도라면 이래야지.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연신 혼잣말을 하던 뉴델리 여행을 마친 후 나는 갠지스강이 있는 바라나시로 향했다. 갠지스강은 모든 인도인에게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죽기 전 꼭 한 번은 방문해야 하는 그곳에서 인도인들은 갠지스 강물에 몸을 담근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현생에서 쌓은 나쁜 카르마를 조금은 씻겨낼 수 있다고 믿는다고 한다.
갠지스강변을 걸으면서 수많은 고행자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예전에 EBS에서 봤던 내용이 문득 떠올랐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수련을 위해 인도 전역에서 수행자들이 바라나시로 몰려든다고 했다.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하는 고행자, 알몸으로 다니는 고행자는 순한 맛이었다. 몇몇은 지켜보는 내 몸이 아파왔는데 이를테면 일부러 한 팔을 계속 들어 올려 어깨를 굳게 한 고행자, 나아가 자신의 신체부위를 자른 고행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특히 일부러 어깨를 굳힌 고행자를 보고는 굳어진 내 오른쪽 어깨에 새로운 신경세포가 돋아나는 느낌마저 들었다. 내가 일부러 고행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굳은 어깨 덕분에 나 역시 뭔가를 조금은 깨닫고 있던 터였다.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내용에 따르면 고행자들은 고통이 극에 달할수록 깨달음에 가까워진다고 믿는다고 한다. 저 고행자는 자신의 다리를 자르면서 진짜 깨달음에 가까워진다고 믿었을까, 수많은 고행자들을 목격하는 와중에 교양 수업시간에 싯다르타에 대해서 배웠던 내용이 떠올랐다. 싯다르타도 한 때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행 수련에 매진한 적이 있더랬다. 하지만 그는 결국 고행을 통해서는 ‘진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인정하고 그 길을 나와 불교를 창시했다. 만약 싯다르타가 고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고 그 걸 기반으로 불교를 만들었다면, 우리가 지금 접하고 있는 불교는 아마 다른 모습을 하고 있겠지. 이를테면 팔이 한쪽 없는 주지스님, 볼 때마다 한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있는 동자승. 이 모습이라면 불교 신자는 개신교 신자를 절대 앞지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실소하고 말았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강가를 걷던 중, 한 인도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자신의 이름을 Raj라고 소개했다.
“나마스테, 당신은 어디서 오셨나요?”
“나마스테,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나마스테, 흔히 인도의 ‘안녕하세요’라고 많이들 알고 있는 표현이다. 인도 여행을 가기 전 책자에서 나마스테의 진짜 뜻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은 ‘내 안의 신성함이 당신 안의 신성함을 존중합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인도인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갠지스강 옆에서 인도인에게 나마스테를 들으니 정말로 내가 신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더니 그가 나에게 물었다.
“North or South?”
“당연히 South”
인도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항상 돌아오는 질문이었고 나는 그들이 아이스브레이킹처럼 던지는 농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웃으며 대답했다.
“장난이에요. 저는 사실 북쪽에서 온 한국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어요”
“저도 북쪽에서 온 한국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어요”
“그렇군요. 저는 인도의 다른 도시에서 비행기를 타고 갠지스강을 보러 왔어요. 갠지스강에 오는 것은 우리 인도인의 인생 목표와도 같아요“
그 역시 갠지스강을 보기 위해 멀리서 온 성지순례자였다. 그는 나에게 인도사람에게 갠지스강이 의미하는 것을 설명해 주겠다고 했다.
“사실 갠지스강은 꽤 길게 이어져있어요. 근데 우리 인도인들이 특히 이곳, 바라나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곳이 힌두교 시바신의 삼지창 위에 세워진 도시라고 믿기 때문이에요. 시바신은 힌두교에서 파괴와 재생을 담당하는데 힌두교인들은 이곳에서 죽으면 시바신이 해탈을 돕는다고 믿어요.“
나는 그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다가 그러면 인도에 있는 모든 힌두교인들이 갠지스강에서 죽는 건지 궁금해서 그에게 물었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인도의 모든 힌두교인들은 갠지스강에서 죽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돈이 없는 힌두교인들은 버스비도 없어서 이곳까지 올 수 없어요. 몇몇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자신의 고향에서 이곳 바라나시까지 도보이동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 힌두교인들은 바라나시로 죽으러 가는 노인들에게 밥과 숙식을 제공하며 그들이 무사히 이곳에서 죽을 수 있게 응원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이곳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죽고 죽은 뒤 하루 안에 화장을 해야 하는 힌두교리에 따라 그곳에서 화장됩니다.”
죽으러 가는 길에 숙식을 제공받으며 응원받는 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하며 생각에 잠겨 있던 나에게 그가 이어 말했다.
“그래도 형편이 조금 나은 노인들은 괜찮아요. 자식들은 임종을 앞둔 노인들을 바라나시로 데려와요. 이곳에는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이 있거든요. 그곳에서 노인들은 곡기를 끊고 죽음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저기 불타는 곳에서 저들처럼 화장되어 갠지스강에 뿌려집니다. 시바신이 해탈을 도울 수 있는 거죠“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정말 무엇인가가 활활 타고 있었다. 갠지스강에서 화장되는 시체를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불길 속을 유심히 보니 밖으로 살짝 삐져나온 검은 물체가 보였다. 그게 다 타버린 장작인 건지 아니, 어쩌면 망자의 발목 부근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살짝 께름칙했다.
그는 이후에도 나에게 힌두교 지식에 대해 설명해 줬다. 이를테면 죽은 아이와 임산부는 화장을 시키지 않는데, 그들은 순수한 존재이기에 불로 나쁜 카르마를 태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이와 임산부는 갠지스강에 수장되는데 나는 그 말이 더 차갑게 들려왔다. 물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시체라니, 아이들도 차라리 빨리 화장되길 원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그는 또 갠지스강에 가끔 다 타다만 시체들이 떠다닌다고 했는데 가난한 망자들은 땔감이 충분치 않아서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화장터에서 바짝 타버린 아빠의 몸이 떠올랐다. 아빠는 그래도 떠다니는 저 망자보다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을까.
Raj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하고는 숙소로 돌아갔다.
“힌두교인들은 윤회를 믿어요. 전생의 나쁜 카르마의 굴레를 끊지 못해서 현생을 살고 있다고 여기는 거죠. 그러니깐 현생이 고통스러운 건 당연한 거고 이번 생에 갠지스강에서 화장되고 해탈하게 된다면 다음 생에는 다시 태어날 필요가 없이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겁니다.”
결국 사는 게 고통이라는, 그래서 다음 생에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서 이 들이 갠지스강에 이렇게 집착하는 거였다니. 나는 그와 작별인사를 한 후 화장터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인도인들은 화장터로 가까이 온 외국인을 몰아내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신성한
의식이었고 신성한 의식에 참여할 준비가 된 모든 사람은 그곳에 있을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그곳에 2시간이나 앉아서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것을 떠올렸다.
화장하기 전 시체를 갠지스 강물에 담그는 모습, 그리고는 그 위에 버터를 올리는 모습, 망자들을 옮기는 살아있는 사람들, 삶과 죽음의 경계, 장작이 적어서 겨우 타는 망자, 장작이 많아서 활활 타는 망자, 아직까지 어깨를 들고 있는 고행자, 내 오른쪽 어깨, 머리를 바짝 깎은 상주, 상주로부터 수고비를 받는 일꾼들, 해가 점점 가라앉고 어둠이 다가오는 해 질 녘, 내 곁을 떠나간 사람들, 아빠 그리고 고개를 돌렸던 어린 시절의 나.
동시에 싯다르타가 부처가 된 후, 설파했다던 가르침의 내용 중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불교용어로 ‘Sati’, 단지 멍하니 지켜보는 게 아니라 지금 일어나는 것을 분명히 알아서 과거나 미래의 망상에 끌려가지 않는 현재에 깨어 있는 상태였다.
화장터를 떠나기 전 또렷한 내 의식을 마주하니 이런 게 부처가 말한 알아차림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리고는 화장터를 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왜인지 동생에게 연락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인도에서 시체가 타고 있는 걸 보다가 네가 생각나서 연락했어’라고 보내면 조금 오싹 할 테니 그냥 전 여자 친구에게 오랜만 연락 하듯이.
“뭐 하는데”
“왜. 지금은 어딘데”
항상 숏컷만 고집하는 여동생이 이모티콘 따위는 쓰지 않고 답장해 줬는데 그래도 어딘지 물어봐줘서 고마웠다.
“곧 한국 갈 거니깐 밥 한번 먹자”
“그래”
이미 떠나간 사람은 놓아주고, 살아있는 사람한테 더 잘해라. 할 수 없는 것은 놓아주고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라. 부처가 내 옆에 있다면 분명 그렇게 말했으리라. 한국에 돌아가면 동생에게 소고기를 사주리라 생각하며 나는 그렇게 숙소로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