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작가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1941년에 케냐 나이로비에서 태어나 영국 옥스퍼드대를 졸업했다.
케냐에서 태어났다고 나오지만 책에서 자신의 조국을 영국이라고 언급한다. 책을 펴낼 당시(2007년)에는 옥스퍼드 뉴 컬리지 석좌 교수였다고 나오는데 현재(2021년) 검색해 보니 명예 교수로 바뀌었다. 동물행동학과 분자생물학, 집단유전학, 발생학 등의 분야를 섭렵한 과학자이며 ‘이기적 유전자’나 ‘눈 먼 시계공’과 같은 책을 펴낸 저술가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 로버트 퍼시그(Robert Pirsig)
책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 인용문이 작가가 종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극명하게 드러낸다.
신은 여러 정황 증거를 살펴봤을 때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수가 해로운 망상에 시달리게 만들며 끊임없이 분열을 조장하는 종교는 인간 사회에 득보다는 실이 많다. 종교가 제공하는 여러 장점들은 종교 없이도 충분히 얻을 수 있다. 이게 저자가 600쪽이 넘는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다.
저자가 작정하고 신과 종교를 비판하기 위해 쓴 이 책은 총 10장으로 나뉜다. 처음 네 장에서는 저자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다양한 측면에서 여러 증거와 함께 살펴본다. 그다음 네 장에서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연 종교는 어떻게 발생했는지 또한 그런 종교가 인류에 도움이 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마지막 두 장에서는 보통 종교에서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삶의 위로나 영감 같은 여러 가지 장점들을 종교를 통하지 않고도 충분하고 확실하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논리적 증거를 제시한다.
오랜 세월 교회를 다녔던 나에게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 내용은 성경에 관한 내용이었다. 성경은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모든 교리의 기원이자 기독교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역사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 두껍기도 하거니와 오래전에 형편없는 수준으로 번역된 책(개정판이 나왔지만 여전하다)이라서 억지 피동이나 수동 표현으로 점철돼 있고 사용된 단어도 너무 옛날 단어다. 편집도 제대로 돼있지 않아서 순서대로 읽어도 내용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고 몇 번을 읽어도 지금 이 문단에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주인공을 포함한 등장인물이 수시로 바뀌면서 모험담인가 싶으면 갑자기 몇 페이지 동안 지리멸렬하게 인물의 족보가 나열되는 식이다. 곁들여진 일화나 예시들도 지금의 생활상과 동떨어진 몇 천년 전의 이야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 자체가 아주 어렵고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다.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아주 수준 낮게 번역해 놓은 전공 서적을 읽는 기분이라고 생각하면 딱 맞을 것 같다. 나 역시 수십 년 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딱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는데 그때도 그저 글자를 읽는 수준이었을 뿐 내용을 머리에 정리하는 수준으로 읽지는 못했다. 관련해서 저자 역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공정하게 말하면 성경의 상당 부분은 체계적으로 악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기이할 뿐이다. 수많은 익명의 저자, 편집자, 필사자 등이 9세기에 걸쳐 지리멸렬한 문서들을 혼란스럽게 엮고 짓고 수정하고 번역하고 왜곡하고 ‘개정한’ 선집에서 기대할 만한 바로 그런 양상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예배는 성경의 몇 구절을 낭독한 뒤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게 무엇이고 이를 바탕으로 어떻게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설교자가 풀어서 설명해 주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설교자는 성경의 구절을 택할 때 책의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 지난주에는 구약성경의 앞부분을 읽고 그에 대한 해설을 들었지만 이번 주에는 신약 성경의 중간 구절을 읽고 그에 관한 설교를 듣게 되는 식이다. 안 그래도 혼란스럽게 엮인 책을 그마저도 매주 이곳저곳 정신없는 순서로 접하기 때문에 예배에만 참석해서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저 부분 부분 설교자가 택한 구절을 설교자의 관점에서만 짧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교자나 전도자가 택한, 이해하기 쉽게 잘라낸 단편적인 일화로만 성서를 접한다. 이를 통해 선하고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와 같은 신의 이미지를 쌓게 되는데 그런 이미지를 단숨에 깨부수는 게 바로 구약성경의 내용이다.
구약성서의 신은 모든 소설을 통틀어 가장 불쾌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시기하고 거만한 존재, 좀스럽고 불공평하고 용납을 모르는 지배욕을 지닌 존재, 복수심에 불타고 피에 굶주린 인종 청소자, 여성을 혐오하고 동성애를 증오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유아를 살해하고 대량 학살을 자행하고 자식을 죽이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과대망상증에 가학피학성 변태 성욕에 변덕스럽고 심술궂은 난폭자로 나온다.
기독교의 신은 잔인하고 복수심 많고 변뎍스럽고 불공평한, 끔찍한 성격을 지닌 존재다. - 토마스 제퍼슨
만약 위 묘사가 사실이라면 그런 신을 섬기는 기독교가 진정 선과 평화와 사랑을 추구하는 종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 내용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성경을 꼭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읽어봤다면 위 얘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래에 저자가 성경을 발췌하고 설명한 부분을 가져왔다. 조금 길지만 현대의 윤리 관념에 비춰볼 때 성경의 내용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알 수 있다.
노아 이야기에 등장하는 도덕은 끔찍하다. 신은 인간을 탐탁잖게 생각했기에 (한 가족만 빼고) 아이들까지 포함하여 모조리 익사시켰고 덤으로 (아마도 죄가 없었을) 나머지 동물들까지 익사시켰다.
보시오. 내게 남자를 알지 못한 딸이 둘 있소. 그들을 당신들에게 내어줄 테니 마음대로 하시오. 단 손님들은 건드리지 마시오. 그들은 내 집 지붕 아래 들어왔으니 말이오 - 창세기 19장 7-8절
이 기이한 이야기는 다른 어떤 의미를 지닐지는 몰라도, 종교가 여성들을 어떻게 대접하는지는 확실하게 말해준다.
롯은 두 딸을 이용하고 그저 뒤돌아 본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된다. 어머니가 소금기둥으로 변한 뒤 딸들은 산 위의 한 동굴에서 아버지와 살았다. 남자에 굶주린 그들은 아버지를 취하게 만든 뒤 관계를 가지기로 결심하고 계획은 성공해서 두 딸은 임신한다. 이 일그러진 가족이 소돔에서 가장 도덕적인 사람들이라면, 신과 그의 천벌에 공감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롯과 소돔 이야기는 ‘판관기’ 19장에서 섬뜩하게 반복된다. 이름 모를 레위인(사제)이 첩과 함께 기브아로 여행하다가 한 노인의 집에서 후한 접대를 받으며 묵는다.
형제들이여. 안 되오. 그리 못되게 굴지 마시오. 이 남자는 내 집에 들어와 있으니 이런 어리석은 짓 마시오. 보시오. 여기 처녀인 내 딸과 그의 첩이 있고. 그들을 내어줄 테니 욕보이든 마음대로 하시오. 하지만 이 남자에게는 몹쓸 짓을 하지 마시오 - 판관기 19장 23-24절
그들은 아침이 될 때까지 그녀를 밤새도록 알아보고 학대했다. 날이 밝기 시작하자 그들은 그녀를 보내주었다. 동이 틀 무렵 그녀는 남편이 머무는 남자의 집 문 앞에 와서 쓰러졌고 날이 환히 밝을 때까지도 그대로 있었다 - 판관기 19장 25-26절
아침에 레위인은 첩이 문간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 ‘일어나라, 가자’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죽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칼을 들어 첩을 뼈째로 열두 조각으로 잘라서 이스라엘의 모든 해안으로 보냈다’ - 판관기 19장 29절
이런 성경의 내용을 가져오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신자들의 반박이 있다. 저자 역시 그런 반박을 예상하고 아래와 같은 내용을 덧붙였다.
물론 신학자들은 우리가 더 이상 ‘창세기’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항변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다. 우리는 성서에서 어느 부분은 골라서 믿고, 어느 부분은 상징이나 우화로 간주한다. 그렇게 취사선택하는 행위는 무신론자가 절대적인 근거 없이 이 도덕 규정이나 저 도덕 규정을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판단의 문제다. 어느 한쪽이 ‘직감에 좌우되는 도덕’이라면 다른 한쪽도 그렇다.
위 내용은 전부 구약성경의 내용으로 예수 탄생 이전의 얘기를 다루고 있다. 예수가 탄생한 뒤를 다루는 신약성경은 다를까? 관련해서 저자의 말을 가져왔다.
도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예수가 잔혹한 도깨비 같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비해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실존 인물이었다면 에수는 역사상 위대한 혁신가 중 한 명이었음이 분명하다. 산상수훈은 시대를 앞서 나간 것이었다. ‘다른 뺨도 내밀어라’라는 그의 말은 간디나 마틴 루서 킹보다 2000년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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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자신의 성장 배경이었던 ‘성서’에서 윤리학을 도출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과 뚜렷이 갈라섰다.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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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해야 할 것은 예수에게 가족의 가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퉁명스러울 정도로 무뚝뚝하게 대했고, 사도들에게 가정을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고 했다. ‘누구든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와 더 나아가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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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는 ‘구약성서’조차도 따라올 수 없는 악의가 담긴 새로운 가학피학증을 완성함으로써 새로운 부정의를 추가한다. 생각해보면 특정 종교가 고문 및 처형 기구를 신성한 상징으로 채택하고, 그것을 때로 목에 걸기도 하다니 놀랍기만 하다. 레니 브루스는 이를 제대로 꼬집었다. ‘만일 예수가 20년 전에 죽었다면, 가톨릭 신자들은 목에 십자가 대신 작은 전기의자를 걸고 다닐 것이다’. 하지만 그 배경이 되는 신학과 처벌 이론은 더 고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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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아이들, 심지어 태어나기 전의 아이들까지 까마득히 먼 조상의 죄를 물려받는다고 주장하는 윤리 철학은 대체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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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속죄가 악의적이고 가학피학적이고 혐오스럽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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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싶다면, 스스로 고문당하고 처형당하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그냥 용서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굳이 그렇게 함으로써 먼 미래 세대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살해자’라고 박해받고 학살당하도록 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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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진보적인 윤리학자들은 희생양 이론(무고한 사람을 처형함으로써 죄인의 죄를 대신 갚도록 한다는 것)은 커녕 어떤 형태의 응징적인 처벌 이론도 옹호하기 어렵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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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물론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그저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상징적? 그렇다면 스스로를 감동시키기 위해서, 예수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저지른 상징적인 죄를 대신 처벌받겠다고 스스로 고문당하고 처형당했던 것인가? 앞서 말했든이 지독히 불쾌할 뿐 아니라 개가 짖는 소리 같다.
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모태 신앙으로 교회에 입문해 내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엄마 손에 끌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별생각 없이 의무감에 교회를 다니다가, 진정 마음에 신앙을 품어보겠다고 열심히 다니기 시작하게 된 것은 제대하고 나서부터였다. 입대하고 나면 다들 그렇듯 갑자기 효심이 넘쳐흐른다. 그 효심이 용케 제대할 때까지 이어졌던 나는 열렬한 신자였던 어머니가 그 긴 세월 동안 바라시던 대로 교회를 제대로 한 번 다녀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부터 의식적으로 마음을 열고 교회에 다녔다. 이전에는 설교가 끝난 뒤 기도가 시작되면 다들 눈을 감고 있는 틈을 타서 조용히 일어나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그때부터는 예배를 전부 마치는 것은 물론 예배가 끝난 뒤 소그룹으로 나뉘어 진행하던 성경 공부 시간에까지 참여했다. 그러다 방학 때는 교회 수련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어느덧 예배 시간에 강단 앞으로 나가 대표 기도도 했으며 어느 순간 교회 초등부 교사를 맡아 아이들을 리딩했고 신앙심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쯤에는 교회 청년부 회장과 함께 태스크 포스를 조직해 외부 기관과 연계해 대규모 선교 봉사 활동을 기획해서 진행하기도 했다.
그렇게 약 2년 정도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며 교회에 다녔지만 결국 내 마음이 끝까지 열리지 못하고 다시 닫혀 버린 건 끝끝내 풀리지 않았던 한 가지 의문 때문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그 질문은 ‘특별한 사정이 있어 기독교를 접하지 못하고 삶을 마감한 사람들은 천국으로 가는가, 지옥으로 가는가’였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문구로 널리 알려진 기독교의 핵심 교리와 관련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생전에 선행을 베풀었는지 악행을 저질렀는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오직 믿음 여부로 사후 행선지가 달라진다는 교리가 마치 손톱에 박힌 가시처럼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고 결국 교회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태어나자마자 목숨을 잃은 아기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믿어야만 천국에 간다고 알려주는데 아직 무언가를 믿는다는 추상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아기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혹은 기독교를 접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나는 운 좋게 몇 백 년 전에 선교사가 다녀간 후 몇 차례 대 변혁을 거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게 된 시기의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기독교를 쉽게 접할 수 있었지만 나보다 먼저 이 땅에서 태어나서 예수라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던 수많은 우리 조상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무슬림의 자녀로 태어난 아이는 왜 천국에 가기 위해 기독교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보다 훨씬 높은 허들을 넘어야 하는 걸까.
기독교의 교리대로라면 그들은 모두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고 있을 것이다. 이게 과연 신이라는 존재가 할만한 짓인가. 신은 전지전능하다고 하니 과거와 미래를 포함해 어느 시대의 어떤 사람이 자기를 믿을지 아닐지를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지옥에 갈 사람이 누구인지를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인데 알면서도 지옥에 보내는 신을 우리를 사랑하는 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대형 교회의 목사들이 줄줄이 성범죄로 엮여 언론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교회에서 정을 떼기 시작했다. 이후 독립하면서 자연스럽게 엄마의 잔소리에서 벗어난 뒤로는 완전히 발길을 끊었고 그렇게 10년 정도 흐른 뒤에 이 책을 만나서 오래전에 내가 품었던 질문에 대한 전혀 다른 방향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논리적으로 접근했을 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답이었다. 신이 없다고 생각하니 나를 괴롭혔던 의문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우문이었다.
이 책은 여러 종교 중에서 세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되는 기독교와 가톨릭, 이슬람의 교리가 어떤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물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선하거나 공정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면서 능력만 좋은 신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은 창조만 해놓고 아예 세상에 관심을 끊은 신이나 반대로 악의로 가득한 신을 상상할 수도 있다. 어떤 신이든 신이라고 부를만한 존재는 없다고 보는 게 맞다는 설명이 책에 잘 나와 있으니 궁금하다면 꼭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비종교인 혹은 무신론자면서 자신의 신념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과 근거가 궁금한 사람도 꼭 이 책을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옥스퍼드 교수가 오랜 세월 동안 연구하며 찾아 놓은, 어디서 쉽게 접하기 힘든 여러 가지 근거를 만날 수 있는 것은 물론 성경과는 다르게 번역도 잘 돼있어 술술 잘 읽힌다.
반대로 종교인에게도 추천하고 싶은데 만약 리처드 도킨슨이 틀린 것이라면 그래서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면 꼭 그 근거를 듣고 싶기 때문이다. 난 신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증거가 나타난다면 언제라도 생각을 바꿀 마음이 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김태리와 류준열, 진기주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로, 시골에서 살다 자신의 삶을 찾으러 도시로 떠났던 김태리가 도시에서의 삶에 실패한 뒤 다시 시골로 내려와 자연과 옛 친구(류준열, 진기주)를 벗 삼아 4계절을 보내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그 영화가 겨울, 봄,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 때쯤 밤을 주우러 산에 오른 김태리가 문득 스산한 기운을 느끼며 다음과 같은 독백을 뱉고 산을 내려간다.
가을 산에는 곰이 나온다고 했다. 곰이 나올 리가 없는데도 어릴 때 들은 이야기는 힘이 세다.
종교가 악용하는 힘을 아주 짧고 분명하게 표현한 대사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렇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신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게 분명한데도 어릴 때 아무 생각 없이 엄마를 따라 교회에 가서 들은 이야기는 힘이 세서 아직도 종종 신이 날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나 교회에 가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런 행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들이 그 과정에서 심는 생각이 나쁜 것이다. 종교는 비논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예시가 가득한 오류투성이 교재에서 뽑아낸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관련해서 책에 나온 무시무시한 실험 사례를 소개하겠다.
이스라엘의 심리학자 조지 타마린(George R. Tamarin)의 섬뜩한 연구를 설명한다. 타마린은 8~14세의 이스라엘 아이 1000여 명에게 <여호수아서>에 나온 예리코 전투 장면을 읽어 주었다.
‘여호수아가 사람들에게 외쳤다. ‘고함을 쳐라. 주께서 저 도시를 너희에게 주셨다. 저 도시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여 주께 바쳐라. … 하지만 은이나 금, 동이나 철로 만든 집기들은 모두 주께 바칠 것이다. 그것들은 주의 금고에 넣을 것이다.’ … 그들은 남녀노소, 소, 양, 나귀 등 도시의 모든 것을 칼로 모조리 없앴다. … 그리고 도시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을 불태웠다. 오직 은과 금, 동이나 철로 된 집기들만 모아 주의 집에 있는 금고에 넣었다.’
타마린은 아이들에게 간단한 도덕 문제를 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올바른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니?’ 아이들은 A(전적으로 찬성), B(일부 찬성), C(전적으로 반대) 중에서 답을 선택했다. 결과는 양쪽으로 갈렸다. 66퍼센트는 전적으로 찬성했고 26퍼센트는 전적으로 반대했으며, 일부 찬성이라는 중간 입장을 택한 아이는 적었다(8퍼센트). 여기 전적으로 찬성한 집단(A)의 전형적인 대답 중 세 가지를 소개한다.
‘나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올바른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며 이유는 이렇다. 신은 그들에게 이 땅을 약속했고 정복하라고 허가했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거나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교도들에게 동화될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내 생각에 여호수아가 그렇게 한 것은 옳았다. 한 가지 이유는 신이 이스라엘 부족들이 그들에게 동화되어 나쁜 행동을 배우지 않도록 그들을 전멸시키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 종교를 갖고 있었고, 여호수아가 그들을 죽여 그들의 종교를 세상에서 없애버렸기 때문에 그는 옳았다.’
여호수아의 대량 학살을 정당화하는 근거는 어느 모로 보나 종교적이다. 전적으로 반대한 C 집단에 속한 아이들 중에도 일부는 모호한 종교적 이유로 그쪽을 택했다. 한 소녀는 여호수아가 예리코를 정복하려면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반대라고 대답했다.
‘아랍인들은 불결한데, 불결한 땅에 들어가면 그도 불결해지고 그들의 저주를 함께 떠안게 되므로 나쁘다고 생각한다.’
전적으로 반대한 다른 두 명은 여호수아가 전리품으로 좀 남겨놓지 않고 모든 동물과 재산을 파괴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여호수아가 자신들을 위해 동물들을 살려둘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잘했다고 보지 않는다.’
‘여호수아가 예리코의 재산을 남겨놓을 수도 있었기에 잘했다고 보지 않는다. 재산을 없애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것이 되었을 테니까.’
...
타마린 실험에 참여한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순진했다. 아마 그들의 비정한 견해는 그들이 자란 문화 집단이나 부모의 견해였을 것이다. 똑같이 전쟁에 찌든 고장에서 자란 팔레스타인 아이들도 방향은 반대지만 상응하는 견해를 피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하니 절망감이 밀려든다. 이 사례들은 종교의 엄청난 힘, 특히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역사적 적대감과 불화를 대물림시키는 힘을 보여주는 듯하다. 여기서 타마린의 A 집단에서 인용한 세 가지 답변 중 둘이 융화의 악덕을 언급한 반면, 나머지 하나는 종교를 근절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었다.
타마린은 실험을 할 때 흥미로운 대조 집단을 설정했다. 168명의 이스라엘 아이들로 된 별도의 집단에 <여호수아서>의 같은 대목을 읽어주면서 여호수아라는 이름 대신에 ‘린 장군’, ‘이스라엘’ 대신에 ‘3000년 전의 중국 왕조’를 넣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린 장군의 행동에 찬성한 사람은 7퍼센트에 불과했고, 75퍼센트는 반대했다. 다시 말해 유대교라는 요소를 고려 사항에서 제외시키자, 대다수 아이들은 현대인의 다수가 지닌 도덕적 판단과 일치하는 의견을 냈다.
종교는 국가의 영토에 터를 잡고 국민에게서 돈을 벌어들이면서도 오랜 세월 쌓아온 국가와 독립적이면서도 성스러운 이미지를 무기 삼아 제도와 간섭에서는 한 발 벗어난 채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와 마음속에 자신들이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심어놓고 있다. 이렇게 확보한 재력과 민심을 바탕으로 수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자신과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물리쳐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수많은 목숨을 끊임없이 앗아가고 있다.
정치는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지만, 종교는 그보다 열 배는 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 숀 오케이시
이 책에서 저자는 여러 증거와 논리를 동원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애쓴다. 애쓴다고 표현한 이유는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찾기가 불가능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확실하게 증명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저 정황 증거만 있을 뿐이다. 다만 저자가 이 책에 집대성해 놓은 수많은 정황 증거와 논리를 종합해 보면 저자의 말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게 옳은 판단인 것 같다. 적어도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쪽에서 내놓는 비논리적이고 허술하며 개인적인 증거보다는 이쪽의 증거들이 좀 더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다.
신이 없다면 종교가 성스러운 이미지를 바탕으로 확보한 특권 또한 근거 없이 부여된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종교를 다음과 같이 대하는 게 맞다.
우리는 동료의 종교를 존중해야 하지만, 자신의 아내가 아름답고 아이들은 영리하다는 그의 이야기를 존중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리고 그런 한도 내에서만 존중해야 한다. - H. L. 멘켄
한 시대의 종교는 다음 시대의 문화적 여흥 거리다. - 랠프 윌도 에머슨
감성적으로 바라보면 선의 절대적인 기준이며 평화를 사랑하고 공명정대한 심판을 주관하는 역할자로서의 신은 꼭 존재하면 좋겠다. 현실 세계에서 실현되지 못한 권선징악이 사후 세계에서라도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불합리하고 불공평해서 말로 담기조차 싫은 악행을 저지르고도 정당한 처벌을 받지 않고 떵떵거리며 잘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 사람들이 선하고 올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보다 더 건강하고 풍족하게, 심지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볼 때마다 난 그들이 사후 세계에서라도 공명정대한 신에게 꼭 심판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선하고 올바른 삶을 살다가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은 사후 세계에서라도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기도 한다. 아마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는지 책에는 아래와 같은 인용문도 실려있다.
사람들은 실제로는 경찰이 필요할 때 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 비평가 H.L. 멩켄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은 물론 인생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모아놓고 살펴본 결과 그런 신은 없을 것이고 사후 세계의 심판 같은 것도 없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결론은 그렇다. 언젠가 증거를 찾아 그런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으면 좋겠다. 참호에는 무신론자가 없다는데 죽음과 직면한 순간에는 내 생각이 바뀌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