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부름 혹은 내면의 부름
야성의 부름 작가 잭 런던은 187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해 10대 때부터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일을 했고, 클론다이크 골드러시에 합류해 알래스카에 다녀오기도 했다. 1896년에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에 들어가 사회노동당원으로 활동하면서 니체, 다윈, 마르크스 등의 저서를 탐독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는 한 학기 만에 그만뒀다. 이후 출판사와 잡지사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고, 1903년에 알래스카 유콘 강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바로 오늘 소개할 책인 ‘야성의 부름'을 출간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미국 자연주의 문학의 계보를 잇는 작가이며 미국 문학사에서 ‘19세기적 경향의 최고점에 달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니체와 다윈의 저서를 탐독한 사람답게 야성의 부름은 니체의 초인 사상과 다윈의 적자생존 사상이 진하게 배어있다.
NAVER 오디오 클립 김태리의 리커버북을 듣다가 이 책을 알게 되었다. 김태리 님이 책을 설명하며 소개한 짧은 문단이 계속 머리를 맴돌아서 어느 날 서점에서 발견했을 때 그냥 질러 버렸다.
삶에는 그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어떤 정점을 나타내는 환희가 있다. 그런 것이 살아 있음의 역설이다. 그 환희는 살아 있기에 찾아오지만 살아 있음을 완전히 망각할 때에야 찾아온다.
처음엔 어렸을 때 재밌게 봤던 동물 소재 영화인 베토벤과 같은 스토리 전개를 기대했다. 덩치는 크지만 순진하고 귀여운 개가 나와 주인 가족과 함께 한바탕 소동을 벌이며 가족애를 돋우는 그런 전형적인 동물 영화 내용. 내가 그런 기대를 품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콜 오브 와일드의 광고가 한 몫했다.
몇 달 전에 IPTV를 틀기만 하면 이 영화 광고가 흘러나왔다. 광고를 보면 벅과 손턴(해리슨 포드)의 우정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 듯한 느낌이다. 저 개의 눈빛을 보라. 어딜 봐서 저게 야성의 부름을 받는 개의 눈빛인가. 누구보다도 문명에 흠뻑 길들여진 이웃집 개의 눈빛 아닌가.
아래는 책 표지인데 보시다시피 영화 광고에 나오는 개와는 천지 차이다. 전혀 다른 느낌의 벅이 매섭게 노려보고 있다.
소설은 딱 책 표지와 같은 느낌이다. 등장하는 모두가 치열한 생존 경쟁에 뛰어든다. 냉혹한 추위의 땅에서 모두가 각자의 성향대로 생존을 도모한다. 때로는 의지할 수 있는 동료를 만나 서로 도움을 받고, 때로는 비열한 경쟁자를 만나 죽음의 사투를 벌인다.
생각해 보니 정말 가족 영화 같은 내용이었다면 김태리 님이 선정한 문구는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다. 책을 보고 나니 영화도 보고 싶어졌는데 IPTV에선 이미 내려갔고 넷플릭스에도 없다. 어느 쪽이든 다시 올라오면 좋겠다.
개를 좋아한다면, 특히 박력 있고 터프한 개를 좋아한다면 이 책을 꼭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주견공 벅은 아주 강인한 개다. 부유하고 명망 있는 판사 집에서 온갖 문명의 수혜를 입으며 살다가 한 순간에 야생의 세계로 내몰리지만, 타고난 몸집에 뛰어난 상황 판단 능력을 기반으로 때론 우직하게, 때론 처세술과 권모술수를 동원해서 어떤 환경에서도 결국엔 살아남는다. 그저 우직하고 착하기만 한, 어린 시절 만화에서 봤던 평면적인 동물 캐릭터가 아니다. 아주 입체적이고 역동적이며 끊임없이 자기 혁신을 추구하는 강단 있는 캐릭터다. 수많은 역경을 돌파하며 야성의 부름을 받아 야생의 지배자로 거듭나는 벅의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자연스레 벅의 매력에 반하게 된다. 벅의 멋진 자태를 묘사한 문단을 가져와 봤다.
벅의 내부에서 피에 대한 갈망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해졌다.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과 수완으로 살아 있는 동물들을 잡아먹고사는 맹수였다.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적의에 찬 세상에서 용감하게 살아남는 살인자였다. 이 모든 것 덕분에 그는 자신감이 넘쳤으며 그것이 몸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자신감은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풍겼고 근육 하나를 움직일 때도 나타났으며 행동을 통해서도 명백히 의사를 표시했고 세상 어느 것보다 더 윤기 도는 반들반들한 털에도 그 영광이 드러났다.
앞뒤 맥락이 없어서 내가 느낀 벅의 매력이 잘 전달되려나 싶다. 난 이 대목에 나온 벅의 풍채 묘사에 반해 실제로 이런 개를 보면 어떤 느낌일까 싶어 인터넷에서 벅과 같은 종의 개 사진을 찾아보기도 했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포인트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이다. 작가는 실제로 가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알래스카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코로나 사태로 자유가 제한된 채 한정된 공간에서 생활하는 요즘이라 그런지 글을 읽으며 머릿속에 탁 트인 공간이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비록 그 공간이 지독한 추위와 고단한 노동, 적응하지 못한 생물들의 죽음으로 채워지지만… 다시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는 시절이 오더라도 쉽게 갈 수 없는 곳이니 이렇게 책을 통해 간접 체험할 수 있어서 좋았다.
책은 132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다. 스토리 또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주인공의 성장 스토리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이 책을 펼친다면, 방구석에 앉아 집에서 기르기 힘든 개와 함께 드넓은 알래스카를 달리며 온갖 인간 군상(개 군상도 함께)을 관찰할 수 있다.
(주의! 아래 내용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삶의 환경이 급격히 바뀐 벅에게 시련이 닥친다. 벅은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에 감춰져 있던 본성, 야성의 부름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닥쳐오는 시련을 하나씩 극복하며 몸과 마음을 성장시켜 더욱 멋진 개로 거듭나는 벅은, 그 과정에서 수많은 개와 사람들을 만난다. 충직한 동료견도 만나고 비열한 경쟁견도 만나며 훌륭한 조력자도 만나고 자신을 위기로 몰아넣는 미련한 리더도 만난다. 미련한 리더 밑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던 벅에게 이 책의 두 번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구원자, 손턴이 나타난다. 벅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구원자 손턴을 만나 잠시 야성의 부름을 외면하고 그와 인생 여정을 함께 한다. 벅은 자신의 구원자에게 깊은 정을 주지만, 그와 함께 하는 와중에도 한 번씩 야성의 부름이 들려와 내적 갈등을 겪는다. 그러던 어느 날 손턴이 불의의 사건으로 목숨을 잃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벅은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야성의 부름에 온전히 복종하고, 마침내 야성 그 자체로 거듭난다.
김태리 님이 추천해 준 문단도 좋았지만 다 읽고 나니 야성의 부름의 본질을 가장 잘 표현했다고 생각하는 아래 대목이 가슴에 남았다.
그러나 벅의 뒤에는 온갖 종류의 개들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 있었다. 반은 늑대인 개들과 야생 늑대들이 성급하게 길길이 뛰며 벅이 먹는 고기의 풍미를 맛보았고 그가 마시는 물을 탐냈고 그와 함께 바람 냄새를 맡았고 숲 속 거친 삶이 만들어 내는 소리들을 듣고 그에게 말해 줬다. 그들은 벅의 기분을 좌우하고 행동을 지시했으며 벅이 누우면 함께 누워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를 넘어서서 꿈을 꿨고, 스스로 벅의 꿈속으로 들어가 그 꿈을 가득 채웠다.
이 그림자들이 벅에게 너무나 강력하게 명령해서 인간과 인간의 요구 들은 날마다 그에게서 멀어졌다. 숲 속 깊은 곳에서 벅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신비롭게 떨리고 유혹하는 소리를 자주 들은 벅은 모닥불과 그 주변의 다져진 흙에서 등을 돌려 숲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소리가 어디에서 오는지, 왜 들리는지 그는 알지 못했지만 야성의 부름은 계속되었다. 숲 속 깊은 곳으로부터 들리는 절체절명의 소리였기에 그는 어디로 그리고 왜라는 물음을 던지지도 않았다.
살다 보면 벅과 같이 본인만의 '야성의 부름'을 듣는 순간이 있다. 나에게도 그런 부름이 몇 번 들려왔다. 나는 부름에 복종하기도 하고, 때로는 부름을 무시하기도 하며 내 인생을 만들어 왔다. 소설 속 벅은 야성의 부름에 온전히 복종해 야생의 지배자로서의 자신의 삶을 완성했지만, 또 다른 세상의 벅은 제2의 손턴을 찾아 다시 문명의 품으로 돌아간 뒤 인간과 더불어 잔잔한 행복 속에서 여생을 살았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맞는 선택인지는 알 수 없다. 선택은 있지만 정답은 없는 문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소설 속 벅이 겪었던 것처럼 모든 선택엔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뒤따르며 어떤 결과가 오든 간에 좋은 점만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나는 야성의 부름에 끌려 직장과 직무를 바꿨다. 수없이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고 고민을 끝낸 뒤엔 치열하게 이직 준비를 해야 했다. 다행히도 그렇게 옮긴 직장과 업무는 나에게 잘 맞았다. 드디어 나에게 맞는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인간관계에서 발생했다. 직장을 옮기면서 상황이 바뀌니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공감대가 줄어들면서 조금씩 멀어지게 되었고, 그 와중에 관계를 악화시키는 바보 같은 실수를 몇 번 저질러서 다시는 보기 힘든 상황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전 직장에 계속 다녔다면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자연스레 주어졌을 텐데 멀리 떨어져 나온 나에겐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난 그렇게 소중한 친구들을 잃고 말았다.
내 선택이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에 대해선 평생 판단하고 싶지 않다. 그저 벅처럼 내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 노력을 노오력으로 치부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요즘 세상이지만, 사실 살면서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다른 방도는 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다시 야성의 부름이 들리는 것 같다. 이번에도 복종할지, 아니면 이번 부름은 무시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절체절명의 소리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면서도, 한편으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면서 현재에도 충실하는 것.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