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0.80.00, 007 카지노 로얄
“다시 찍느니 이 유리컵을 깨뜨려서 손목을 긋겠다”
2006년에 출시돼 2013년에 단종된 오메가 씨마스터 다이버 300M 2220.80.00 모델이다. 씨마스터 다이버 300M은 오메가의 엔트리급 주력 라인으로, 다이얼의 물결무늬를 넣거나 뺀다거나, 크기를 키우거나 줄인다거나, 다이얼의 글자 위치나 색깔을 바꾼다거나, 베젤의 소재를 바꾸는 식으로 주기적으로 세부 디자인에 조금씩 변화를 주면서 모델을 갱신하지만 특유의 디자인 요소는 계속 유지하고 있어서 어떤 세대의 모델을 보든 오메가 씨마스터 다이버 300M 라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이 라인의 큰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https://www.omegawatches.co.kr/watch-omega-seamaster-diver-300m-co-axial-chronometer-41-mm-22208000
모델명: 2220.80.0
다이얼 크기: 41mm
러그 크기: 20mm
길이(러그 투 러그): 47mm
두께: 12.5mm
방수: 30 bar
파워리저브: 48시간(코엑시얼 2500 무브먼트)
무게: 171 g
기능: 크로노미터 인증, 날짜 창, 헬륨 가스 배출 밸브, 스크루인크라운. 역회전 방지 베젤
케이스 백: 스틸 케이스 백(무브먼트 볼 수 없음)
이 모델은 다이얼에 물결무늬가 있는데 빛이 강하거나 얼핏 볼 때에는 종종 무늬가 없는 것처럼 보여서 색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직접 차보기 전에는 5연 브레슬릿의 디자인이 참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차보니 생각보다는 괜찮다. 착용감이 좋아서 그런가. 아무튼 그래도 여전히 3연 브레슬릿을 더 선호하긴 한다.
야광 성능도 봐줄 만하다.
2022년 10월에 종로 세운스퀘어에 위치한 중고 매장에서 구입했다. 온라인 사이트도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매물은 온라인에서 확인하고 구입은 매장에 가서 했다.
중고나라에서 검색해 보면 시계 상태와 구성품 유무에 따라서 대략 200만 원에서 250만 원 사이로 시세가 형성돼 있다. 급매로 던지는 경우 180~190만 원대에 나오기도 한다. 당시 개인 매물을 찾을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중고 매장에서 구매했기에 개인 거래 평균 시세보다 몇 십만 원을 더 주고 구매했다(금액이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 조금 더 여유를 갖고 기다렸다면 몇 십만 원을 절약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 이 시계에 제대로 꽂혀 있던 터라 더 기다릴 수가 없어서 참지 못하고 중고 매장으로 향했다.
구매 동기는 007 카지노 로얄과 다니엘 크레이그다.
007 카지노 로얄은 2006년 12월에 개봉한 007 시리즈의 21번째 영화로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를 맡은 첫 번째 007 영화다.
다니엘 크레이그 전의 제임스 본드는 피어스 브로스넌이었다. 17번째부터 20번째까지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고, 동료 배우나 국내 언론으로부터 최고의 제임스 본드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https://www.imaeil.com/page/view/2006022108360821339
https://www.g-enews.com/article/Distribution/2020/10/2020101200034522089ecba8d8b8_1
너무 오래돼 피어스 브로스넌이 출연한 007 영화의 내용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쫓아오는 적들을 제압하며 위기에서 벗어난 뒤 숨을 한 번 몰아 쉬며 별일 아니었다는 표정으로 넥타이를 한 번 고쳐 잡고 보트를 운전하는 장면이었는데 젠틀한 콘셉트의 스파이가 뿜어내는 여유와 위트와 우아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를 보기 전까지 나에게 제임스 본드는 이런 이미지였다. 수트를 단정하게 차려입고 최신식 무기를 휴대한 채 누가 “미스터..?”라고 이름을 물어보면 “본드, 제임스 본드”라고 대답한 뒤 젓지 않고 흔들어 만든 보드카 마티니를 마시는 사람.
반면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피어스 브로스넌의 본드와는 상당히 느낌이 달랐다. 우아함을 날려버리고 그 자리에 투박한 근육을 박아 넣은 느낌이랄까.
https://www.imdb.com/title/tt0381061/mediaviewer/rm439256064/?ref_=tt_md_6
팬층이 두터운 시리즈답게 당시 새로운 제임스 본드가 다니엘 크레이그라는 발표가 나오자 사람들의 불만이 쏟아졌다고 한다. 거칠고 우락부락한 이미지에, 금발에 푸른 눈이고, 키가 178cm 밖에 안 되는(그보다 작은 사람은 울면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는 제임스 본드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참고로 이전 제임스 본드 역의 배우들은 전부 키가 185cm 이상이었다고 한다. 위너들의 세상이었구나). 사람들은 영국 스파이가 아니라 소련 KGB 요원 같다고 혹평하면서 심지어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 역할을 맡는 것을 반대하기 위한 사이트까지 만들기도 했다. 도메인 이름들이 아주 기가 막힌다.
http://danielcraigisnotbond.com/index/
https://www.craignotbond.com/about-me/
영화의 액션 씬 역시 당시 트렌드에 맞춰 거칠고 투박하면서 보다 현실적인 액션 씬으로 바뀌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왜 제임스 본드가 제이슨 본을 따라가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참고로 개봉 전 시사회를 보고 난 우리나라 평론가들의 평도 별로 좋지 않았으며, 기자들도 흥행을 크게 기대하는 것 같지 않았다.
http://m.cine21.com/movie/minfo/?movie_id=9803
http://m.cine21.com/news/view/?mag_id=42299
이와 같이 부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개봉한 다니엘 크레이그의 첫 번째 007 영화 카지노 로얄은 이 모든 우려를 박살내고 전 세계적으로 크게 흥행하며 성공했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43176
우려와는 달리 관객들은 새로운 느낌의 제임스 본드의 탄생에 환호했다. 제임스 본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던 다니엘 크레이그는 이 영화에서 피어스 브로스넌을 잇는 제임스 본드도 아니고 제이슨 본 맛 제임스 본드도 아닌 자신만의 제임스 본드를 창조해 냈다. 다소 마초스러워진 제임스 본드는 분명 이전보다 거칠고 투박해지면서 우아함을 잃었지만 이전과는 결이 다른 새로운 멋을 뿜어냈다. 젓지 않고 흔들어 만드는 보드카 마티니 대신 진과 보드카와 키나 릴레이를 얼음과 함께 흔든 뒤 얇은 레몬 한 조각을 올린 ‘베스퍼’ 마티니를 새로 고안해 주문하는 제임스 본드는 적어도 나에게는 ‘한 번 보면 그것만 찾게 되는’ 제임스 본드가 되었다.
카지노 로얄은 이후 역대 최고의 007 영화를 꼽는 설문조사에서 당당히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09/2017090900649.html
영화가 개봉한 지 무려 16년이 지나서야 이 영화를 보고 뒷얘기까지 알게 된 나는 영화를 몇 번이나 다시 보면서 이왕 시계를 찬다면 영화 속 제임스 본드가 찬 시계를 차고 싶어졌다. 많은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을 정면으로 돌파해 성공을 이뤄낸 스토리가 담겨 있는 시계가 차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 모델을 구입했다.
참고로 007 카지노 로얄의 제임스 본드는 두 종류의 오메가 시계를 차고 나온다. 영화 초반부에서는 오메가에서 다니엘 크레이그의 새로운 제임스 본드의 등장에 맞춰 출시했다는, 다이얼 크기가 45.5mm에 달하는 대형 시계인 플래닛 오션 600M XL 러버 스트랩 모델을 차고 나온다. 해외에서는 'XL 사이즈' 대신 '크레이그 사이즈'라고 부르기도 한다는데 근육질의 터프한 이미지에 잘 어울리는 시계다.
이후 에바 그린이 연기한 베스퍼 린드가 등장하는 기차 씬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는 내가 구입한 씨마스터 다이버 300M을 차고 나온다.
https://www.omegawatches.com/planet-omega/cinema/james-bond
참고로 에바 그린이 처음 등장하는 기차 안 장면에서는 아직까지도 시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종종 회자되는 유명한 시계 PPL 대사가 나온다.
Vesper: ... Since MI6 looks for maladjusted young men, who give little thought to sacrificing others in order to protect Queen and country. You know... former SAS types with easy smiles and expensive watches. Rolex?
Bond: Omega.
Vesper: Beautiful.
아래 영상의 3분 13초 즈음을 보면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xuyoqS31Yug
중고 매장에서 구입한 지 이제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인데 최근 갑자기 파워리저브 성능이 줄어들면서 태엽을 다 감아도 하루를 채 못 버티기 시작했다. 덩달아 일오차도 늘어나서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 충정로에 위치한 스와치 서비스 센터를 방문해서 점검을 맡겼고, 오버홀이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다른 이상 없이 오버홀만 진행한다는 가정 하에 비용은 88만 원이라는 안내도 받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오메가 논 크로노그래프 오버홀 비용이 60만 원 근처였던 것 같은데 무려 50% 가까이 올랐다. 구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오버홀을 맡겨야 하는 시계를 판 중고 매장도 원망스럽고, 오버홀 비용을 미친 듯이 올려버린 스와치 그룹도 원망스러웠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맡기고 나왔다.
오버홀을 보내고 나니 제임스 본드의 시계를 하나를 더 들이고 싶어졌다. 아직 고민 중이긴 한데 카지노 로얄에 나온 플래닛 오션 45.5mm 모델과 스카이 폴에 나온 플래닛오션 검판 42mm, 아쿠아테라 청판 38.5mm 모델을 지켜보는 중이다.
지켜보다 보니 플래닛 오션 모델 두 개는 종종 매물이 올라오는 편인데 아쿠아테라는 잘 안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번 오버홀 경험을 떠올려 보면 인내심을 갖고 어떻게든 개인 매물을 구하는 쪽이 나을 것 같지만.
다니엘 크레이그가 출연하는 007 영화에 나오는 모든 오메가 제품을 확인하고 싶다면 아래 오메가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페이지를 확인하면 된다.
https://www.omegawatches.com/planet-omega/cinema/james-bond
참고로 영화는 카지노 로얄과 스카이폴이 제일 재밌었다. 검색해 보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느낀 것 같다. 평이 좀 갈리는 퀀텀 오브 솔러스와 스펙터도 나는 그럭저럭 볼 만했는데,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007 영화인 노타임투다이는 아쉽게도 나에게는 너무 별로였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영화 초반부에 나온 휴양지가 정말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는 정도? (나중에 찾아보니 이탈리아의 소도시 '마테라'라고 한다.)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답게 좀 제대로 만들어줬으면 좋았겠건만 너무 실망스러워서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글을 마치려고 다시 앞 내용을 훑어보니 너무 다니엘 크레이그에 대해 좋은 얘기만 한 것 같은데 실은 안 좋은 얘기도 종종 들려왔다. 예를 들어 스펙터를 촬영하고 난 후 인터뷰에서는 촬영 과정이 많이 힘들었는지 “다시 007 시리즈를 찍느니 이 유리컵을 깨뜨려서 손목을 긋겠다”라고 과격하게 표현해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고, 자료를 찾지는 못했지만 오메가 홍보 대사인데 공식 석상에서 다른 브랜드, 특히 평소 그가 좋아한다는 롤렉스의 시계를 너무 자주 차고 나타나서 홍보 대사로서 책임감이 없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뭐 사람이 좋은 면만 있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런 그의 충동적인 모습이 영화 속 이미지와 오히려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2/15/2016021503192.html
아무쪼록 내 시계가 얼른 깨끗하게 잘 정비돼 돌아오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