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WTLMM5BS001WHWH0
오랜만에 시계를 샀다. 로만손 카이로스 빈티지 돔 37 화이트 가죽 시계. 상품 번호 RWTLMM5BS001WHWH0. 이름과 번호가 좀 길다.
https://www.jestina.co.kr/products/view/G2000027531?cateCd=239
공식 가격은 179,000원인데 이런저런 할인 혜택을 잘 찾으면 12만원 대에 구매할 수 있다.
로만손에서 주문했지만 제이에스티나 박스에 담겨 온다. 나무 위키 자료에 따르면 이 회사는 로만손이라는 이름으로 시계 사업을 먼저 시작했지만 이후 론칭한 주얼리 및 가방 브랜드 제이에스티나가 더 크게 흥하면서 회사 이름을 제이에스티나로 바꿨다고 한다.
시계는 공기 완충 포장재로 안전하게 잘 포장돼 왔다.
택배 상자 안에는 쇼빙백과 시계 상자가 들어있다.
시계 박스 품질은 괜찮은 편이다. 쇼핑백과 함께 창고로 들어가 중고로 팔 때까지 그곳에 있게 되겠지만.
시계 밑에 보증서가 들어있다. 잠깐 살펴보고 다시 박스 안에 잘 넣어뒀다.
시계 앞면과 뒷면에는 스크래치 방지용 비닐이 붙어 있다. 새 제품을 구매한 느낌이 난다.
비닐을 벗기면 드디어 원래의 색감이 온전히 드러난다. 깔끔하고 예쁜 시계다. 하얀 다이얼인데 뭔가 조금 탁한 느낌도 나고 가까이서 보면 메탈 느낌도 살짝 들어가 있다.
심플하게 쭉 뻗어 있는 바 인덱스와 같은 색상의 가느다란 나뭇잎 모양 바늘이 잘 어울린다. 전면 유리는 빈티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크릴 소재의 돔 형태로 측면에서 보면 살짝 솟아있다. 반면 그 안에 자리한 다이얼은 가장자리 부분이 안쪽으로 살짝 들어가 있다.
깔끔한 폰트와 적당히 작은 크기로 인쇄된 로만손 로고도 마음에 들고, 시계의 얼굴과 잘 어울리는 매끈하게 폴리싱 처리된 케이스와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모습으로 가늘게 뽑아낸 러그 모양도 마음에 든다.
결정적으로 보자마자 다른 시계가 떠오르는 카피 디자인이 아니란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무언가 닮은 듯 닮지 않았다. 바우하우스 디자인을 내세우는 융한스 막스빌이 살짝 떠오르긴 하는데 12시, 3시, 6시, 9시 인덱스 디자인에 차이를 둔 덕분에 융한스 막스빌의 카피 디자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융한스 막스빌에는 있는 야광점이 없는 것도 한 몫하는 것 같다(덕분에 어두운 곳에서는 상당히 불편하다). 이 시계가 조금 더 드레시한 느낌.
https://www.junghans.de/en/collection/watches/junghans-max-bill/max-bill-handaufzug/27370002?c=26
버클은 일반적인 시계 버클 형태에 로만손 로고를 음각으로 새겨 놓았다.
디자인만큼이나 마음에 드는 점은 크기다. 로만손에서 제공하는 이 시계의 공식 사양은 다음과 같다.
공식 사양 표에서 제공하지 않는 그 외 사양은 다음과 같다.
러그 투 러그: 42mm
두께: 8mm
스트랩 길이: 7.5cm, 12.5cm
시계를 좀 차다 보면 케이스 크기만큼이나 착용감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게 보통 러그 투 러그(lug to lug)라고 부르는 한쪽 러그 끝에서 다른 쪽 러그 끝까지의 길이와 케이스의 두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케이스가 크기가 작아도 러그 투 러그가 길거나 두께가 두꺼우면 착용감이 떨어질 수 있다(그래서 요즘 많은 시계 브랜드에서는 러그 투 러그와 두께도 표시해 놓는다).
대표적으로 노모스의 시계들이 케이스는 작은데 러그 투 러그가 긴 시계들이 많다. 아래 노모스 클럽 캠퍼스 709 모델은 다이얼 크기는 36mm이지만 러그 투 러그는 47.5mm에 달한다. 딱 봐도 러그가 길게 뻗어나간 게 느껴진다.
https://nomos-glashuette.com/en/watchfinder-377?o=9&f=146%7C15#/en/club/club-campus-709
케이스는 작은데 두꺼운 시계로는 오메가 PO 37.5mm 정도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직접 차보지는 않았지만 두께가 15mm 정도로 두꺼운 편이어서 조약돌을 손목에 올려놓은 느낌이라는 평을 들었다.
이 시계의 러그 투 러그는 42mm, 두께는 8mm로 케이스 크기에 맞게 적당히 짧고 얇게 잘 나왔다.
스트랩 품질도 좋다. 색, 질감 모두 괜찮았는데 내 손목 크기(16.7~17)에는 스트랩 구멍 위치가 조금 아쉬웠다. 세 번째 구멍에 체결하면 살짝 헐거운 느낌이고 두 번째 구멍에 체결하면 손목을 너무 조여 온다.
전체적으로 아주 만족한다. 드레스 콘셉트의 쿼츠 시계답게 작고, 얇고, 가벼워서 차고 있어도 손목에 이물감이 별로 없다. 셔츠나 니트, 손목에 시보리가 달린 맨투맨 같은 것을 입었을 때 옷소매에 걸리는 일도 거의 없다.
한동안 자전거와 러닝에 취미를 붙여 운동 기록을 남기겠다고 가민 인스팅트 2 솔라만 차고 다녔다.
https://www.garmin.co.kr/products/wearables/instinct-2-solar-tactical-tan/
그런데 가민은 다이얼 크기가 45mm에 러그 투 러그는 50mm, 두께는 15mm에 달하다 보니 한 번씩 작고 얇은 시계가 아쉬울 때가 있었다. 특히 겨울이 되니 크고 두꺼운 시계가 자꾸 옷소매에 걸리거나 옷 안에서 손목을 압박해 불편했다.
그래서 작고 얇은 시계를 찾았는데 기계식 시계를 사려니 이리저리 걸리는 게 많았다. 조금 괜찮은 애들은 최소한 몇십만원은 줘야 했고, 그렇다고 중고로 사자니 시세 알아보고 매물 알아보고 약속 잡고 거래한 뒤에 시계가 괜찮은지 확인하는 과정이 번거롭게 느껴졌다. 또한 충격이나 자성이 신경 쓰여서 찰 때도 조심스럽게 차야하고, 오차도 신경 쓰이고, 몇 년 지나면 점검도 받아야 하고, 오버홀 받으러 가는 것도 번거롭고, 오버홀 비용도 비싸고, 가민을 주로 찰 테니 방치돼 있는 날이 많을 텐데 그럼 찰 때마다 태엽도 감아줘야 되고. 예전에는 그 자체로 하나의 즐길 거리였던 이와 같은 일들이 이젠 조금 번거롭게 느껴졌다.
그 결과가 이 시계다.
점점 늘어나는 애들 학원비와 아무리 쪼개 써도 부족한 시간 덕분인가. 예전에 푹 빠져 즐기던 낭만과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데 다행히 그게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다.
혹시 더 얇은 시계를 원한다면 R 라인의 이 시계도 있다. 나는 카이로스의 디자인이 더 내 취향이라 이쪽을 선택했다.
https://www.jestina.co.kr/products/view/G2000026720?cateCd=253
참고로, 로만손은 컬렉션 이름 좀 정비하면 어떨까 싶다. 현재 클래식, 액티브, R, 루미에르의 네 가지 컬렉션이 있고 각 컬렉션 안에 다시 카이로스, 악티우스, 오디에, 드아르본 등의 컬렉션이 있는데 클래식이나 액티브는 그렇다 쳐도 카이로스나 악티우스, 오디에 등은 이름만 들어서는 어떤 콘셉트의 시계일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홈페이지에 딱히 설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 나무위키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잘 팔린다는데 그래서 일부러 영어를 안 쓰고 있나? 아무튼 이유가 뭐든 간에 이름을 보고 어떤 콘셉트의 시계일지 감이 좀 왔으면 좋겠다.
https://www.jestina.co.kr/front/U2/romanson_watch_collection
또한 로레게를 포함해 대놓고 디자인 카피하는 것도 이제 좀 줄이고 자체 디자인을 많이 늘리면 좋을 것 같다. 타이멕스나 세이코, 카시오, 시티즌 등을 보라. 단가가 저렴한 시계를 팔면서도 충분히 멋진 자체 디자인을 뽑아낼 수 있다. 근시안적으로 당장 쉽고 편하게 돈 벌겠다고 양심도 없이 남의 디자인 훔쳐와 로만손 로고 박아서 팔아먹는 행태는 이제 좀 지양하면 좋겠다. 아래는 로만손에서 카피한 디자인(위)과 오리지널 시계(아래)를 나열해 본 것이다.
https://www.jestina.co.kr/products/view/G2000027093?cateCd=240
https://www.jestina.co.kr/products/view/G2000027095?cateCd=240
https://www.breitling.com/kr-ko/watches/superocean/superocean-automatic-42-my22/A173751A1O1/
https://www.jestina.co.kr/products/view/G2000026164?cateCd=240
이외에도 파텍 필립의 노틸러스나 오데마 피게의 로열 오크, 제니스의 DEFY를 카피한 시계들도 보이는데 찾기 귀찮아 생략한다. 로만손 사장님. 적당히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