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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만 Nov 11. 2019

따뜻한 말 한마디

어머니,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가영이는 정말 크게 될 아이예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선생님의 예상만큼 그다지 대단한 사람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말은 나와 우리 엄마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적어도 나는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거나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그런 어른으로는 성장하지 않았고 엄마는 그 이후로 촌지 보내는 것을 끊으셨다.


그때 나는 열 살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선생님께서 가영이는 큰 인물이 될 거래요.”라고 아빠에게 얘기하시던 엄마의 들뜬 목소리였다. 잠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좋아하는 게 느껴졌고 나 역시 기뻤다. 시골 학교에서 도시의 큰 학교로 막 전학을 왔던 터여서 더 그랬던 것 같지만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믿어준다는 것이 그 어린 나이에도 힘이 됐었나 보다.


하지만 엄마가 기억하는 그때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엄마는 그 시대 학부모들이 으레 그렇듯 선생님을 만나 뵐 때면 촌지부터 먼저 챙기셨다. 특히나 도시에 있는 학교로 딸을 전학시키고 처음으로 갖는 학부모 면담시간이었으니 더욱 신경이 쓰이셨을 것이다. 그랬기에 관례인 양 내민 촌지 봉투를 돌려보내시며 하신 그 선생님의 말씀은 엄마에게는 위로였다.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당신의 딸은 잘하고 있고 잘해 나갈 것입니다. 자식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에 너무도 따뜻한 말 한마디였다. 


어린 시절, 엄마가 촌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성인이 되고서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소위 김영란 법이라고 불리는 부정청탁 금지법이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구던 그때, TV 뉴스를 보며 농담 삼아 엄마에게 물었던 탓이었다. “엄마는 저런 거 보낸 적 없지?”라는 답이 뻔한 질문에 “왜 안 보내? 보냈지.”라는 예상 밖의 답이 나와 깜짝 놀랐었다. 내 부모는 다를 거야 라는 자녀로서의 순진한 믿음과 평소 보아온 엄마, 아빠의 성정을 생각해볼 때 너무도 의외였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부모에 대한 환상이 깨짐과 동시에 그동안 내가 편하게 학교생활을 하면서 선생님께 사랑을 받는 학생이었던 것이 모두 부모님의 돈 때문이었던가 하는 실망감이 일어났다. 그런 내게 엄마가 해준 이야기가 있다.  


엄마의 촌지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생일이 빨라 한 해 일찍 학교에 들어간 오빠는 안 그래도 몸집이 작고 마음이 여려 늘 엄마의 걱정거리였다. 그런 오빠가 입학한 지 몇 달 만에 교통사고가 나 한 달가량을 학교에 가지 못했다. 겨우 퇴원을 해 집에 돌아와 요양을 하는데 어느 날 오빠의 담임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오셨다. 그게 고마워 엄마는 차를 대접하며 머리를 몇 번이나 숙이셨는데 이 선생님이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후에 학교에 돌아간 오빠가 선생님한테 자꾸 혼나고 남들 다 받는 ‘참 잘했어요!’ 스티커도 받지 못해 서운해 하자 엄마는 동네 아줌마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러자 같은 학교 학부형이었던 그들은 선생님이 그날 촌지를 받으러 온 건데 안 주어서 그러는 거라고 알려주셨다. 그 말을 듣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엄마는 선생님께 촌지를 드리러 학교에 찾아가셨다. 얼마 후, 학교 뒤 게시판에 포도 모양으로 된 칭찬 스티커를 가득 붙이고 좋아하던 오빠 모습을 보고 그때부터 엄마는 계속해서 촌지를 보내셨다고 한다. 아빠가 그걸 알고 몇 번이나 엄마에게 그러지 말라고 하셨지만 엄마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셨다. 여태껏 한 번도 돈을 받지 않는 선생님이 없었고 그게 오빠의 학교생활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을 했기에 그 행동이 내게도 계속되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전학을 간 첫 해 나의 담임선생님께서 처음으로 그 돈을 거부하시며 내가 뛰어난 아이라고 칭찬까지 해주셨으니 엄마는 자신의 자녀에 대한 믿음이 다시금 생겨났다고 하셨다. 그런 편법을 쓰지 않고서도 내 자식이 잘해나가리라는 그런 믿음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촌지였다고 한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초등학교 삼 학년, 그때가 떠오른다. 한 학년에 한 학급밖에 없던 학교에서 십 학급이 넘던 학교로 전학 갔을 때의 그 놀라움. 게다가 강당이며 급식소가 다른 건물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친한 친구가 있을 리 없었고 첫사랑까지 불쑥 찾아왔다. 그 당시 나는 열 명의 여학생들이 모여서 좋아하는 아이를 고백하면 아홉 명은 같은 이름을 대던, 그 학년 최고의 킹카를 좋아하게 되었다. 시골 촌뜨기가 그런 아이의 눈에 들어올 리 없었으니 그 어린 나이에도 좌절감과 외로움을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 선생님의 차별 없는 사랑 덕분이었을 것이다. 아마 선생님이 말씀하신 ‘이 아이’는 특별하고 큰 사람이 될 거란 말은 선생님에겐 크게 의미가 없었을지 모른다. 모든 아이에게 똑같이 말했을지도 모르고 그게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비몽사몽간에 들었던 그 선생님의 말씀에 늘 나의 가능성을 믿고 나를 좀 더 아껴줬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사랑과 인정의 말이 나이가 든 이때에도 힘이 되어 준다.


진실한 애정을 받아 본 적 있는 아이는 절대 나쁜 길로 들 수 없다


는 말이 있다. 간혹 범죄자들의 인터뷰를 보면 한결같이 불운한 어린 시절을 이야기한다. 가족에게서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학교에서 차별받는 아이는 기댈 곳이 없다. 누구 하나 어린 시절의 그들에게 조그만 애정이나 관심을 보여줬더라면 그들의 인생뿐 아니라 그들로 인해 피해받은 수많은 이들의 인생 또한 바뀌었을지 모른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키가 크고 날씬했던 그 선생님.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이십 년 전의 만남이었지만 그 선생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나와 내 엄마의 삶에 큰 힘이 되었다. 누군가의 스승이 되지 못할지라도 나 역시 한 사람의 인생에 그런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 밤 같이 괜스레 누군가의 응원이 필요한 날이면 그 선생님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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