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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nugeun Apr 12. 2021

그리스인 조르바 독서록

니코스 카잔자키스

그리스의 작가이자 사회주의 계열 정치인이다. 아래는 자신의 비석에 남긴 비문인데 ‘그리스인 조르바’를 세 문장으로 표현하라고 하면 이 비문이 될 것 같다.

나는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나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나는 자유다. Είμαι λέφτερος.


그리스인 조르바

이 책을 읽을 때 리처드 도킨슨의 ‘만들어진 신’도 함께 읽고 있었다. 유명한 두 무신론자의 책을 읽고 나서 역설적으로 신약성경 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가 떠올랐다. 이 구절은 연세대학교 건학 정신으로도 유명하다.


연세대학교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경말씀(요한복음 8:31~32)을 바탕으로 진리와 자유의 정신을 체득한 지도자를 양성한다.


참고로 건학 정신에 일부분만 포함되어 있는 요한복음 8장 31절의 전체는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유대인으로 한정한 앞부분을 한국에서 한국인이 다닐 학교의 건학 정신으로 차마 사용할 수 없었을 테니 자른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고 ‘진리와 자유의 정신을 체득한’이라는 부분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진리와 자유의 정신을 체득하고 싶은 모든 이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만들어진 신’이 모태 신앙으로 교회에 끌려갔던 내게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해 주었다면 ‘그리스인 조르바’는 삶에 겁먹어 편협해 질대로 편협해져 있던 내 정신에 자유의 기쁨을 불어넣어 뻥 뚫어줘서 보다 넓은 관점으로 삶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멋진 책이다.


줄거리

이 책의 주인공 ‘나’는 35살이 될 때까지 줄기차게 책만 파고들며 진리를 탐구한 엘리트 부르주아 출신의 남자다. 어느 날 남자의 친구, 스타브리다키가 먼 타국에서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동포를 구하겠다고 떠난다. ‘나’는 친구를 배웅하러 항구로 나간다. 이별의 인사를 나누는데 문득 친구가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나’는 제안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그런 ‘나’에게 친구는 ‘Au revoir(안녕) 이 책벌레야!’라고 말하고 떠난다. 사랑하는 친구의 말은 가슴에 파고들었고 이에 ‘나’는 35년 동안 책벌레로 살아왔던 자기 인생의 방향을 바꿔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기 위해 리비아에 면한 크레타 해안에 폐광이 된 갈탄광 한 자리를 구한다. 이제 책벌레는 책벌레라는 족속과는 거리가 먼 노동자들과 한바탕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이제껏 너는 그림자만 보고서도 만족하고 있었지? 자, 이제 내 너를 본질 앞으로 데려갈 테다.


여기 또 한 남자가 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조르바’다. 군인, 행상인, 광부 등 갖가지 직업을 거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 온갖 경험을 거친 백전노장이지만 현재는 일거리를 찾아 항구를 서성이는 백수다.


이 두 남자가 크레타로 향하는 배가 떠나는 항구에서 만난다. 우연히 조르바와 만나게 된  ‘나’는 그와 몇 마디 주고받으며 그가 바로 자신이 행동하는 인생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했던 딱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가 보기에 조르바는 자신이 책에서 구하고 익히려고 했던 모든 것을 온몸으로 부딪혀 직접 살아내며 체득한 사람이자 그렇게 체득한 지혜를 거침없이 입으로 쏟아내는 사람이다.


당신은 책에 쓰인 것이면 뭐든 꿀꺽꿀꺽 삼킵니다만, 책 쓰는 사람들이 어떤 것들인지 한번 생각해 봐요! 퉤퉤! 기껏해야 학교 선생들이지. 그런 것들이 여자니, 여자 꽁무니를 쫓는 남자 일을 뭐 알겠어요? 개코도 모르지!’
 ‘그럼 조르바, 당신이 책을 써보지 그래요? 세상의 신비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면 그도 좋은 일 아닌가요?’ 내가 비꼬았다.
 ‘못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못했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나는 당신의 소위 그 <신비>를 살아 버리느라고 쓸 시간을 못 냈지요. 때로는 전쟁, 때로는 계집, 때로는 술, 때로는 산투르를 살아 버렸어요. 그러니 내게 펜대 운전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그러니 이런 일들이 펜대 운전사들에게 떨어진 거지요.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을 몰라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그리스인 조르바’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온 ‘나’와 조르바가 함께 크레타 섬으로 떠나 한바탕 사업을 추진하며 먹고 마시고 일하고 사색하고 사랑하며 삶에 몸을 내던지는 이야기를 그린 책이다. 둘은 탄광을 빌려 사업을 시작한 고용주와 탄광의 현장 책임자로 고용돼 인부들을 관리하며 갈탄을 캐는 피고용인이라는 관계를 뛰어넘어 진솔한 관계를 맺고 살아온 배경과 세대 차이를 뛰어넘어 우정을 쌓는다. ‘나’는 고용주 입장에서 조르바를 부리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행동하는 인생의 멘토로 여기며 그의 이야기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인다.


이 책의 매력은 조르바라는 캐릭터에서 나온다. 조르바는 그야말로 브레이크 없이 모든 일에 자신을 오롯이 내던지는 사람이다. 65세의 적지 않은 나이지만 나이는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일이든 사랑이든 한 번 시작하면 뒤를 생각하지 않고 열정을 불사르며 그렇게 모든 걸 걸고 뛰어들어 그야말로 끝장을 낸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끝낸 일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다. 끝이 좋든 나쁘든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다하고 나면 춤 한 번 신명 나게 춘 뒤 주저 없이 다른 일에 또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뛰어든다. 그야말로 불꽃같은 남자다.


표면으로 뛰쳐나오려는 이 원시적인 인간에게 그저 감탄만 하고 있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우리에게는 그토록 편리한, 자질구레한 덕성이 그에겐 없었다. 그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만족을 모르는 극히 불쾌하고 위험한 덕성뿐이어서 이런 상태가 그를 극한과 지옥의 나락으로 끊임없이 충동질해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글을 쓸 때면 이 무식한 일꾼은 펜을 무지막지하게 부러뜨린다. 원숭이 껍질을 처음으로 벗어던진 원시인처럼, 아니면 위대한 철학자처럼 그는 인간의 원초적인 문제에 지배당한다. 조르바는 이들 문제를 목전의 급한 필요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그는 모든 사물과 생소하게 만난다. 그는 영원히 놀라고, 왜, 어째서 하고 캐묻는다. 만사가 그에게는 기적으로 온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나무와 바다와 돌과 새를 보고도 그는 놀란다. 그는 소리친다.
 <이 기적은 도대체 무엇이지요? 이 신비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무, 바다, 돌, 그리고 새의 신비는?>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 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나’는 그런 조르바를 지켜보며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키고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나간다. 그저 문자로 세상을 배워온 ‘나’는 오감으로 인생을 체득한 조르바와 함께 책 속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삶을 깨우친다.


<.....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쓰여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그 모든 걸 졸업했습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그는 말하다 말고 머리를 긁었다. 생각이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 만일에 …… 만일에 말이지요……>
 <만일이라니, 뭐요? 들어 봅시다!>
 <...... 만의 하나, 그 사람들이 눈을 떴을 때, 당신이 지금의 암흑세계보다 더 나은 세계를 보여 줄 수 있다면…… 보여 줄 수 있어요?>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꿈이 짜낸 빛의 천이다. 보랏빛 바람(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에 둘러싸인 구름…… 이 땅의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도 이제는 암호 이상의 예언을 들려줄 수 없다. 암호가 모호할수록 선지자는 위대한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 머리는 지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하지만 그는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열려 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으로 고스란히 잔뜩 부풀어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있는 이 조르바의 겨냥이 빗나갈 리 없다. 아프리카인들이 왜 뱀을 섬기는가? 뱀이 온몸을 땅에 붙이고 있어서 대지의 비밀을 더 잘 알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뱀은 배로, 꼬리로, 그리고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안다. 뱀은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한다. 조르바의 경우도 이와 같다. 우리들 교육받은 자들이 오히려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들일 뿐…
그래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르바의 말이 옳다는 건 나도 알았다. 그러나 그럴 용기가 내겐 없었다. 나는 아무래도 인생의 길을 잘못 든 것 같았다. 타인과의 접촉은 이제 나만의 덧없는 독백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타락해 있었다. 여자와의 사랑과 책에 대한 사랑을 선택하라면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나’는 조르바라는 삶의 촉매와 함께 크레타 섬에서 많은 이들을 만나고 소중한 경험을 쌓아나간다. 그 방향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나’가 만나는 크레타 섬의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을 자신의 인생에 과감하게 내던지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채 나는 길을 따라갔다. 나는 인간의 고통에 따뜻하게, 그리고 가까이 밀착해 있는 이들을 존경했다. 오르탕스 부인이 그랬고, 과부가 그랬고, 슬픔을 씻으려고 바다에 용감하게 몸을 던진 창백한 파블리가 그랬고, 양의 목을 따듯이 과부의 생멱을 따라고 고함을 지르던 델리(카테리나)가 그랬고, 남들 앞에서는 울지도 말도 하지 않던 마브란도니가 그랬다. 나 혼자만 발기 불능의 이성을 갖춘 인간이었다. 내 피는 끓어오르지도, 정열적으로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했다. 나는 모든 것은 팔자소관이라고 주장하면서 겁쟁이로 사태를 바로잡아 보려고 했던 터였다.


동포를 구하기 위해 떠났던 친구, 스타브리다키 역시 종종 편지를 보내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가 보낸 편지를 읽어보면 스타브리다키 역시 일정 부분 조르바와 같은 성정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자기가 선택한 대로만 행동하네. 나는 내 운명을 이곳으로 데려와 노예처럼 일해 왔고 지금도 노예처럼 일하고 있네. 나는 땀을 흘려 왔고 한 양동이씩 앞으로도 흘릴 터. 나는 땅과, 바람과, 비와, 인부들과, 붉고 검은 노예와 싸우고 있네.
 재미는 없네. 그렇지. 한 가지가 있을 뿐….. 노동. 노동에는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노동이 있겠는데 나는 육체 쪽이네. 나는 즐겨 나를 혹사하고 땀을 쏟으며 내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듣네. 번 돈의 반쯤은 떼어 내어 아무렇게나 어디서나 마음 내키는 대로 써버리네. 내가 돈의 노예가 아니라 돈이 내 노예인 것. 나는 일의 노예이며 내가 처해 있는 노예 상태를 자랑으로 여기네.
우리는 그루지야 국경에 이르렀네. 용케 쿠르드에서 탈출한 셈이지. 나는 마침내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 버리고 말았네. 왜 그런고 하니, 내가 <행복이란 의무를 행하는 것. 의무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행복은 그만큼 더 큰 법>이란 옛말을 제대로 실감한 적이 있다면 그게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네.   


조르바의 관심을 끈 것은 물론이고 이런 멋진 말을 할 줄 아는 친구를 두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나’ 역시 이미 그들과 같은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처럼 이미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래 내용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 ‘나’는 조르바와 함께 크레타 섬에서 위대한 실패를 겪는다. 조르바를 통해 점차 행동하는 인생으로 변모해 갔던 그는 그와 함께 모든 것을 건 도전을 기꺼이 수행하고 그 끝에서 완전한 실패를 마주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 실패 속에서 평생 어디서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자유’를 느낀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해변을 따라 마을로 향했다. 내 심장은 가슴속에서 뛰고 있었다. 내 생애 그 같은 기쁨은 누려 본 적이 없었다. 예사 기쁨이 아닌, 숭고하면서도 이상야릇한, 설명할 수 없는 즐거움 같은 것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것과 극을 이루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돈, 사람, 고가선, 수레를 모두 잃었다. 우리는 조그만 항구를 만들었지만 수출할 물건이 없었다. 깡그리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 없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혹자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혹자는 악마라고 부르는)이 우리를 쳐부수려고 달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부서지지 않았다.
 외부적으로는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 외부적인 파멸은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나’는 조르바를 만나 진정한 자유와 지고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눈을 틔운 것이다. 살면서 이보다 기쁜 순간이 있을까.


책을 읽으며 불편하다고 느낄 수 있는 점

이 책에 녹아 있는 작가의 시선 중에 불편함을 느낄 수 있을 만한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이고 또 하나는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먼저 작가가 종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잘 드러내는 문단을 가져와봤다.


 <신문 안 가져오셨소?> 수도승 하나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신문이라고요? 아니, 여기서 신문은 어디에다 쓰시려고?> 내가 놀라서 반문했다.
 <답답한 형제군. 신문이 있어야 저 아래 바깥 세상사를 알 수 있을 게 아닙니까?> 두세 사람의 화가 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코니 난간에 기댄 채 그들은 까마귀 떼처럼 떠들었다. 영국 이야기. 러시아 이야기. 베니젤로스 수상 이야기며 왕 이야기도 했다. 세상은 그들을 버렸지만 그들은 세상을 버린 적이 없었다. 그들의 눈길에는 대도시, 상점, 여자들, 그리고 신문이 투영되고 있었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아름답고 우아한 여자를 통하여 나를 잠시나마 천국으로 이끌어 주셨던 것이지요. 나는 단식이나 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여자를 통해서 하느님을 뵙고 그 품에 안길 수 있었던 것이지요.... 푸르스름한 그 봄밤에 나는 그리스도의 식은땀을, 창백하고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몸에서 반짝이는 식은땀을 볼 수 있었다. 행인을 붙잡고 애원하는 그리스도, 거지처럼 팔을 벌린 채 떨고 있는 그리스도를 볼 수도 있었다. ….. 그들은 그리스도의 절망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리스도 혼자만이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별 아래서 울고 묵상하면서 그는 공포로 떨고 있는 자신의 불쌍한 인간의 육신을 달랬다.
 <한 알의 밀알처럼 사람도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죽지 않으면 어떻게 열매를 맺겠는가. 어떻게 굶어 죽은 사람을 먹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내부에서, 인간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멈출 듯이 떨고 있었다. 심장은 죽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조르바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것 봐요. 크리스마스이브랍니다. 서둘러 교회 가기 전에 여자를 만나요, 두목. 예수가 오늘 밤에 태어납니다. 당신도 가서 당신 기적을 연출해요!>

 <좋아요, 그럼. 갑시다. 하지만 두목, 이것 하나만은 알아 뒀으면 해요. 하느님은 당신이 천사장 가브리엘처럼 과부 집에 가는 걸 더 좋아하실 겁니다. 잘 들어요. 하느님이 당신 같았더라면 마리아를 찾아가지도 않았을 테고, 그랬더라면 그리스도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거요. 그럼 하느님이 어떻게 하셨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하느님은 마리아에게 가셨다, 마리아는 과부다, 어때요?>


‘만들어진 신’을 감명 깊게 읽었던 나는 이런 작가의 시선이 마음에 들었지만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그리스 정교회는 ‘그리스인 조르바’와 작가의 다른 두 작품,  ‘미할리스 대장’과 ‘최후의 유혹’이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작가를 파문했고 교황청 역시 ‘최후의 유혹’을 금서로 지정했다고 한다.


두 번째로 작가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이 책을 읽었을 때 가장 불편함을 느낄 수 있을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나 역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내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이 누구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꼽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


하지만 작중의 조르바는 툭하면 여자를 암컷이나 화냥년, 잡년, 심지어는 암캐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예시 문단을 몇 개 가져왔다.


 여자를 보는 남자는 모두가 여자를 갖고 싶다고 말해야 합니다. 여자란 가엾게도 그걸 원하고 있어요. 이런 제기랄. 참한 계집들이 내 죽을 때 따라 죽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죽어가는 데도 화냥년들은 죽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것들은 여전히 뜨끈뜨끈하게 재미 보고, 사내들은 그런 것들을 끼고 주물럭거리는데 나는 그것들이 밟고 다닐 흙이 되고 있으니 이게 보통 속상한 일인가요!
 <있을 턱이 없지 않소! 두목. 당신은 여자가 별것인 줄 아는데…… 하기야 별것은 별것이지. 여자는 인간이 아니에요! 그런데 뭣 하러 감정을 품어? 여자는 불가사의한 거예요. 법률과 종교가 들고 나서 봐야 여자에겐 해당 사항이 없어요. 여자에 대해서는 그런 걸 쓰면 안 됩니다. 두목, 그건 너무 가혹한 짓이에요. 공정하지 못해요. 내가 법을 만든다면 남자와 여자에게 같은 법을 만들어 적용하지는 않겠어요. 남자에겐 십 계명, 백 계명, 천 계명이 필요합니다. 결국 사내는 사내니까…. 계명이 아무리 많아도 지킬 능력이 있어요. 그러나 여자에게 필요한 율법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 아니 두목, 이놈의 이야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야 하는 겁니까…. 여자는 힘이 없는 피조물이오. 두목, 누사를 위해 마십시다. 그리고 여자를 위해….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 남자들에게 분별력을 조금 더 허락하셨으면!>
 그는 팔을 들어 술을 마시고 난 다음 도끼질하듯이 손을 내렸다.
 <하느님이 우리 남자에게 분별력을 더 주셔야지. 아니면 수술로 불알을 까버리시든지. 내 말 믿으세요. 안 그러면 우리 남자는 끝나는 거예요.>
 <여자의 귀고리, 여자의 장신구, 향기 좋은 비누, 작은 라벤더 향수를 포기하게 하다니 말이나 되는 노릇입니까! 여자가 그런 걸 포기하면 세상은 끝나는 겁니다! 그건 공작새 깃털을 홀랑 뽑아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죠!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되죠.>
 <늙은 화냥년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요. 옛날 애인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할 때마다 저것은 앙증맞은 비둘기, 순진 무구한 백조, 새끼 비둘기가 되어 얼굴을 붉히지요. 그래요. 처음 하는 것인 양 낯빛을 붉히고 파르르 떨기까지 한대요! 두목, 여자라는 건 참 알다가도 모를 동물이지요? 천 번을 깔려도 처녀로 다시 일어서는 겁니다.>


아마 요즘 우리나라에서 자기 작품에 이런 언행을 거침없이 뿌려대는 인물을 그려 놓고 그 인물이 자신의 영혼에 깊은 골을 낸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 작가의 작가로서의 인생이 골로 가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이런 부분만 발췌해 이 작품 전체를 매도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작품이다. 작품을 읽을 때 이 작가가 1883년에 태어난 옛날 사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었으면 좋겠다.



마치며

조르바는 먹는 것의 가치를 알고 제대로 먹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시장하지 않으시다…. 하지만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들지 않았어요? 육체에는 영혼이란 게 있습니다. 그걸 가엾게 여겨야지요, 두목. 육체에 먹을 걸 좀 줘요. 뭘 좀 먹이셔야지. 아시겠어요? 육체란 짐을 진 짐승과 같아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다 영혼을 팽개치고 말 거라고요.>
 <.... 먼저 먹읍시다. 먼저 배를 채워 놓고 그다음에 생각해 봅시다. 모든 게 때가 있는 법이지요.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건 육반입니다. 우리 마음이 육반이 되게 해야 합니다. 내일이면 갈탄광이 우리 앞에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 마음은 갈탄광이 되어야 합니다. 어정쩡하다 보면 아무 짓도 못하지요.>


재택 근무하면서 점점 귀찮아져 대충 떼우는 날이 많아지고 있는데 내일은 한 끼라도 조르바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제대로 먹고 즐겨봐야겠다. ‘나’와 같은 행복을 찾길 기대하며.


나는 행복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이다금 놀라면서)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그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가 행복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조르바에게 복 있을진저. 조르바는 내 내부에서 떨고 있는 추상적인 관념에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살아 있는 육체를 부여했다. 조르바가 없으면 나는 다시 떨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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