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번성했다던 마산의 오래된 고속버스터미널 옆 낡은 햄버거 가게. 그곳에서 전단지 속 사진과는 사뭇 다른 초라한 햄버거 하나를 물고 있다. 갈변한 이파리 몇 조각이 전부인 양배추는 소스에 젖어 흐물거리고 엄마가 해주던 김치전보다 못한 고기 패티는 검은 그을음으로 덮여 있다. 창가마다 테이블엔 사람들이 흘리고 간 물컹한 양파 조각 따위가 치워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고, 걸음을 옮기자니 신발은 바닥에 쩍쩍 달라붙는다.
모두 혼자다. 나처럼 점심시간에 눈치 보지 않고 혼자 밥 먹을 수 있는 장소를 찾다 다들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나 보다.
사람은 많지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만이 매장 안 정적을 채운다. 말할 상대가 없으니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입 안 가득 햄버거를 넣고 우걱우걱 씹어대는 한 사내를 보니 괜스레 슬퍼진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저렇게 보일까. 저처럼 외롭고 저만치 안쓰러워 보일까.
난 이제 결혼도 했고 생활도 제법 안정됐는데 왜 내 마음은 또다시 혼자 타향살이하며 고생하던 옛 시절을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가끔 무언가 사무치게 그립고 또 괴롭다.
며칠 전, 남편과 편의점에 갔을 때 한 남루한 행색의 아저씨가 십 원, 오십 원짜리 동전을 계산대에 쏟아냈다. 주머니 한가득 꺼낸 그 돈으로 천오백 원을 겨우 맞춰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서 갔다. 동전을 세던 아저씨의 뒷모습, 그걸 귀찮게 바라보던 편의점 직원, 남편이 벌어 온 돈으로 이제는 아무 걱정 없이 간식을 고르는 나. “저 나이에 저 정도밖에 못 사는 건, 인과응보야.”라고 말하던 남편의 무심함. 그 모든 게 서럽다.
박완서 작가는 자신이 느낀 첫 비애의 기억을 이렇게 표현했다.
저녁노을이 유난히 새빨갰다. 하늘이 낭자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을의 풍경도 어둡지도 밝지도 않고 그냥 딴 동네 같았다. (…)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내 갑작스러운 울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 또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건 순수한 비애였다.
중학생 시절, 학원을 오가는 버스 뒷자리에 앉아 고개를 파묻고 카세트 플레이어를 듣다 툭하고 테이프가 돌아갈 때의 정적. 밤 열두 시가 넘어 독서실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 흔들리는 차창에 머리를 부딪치며 듣던 라디오 속 정지영 아나운서의 목소리. 그 모든 게 비애의 순간 아니었을까.
만날 용기도, 만나지 않을 용기도 없이 좋아하던 아이가 살던 집 아파트 옥상에서 그저 한 층 한 층 걸어 내려오기만 하던 시절. 그 아이의 집 앞을 지날 때면 초인종 한 번 눌러볼 여지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내려만 가던 계단. 그 계단 창문 밖으로 보이던 석양은 어찌나 아름다워 슬프던지. 내 마음은 늘 그 아이가 있던 팔 층 계단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의 나는 어땠나. 기말고사를 앞두고 다음 날 치를 시험이 두려워 죽기로 결심한 어느 날 저녁. 방부제를 먹으면 죽는다고 믿었던 열댓의 나는 봉지 김을 사고는 그 속에 있던 방부제를 꺼냈다. 입에 털어 넣을 자신이 없어 좋아하는 콘 아이스크림을 사 그 위에 방부제를 토핑처럼 뿌려 먹던 기억. 이것이 내 마지막 만찬이구나 생각하며 참 많이도 울었다. 끝이다. 정말 여기까지구나. 이제 잠들면 다시는 깨지 못하겠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나는 내 마지막을 맞이하기 위해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벽에 아무렇지 않게 눈을 떴다. 아픈 구석도 없고 당장 몇 시간 후면 학교 시험이라 그 새벽 열심히 공부를 했다. 시험 결과는 좋았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렇게 시험을 치르고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고 어른이 되었다.
그때가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다. 중학교 때 시험 한 번은 이십 대의 그 긴 방황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고, 이십 대의 그 수많던 걱정은 삼십 대가 되니 괜한 것이었다. 끝내 못 잊을 것 같던 첫사랑도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베일 것 같은 아픔도, 막연한 절망도 내일이면 괜찮아질 것이다. 내일이 아니라면 그 다음 날, 그 다음 날이 아니라면 또 그 다음 날. 결국 언젠가 즐거운 한 날이 올 것이다. 그럼 그 즐거운 하루로 내일을 버티면 된다.
인생의 첫 비애를 겪던 중학생 시절, 세상 모든 슬픔이 내 것 같았던 스무 살 무렵. 그 시절과 달라진 게 있다면 분명 이것일 것이다. 나는 오늘도 가끔 슬프고 가끔 외롭지만 내일은 괜찮아질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으로 하루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