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교훈 없는 상실, 삶은 그런 것의 연속이다.
올 초에 한창 추웠던 어느 날에 선물 받은 책인데 이제야 독서록을 쓴다. 읽기는 세 달 전쯤 진작 읽었는데 앞서 읽은 책의 독서록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는 바람에 읽고 나서 독서록을 시작하는 데 한참 걸려버렸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음악’을 콘셉트로 여러 소설가에게 단편을 써달라고 요청해 모아 만든 소설집이다. 총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그 뒤로 다섯 명의 작가와의 인터뷰가 부록처럼 실려 있다.
음악이라는 콘셉트가 전면에 배치돼 소설 전체에 주요 줄기로 작용하는 소설도 있지만 읽고 나서 ‘이 소설 어디에 음악이 등장했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스쳐 지나가는 작은 소품 정도로만 사용한 작품도 있다. 처음에는 음악이 너무 대놓고 줄줄이 주요 소재나 주제로 다뤄지면 조금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역시 이름난 전업 작가들의 솜씨는 남달랐다.
잘 쓴 소설은 내가 그 주제에 적극적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꼭 한 구절씩은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삶의 방식은 인구수만큼이나 다양하지만, 누군가의 아들이나 딸로 태어나 주위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온갖 감정을 주고받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는 큰 틀에서는 누구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한창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같은 류의 소설을 좋아하던 시절에는 이런 느낌의 소설을 참 좋아했는데 요즘에는 취향이 살짝 바뀌어 스스로 찾아서 읽지는 않고 있었다. 아마 선물로 받지 않았다면 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좋은 연이 닿은 분께 뜻깊은 선물을 받은 덕분에 오랜만에 이런 감성의 책을 읽었고, 덕분에 몸과 마음이 부드럽게 한 번 환기됐다. 소설에 나온 ‘홀스트’의 ‘행성’이란 음악을 찾아 듣기도 했는데 나는 가장 강렬하고 자극적이었던 ‘화성’ 파트가 제일 좋았다.
https://youtu.be/1UfTOsPMg5M?si=I8gMv4g1lsY1ndVb
가장 먼저 등장하는 작품은 소설 전체에 잔잔하게 상실이 흩날리는 김애란 작가의 ‘안녕이라 그랬어’라는 소설이다. 책 표지와 가장 잘 어울렸던 소설. 무언가 대단한 깨달음을 동반하는 드라마 속 상실이 아닌 교훈 없는 현실의 상실. 이를 테면 ‘다음 단계를 꿈꾸던 젊은 나의 상실’.
한 시절 누군가와 정기적인 대화를 나눴다 해서, 긴장과 웃음, 안부를 나눴다 해서 헤어짐이 이렇게 서운한 줄은 몰랐다. 이상하지. 직장에서는 그 모든 게 지겨웠는데. 사회적 감각의 스위치를 꺼두고만 싶었는데. 고향에서 엄마와 나 오직 두 사람만의 관계로 세계가 쪼그라들자 그 많은 언어가 그리워졌다. 실수하고, 변명하고, 거짓말하고, 반문하고, 더러 표 안 나게 유혹하고, 티 나게 매혹당하고, 긍정하고, 의심하고, 호응하는 사회적 몸짓들이.
두 번째 작품은 김연수 작가의 ‘수면 위로’라는 소설이다. 주제나 줄거리에 공감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아래와 같은 표현들을 건질 수 있었다.
내가 잠시도 쉬지 않고 들여다본다고 해도 새로운 동영상이 올라오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이는 내가 접하는 유튜브는 전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뜻했다. 그런 점에서 유튜브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닮았다. 우리는 이 세계의 극히 일부분만을 경험한다. 그건 이 세계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이게 진실이다.
신이 수다스럽고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야. 그래야 사람들이 이해하거든.
나는 행복하고 슬프다. 나는 행복하지도, 슬프지도 않다.
세 번째 작품은 윤성희 작가의 ‘자장가’라는 소설이다.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을 수치로 표현한다면 가장 깊은 슬픔을 기록했겠지만 아쉽게도 식스 센스의 경지라기보다는 헬로우 고스트 정도의 느낌이었다.
네 번째 작품은 은희경 작가의 ‘웨더링’. 뜻하지 않게 천체물리학 지식과 ‘홀스트’의 ‘행성’이라는 음악을 알게 된 작품이다. ‘음악’을 가장 굵게 사용한 작품.
“네, 점성술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지구에서 보이는 행성을 가까운 순서대로 배치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명왕성은 왜 빠졌어? 그게 지구에서 안 보이던가?” … “(홀스트의 행성) 1914년에 작곡을 시작했다는 말을 내가 안 했다는 거지?” … “명왕성은 1930년에 발견됐어. 이 곡을 작곡할 때는 아직 없었지, 발견을 못했으면, 있는 것도 없는 거야. 알겠어? 과학은 불변의 진리가 아니야. 그 당시 살았던 과학자들이 알아낸 데까지를 뜻하는 거라고.” … “언어도 마찬가지야. 사용할 당시에만 맞는 말이고 결국은 변하게 돼 있어. 맞았던 답이 틀려지는 거지. 명심해라.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음악뿐이야.”
마지막 작품은 편혜영 작가의 ‘초록 스웨터’라는 작품이다. 다 읽고 나서 ‘그런데 이 작품의 어디에 ‘음악’이 있었지?’라고 생각하게 만든 작품. 궁금해 다시 찾아보니 있긴 있었다.
이 소설에서는 성격이나 관계 묘사 부분이 마음에 들어서 몇 군데를 발췌해 놓았다.
촉감이나 소지의 편의성 등을 묻는 간단한 질문에도 나는 즉답을 못하고 망설였다.
이모는 평소 장난스럽게 굴다가도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인사를 받아야 할 상황이면 눈에 띄게 무뚝뚝해졌다.
이모와 나 사이에는 공통된 대화거리나 관심사, 함께 생활한 데서 오는 친밀감, 혈연관계에서 생기는 책임이나 의무가 없었다. 그런 관계가 흔히 그렇듯 친절히 안부를 묻는 게 대화의 전부이다가 차츰 그러는 간격도 길어져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거의 연락을 주고받지 않게 되었다.
이모 역시 아무 얘기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상대가 누구건 항상 화젯거리를 찾느라 애를 먹는 타입이었다.
한동안 분을 풀지 못하고 열심히 그의 주변을 캐고 다녔으나 불행히도 그가 다른 사람을 만나기 위해 혹은 만나고 있어서 나를 떠났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순전히 내가 싫어서 떠난 거라고 생각하면, 그럴싸한 이유를 댈 수도 없을 만큼 사소한 것들로 내가 싫어져 무례한 방식을 택했다고 생각하면 더 견디기 힘들었다. 가장 친밀했던 존재가 한순간 찾을 바꿔 경멸 섞인 무관심을 드러내자 나는 금세 위축되었다. 무엇을 하든 나를 탓하고 의심했다. 한때 사랑했던 것들과 어떻게 헤어져야 하는지 몰라서였다.
(from '안녕이라 그랬어')
책 표지에는 마치 꽃잎이 흩날리듯 초록점이 흩날리며 떨어지고 있다. 사선으로 흩날리는 초록점을 보면 나무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어미에게서 초록점들을 떼어내는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 아름다운 흩날림은 각각의 점들에게는 죽음의 순간이다. 그 무엇보다도 가장 큰 상실일 자신의 상실을 겪는 순간들이 모여 우리에게 운명적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쉼 없이 죽음을 향해 낙하하는 우리의 삶도 모든 것을 초월한 누군가에게는 그러한 장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