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옷장을 뒤적이며 나는 축하보다는 원망의 말을 되뇌었다. 안 그래도 요즘 부쩍 살이 올라 밖에 나가기 싫은데 고등학교 동창들 다 모이는 곳에 이런 얇디얇은 원피스 한 벌 달랑 입고 나가야만 하는 나의 처지란. 가히 절망스럽다. 가지 말까. 바닥에 퍼질러 앉았다가는 이제 몇 안 남은 친구마저 잃으면 내 결혼식에 와 줄 친구 하나 없겠다 싶어 다시 일어난다. 이럴 때면 엄마는 “너 신경 쓰는 사람 아무도 없다”라고 말씀하시지만 이 뱃살이며 튼실한 다리를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비웃을 것 같은 착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결국 하지 않던 화장을 짙게 하고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며 친구의 결혼식장에 갔다. 이번에 결혼하는 친구는 고등 학생 때는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 못하다가 우연히 졸업 후에 인연이 닿아 친해진 경우이다. 그렇기에 결혼식장에서 만나게 될 동창들은 나와는 조금 서먹서먹한 사이였다. 그래서 얼른 얼굴만 비치고 사진 찍고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특히 마주치기 싫은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나에게 무슨 해코지를 한 것도 아닌데도 그냥 싫은 애였다. 고등학교 3학년, 반에서 나와 성적으로 1, 2위를 다투던 아이였는데 얼굴이 예뻐 괜히 나만 비교당하게 했던 아이였다. 따지고 보면 그 아이 잘못도 내 잘못도 아닌데 한 명은 상처 입고 그로 인해 한 명은 이유 모를 미움을 받는, 그런 관계였다. 아무튼 그 친구만은 제발 마주치지 말길 기도하며 결혼식장에 갔는데 신부 대기실 앞에서 제일 먼저 떡하니 마주쳤다. 맙소사.
그런데 그 아이는 그간 나의 시기, 질투를 무색하게 할 만큼 나를 보며 환하게 반겨주었다. 나는 그 아이를 보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얘, 살 엄청 쪘잖아! 만세!
그날 저녁 나는 내가 친하게 지냈던 다른 고등학교 친구들과 만나 그 예뻤던 친구에 대해 얘기하며 “걔도 나이 먹으니까 별 것 없더라.”라고 운을 뗐다. 한참을 고등학생 시절 얘기를 하며 웃고 떠들다가 문득 그 예뻤던 아이가 내게 참 다정하게 대해줬던 생각이 났다.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나는 ‘여. 적. 여’라는 말을 정말 싫어한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이 말은 남성과의 동등한 경쟁에서 배재된 여성들이 소외의 원인을 남성이 아닌 여성 스스로에게 겨누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감히’ 남성을 경쟁상대로 볼 수 없게끔 만들고 동시에 여성끼리 서로를 적대시하며, 그것이 여성이라는 종의 특성인 것처럼 여기게끔 하는 의도가 뻔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마치 최저 시급을 얼마로 정하든 자신들과는 조금도 상관이 없을 사람들이 마음대로 정해놓은 기준 때문에 생존을 놓고 피 터지게 싸우는 ‘을’들 간의 전쟁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게 그 비슷한 것이 아닌가.
문득 대학 시절의 일이 떠올랐다. 여중, 여고를 나온 나는 대학 생활에 대한 그 또래 아이들만큼의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대학에 들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은 학과 동기 남학생들이 여자 동기들의 외모 순위를 매겨 서로 품평(?)을 하고 성적인 말을 내뱉고 있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나는 처음 생긴 남자 사람 친구들과 내 나름대로 친하게 지내고 있다고 믿었는데 나에 대한 그 아이들의 평가를 듣고 크게 상처 받았다. 그 이후 나는 철저한 아싸(아웃사이더)의 길을 걸으며 그 아이들을 피해 학교를 다녔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우리나라 최고의 대기업이라고 손꼽히는 회사에 다니던 능력 있는 여자 동기 하나가 학교 때의 그 외모 평가에 대해 여전히 상처 받고 있음을 토로했다. 나는 뭘 그런 걸 아직도 신경 쓰고 있냐며 그녀를 다독였지만 나 역시 십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일을 마음에 품고 오히려 그 남자아이들이 보던 똑같은 방식으로 여성을, 또 세상을 보고 있었다.
작년, 미투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은 여성들이 더 이상 음지에 숨지 않고 어떻게 이 잘못된 행태를 고쳐 나가는지를 지켜보며 그때의 나는 왜 나의 잘못이 아닌 일로 인해 그토록 상처 받고 피해 다녔나 생각했다. 지금의 내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 역시 남자 동기들의 잘못을 고발하고 그 아이들이 그로 인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했을 것이다. 수치심에 내가 그들을 피해 다니는 대신에, 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던 다른 여성 동기들을 질투하는 대신에 말이다.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난 내가 여기서 조금만 더 잘되길 바랐던 거지 걔가 되길 원한 건 아니었어요. 난 내가 여전히 애틋하고 잘되길 바라요. 여전히.”,
좋아했던 드라마 대사가 떠오른다. 나 역시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과 같은 마음이었다. 나는 내가 조금 더 행복하길 바랐을 뿐이지 그 아이가 되고 싶다거나 그 아이가 불행해지길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내가 조금 더 잘 되길 바랄 뿐이다.
예뻤던, 그래서 괜히 내가 미워해야만 했던 그 아이의 SNS에 들어가 보았다. 잘 살고 있었다. 예전만큼 예쁘지 않아도 예전만큼 잘 살고 있었다. 웃는 모습이 예전과 같았는데 나한테 참 잘 웃어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만큼 예쁘지 않단 이유로 그 아이를 미워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나 스스로를 원망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그래야만 하는 분위기였다.
그 아이에게 문자를 쓴다.
‘잘 지냈니? 잘 지내는 것 같아 진심으로 기쁘다. 나는 잘 못 지냈어. 그런데 이제 잘 지내려고. 너도 항상 잘 지내길 진심으로 바랄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