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comedia di Dante Alighieri - Inferno
원제 ‘La comedia di Dante Alighieri’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희극(코메디아)이란 뜻이다. ‘성스러운’이란 수식어가 들어간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이란 제목은 보카치오가 저서에서 단테에게 붙인 성스러운(divina)이라는 감탄적 칭찬을 본 출판업자 로도비코 돌체가 새로 붙인 제목이라고 한다.
워낙 유명한 책이고 얼마 전에 읽으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주인공이 손에서 놓지 않았던 책이어서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읽기 전에 표지를 보니 그런 기대감이 더욱 커졌다. 서울대와 미국 대학위원회, 국립중앙도서관, 뉴스위크에서 추천하고 있었고 ‘인간사의 모든 주제를 끌어안은,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낸 최고의 걸작’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으며 내가 재밌게 읽었던 또 다른 책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저자 괴테가 아래와 같은 평을 남겼다고 적혀 있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최고의 것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나는 잘 모르지만 유명한 작가인 것 같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라는 사람의 서평도 적혀 있었다.
모든 문학의 절정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이 정도면 아무리 배경 지식이 부족하고 취향이 안 맞아도 최소한 시간 낭비는 아니겠다 싶었다. 그런데 지옥편을 다 읽고 연옥편을 읽고 있는 지금까지도 정말 시간 낭비가 아닌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시였다. 또 한 번 내 무지에 감탄했다. 그렇게 유명한 책이었는데도 형식이 소설이 아니라 시라는 것을 책을 펴고서야 알았다. 처음에는 시가 나오길래 ‘여는 글’의 용도로 시를 쓴 것인가…라고 생각하면서 페이지를 넘겼는데 넘겨도 넘겨도 계속 시만 나와서 책을 끝까지 후루룩 넘겨보니 전부 시였다.
이 책은 소설 속 단테(저자는 소설 속 주인공으로 자신을 등장시킨다)가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고 두려움에 떨다가 평소 존경하던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만나 그의 인도로 지옥을 방문하는 내용이다. 상상으로 떠나는 가이드 관광 여행기라고 할 수 있다.
단테는 지옥을 관광하며 각양각색의 죄를 저지른 죄인들이 각자의 죄에 맞는 지옥에서 다양한 형벌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게 중 몇몇은 관광객 단테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으며 자신이 누구이고 왜 이런 벌을 받고 있는지를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에둘러서 전달하는데 그 대화 방식이나 설명의 정도가 상당히 독특하다. 등장인물끼리 주고받는 대화지만 마치 독자인 나에게 설명해 주기 위해 대화를 주고받는 느낌이랄까. RPG 게임할 때 게이머가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개발자가 집어넣은 캐릭터와 NPC의 대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단테가 설정한 지옥은 총 9층으로 구성된다. 가장 약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수감되는 1층 림보에서 시작해 음욕 지옥, 식탐 지옥, 인색과 낭비 지옥, 분노 지옥, 이단 지옥, 폭력 지옥, 사기 지옥을 거쳐 단테가 생각하기에 가장 나쁜 죄인 배신을 저지른 사람들이 가는 9층 배신 지옥이 있다.
각 지옥은 아주 커다란 고리 형태로 묘사되며 그런 고리가 9겹이 쌓여 땅 속 깊숙이 박힌 깔때기 모양을 이룬다. 검색창에 ‘보티첼리 지옥도’라고 검색하면 유명한 화가인 보티첼리가 그린 단테의 지옥을 볼 수 있다.
아래 주소로 들어가면 보티첼리의 지옥도를 요즘 분위기로 귀엽게 잘 표현해 놓은 것도 볼 수 있다.
https://www.alpacaprojects.com/inferno/en/
단테는 지옥을 여행하면서 수많은 죄인과 그들을 관리하는 간수들을 만난다. 죄인들은 대부분 역사적으로 혹은 당시 사회에서 아주 유명했던 사람들이다. 간수 역할로는 켄타우로스, 하피, 케르베로스, 미노타우르스와 같은 신화 속 존재가 주로 등장한다. 이렇게 작중에 이름을 올리는 죄인과 간수들이 굉장히 많다. 굉장히라는 표현이 부족한 것 같다. 내 입장에서는 매 시구마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거나 언급되는 느낌이었다.
단테는 이렇게 셀 수 없이 많은 인물들을 파악해서 각각의 행실이나 성향에 따라 적절한 지옥에 배치해 놓고 지나가는 단테(작중 단테)와 자신의 죄에 관해 대화를 나누게 한다. 이를 통해 당대의 정치와 사회, 문화, 예술은 물론 역사와 신화에도 아주 밝았던 사람이라는 것이 잘 드러난다. 또한 작중에서 달이나 별자리의 움직임과 같은 자연환경의 변화를 통해서 현재 시각을 설명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서 천문학 지식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뛰어난 상상력 위에 그런 지식을 총망라해서 운율을 맞춰(번역본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지만) 이런 방대한 시집을 탄생시켰다는 사실로 볼 때 감히 내가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박식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사회도 아니었기에 그저 인물 정보를 수집하는 것부터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텐데... 대단한 사람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고 수많은 대가들이 감탄한 작품인데 내가 아직 그 감탄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조금 유치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천국편까지 전부 읽은 게 아니라서 천국편 독서록을 쓸 때쯤에는 바뀔 수도 있겠지만, 연옥편 앞부분을 읽고 있는 지금까지는 그렇다. 지옥편이 유치하다고 생각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아래 장면이다.
그 말에 나는 외쳤다. “이 저주받은 영혼아!
이곳에 갇혀 영원토록 통곡하여라!
아무리 더러워졌어도 내 널 알아보겠다!”
그가 배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선생님이 경계하면서 밀쳐 냈다.
“저 다른 놈들에게 꺼져 버려라”
선생님은 팔로 내 목을 감고
얼굴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불의를 멸시하는 영혼아!
너를 낳은 여인에게 축복이 내리길!
저자는 세상에서 거만했던 사람이었지
일생 동안 누구도 자기를 따뜻하게 대해 준 기억이 없어서
그의 그림자가 이렇게 사납게 구는 거란다.
세상에서는 스스로 위대하다 여기지만
여기서는 진흙탕 돼지처럼 뒹굴며
야비한 기억만 떠올릴 자가 얼마나 많을지!”
“선생님! 늪을 빠져나가기 전에
그자가 이 진흙탕 속으로 고꾸라지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저편 언덕이 보이기 전에
너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니,
이곳에서는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곧바로 내 눈에 흙투성이의 무리가
그자를 난도질하는 것이 보였으니
나는 그 광경을 보여 준 하느님께 아직도 감사드린다.
모두가 부르짖었다. “필리포 아르젠티를 결딴내자고!”
그 피렌체의 망령은 화를 내더니
제 이빨로 자신을 물어뜯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를 떠났다. 그에 대해 더 말하지 않겠다.
울부짖는 소리가 귀에 쟁쟁했기에
나는 앞만 바라보았다.
주석을 참고해 보면, 필리포 아르젠티라는 사람은 흑당에 속해서 단테와는 정치적으로 경쟁 상대였던 사람이다(단테는 백당이었다). 피렌체 시가 알리기에리 가문에게서 압수한 재산을 이 사람이 불하받았다고 한다. 책을 쓸 당시에 멀쩡히 살아 있었다는데 단테는 자신의 정치적 경쟁 상대를 이미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위와 같은 모습으로 지옥에 등장시켰다.
이 부분에서 몰입감과 집중력이 많이 떨어졌다. 종교적 지옥을 그리면서 자신의 개인감정을 앞세워 정적을 등장시킨 것부터가 유치한 발상인데 작중 단테가 현명하고 지혜롭다며 떠받드는 길잡이 베르길리우스를 통해서 그런 단테의 개인적 복수 감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그려내는 부분에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길잡이 얘기로 넘어가자면, 작중 단테가 온갖 미사여구로 칭찬하는 길잡이 베르길리우스의 사고방식이나 언행이 아무리 봐도 작중 단테보다 나을 게 없어 보인다는 점도 유치함을 느끼게 하는 데 한 몫한다. 초등학생이 소설을 쓰면서 소설 속에 굉장히 현명하다는 설정으로 어떤 인물을 등장시키는데 그 인물의 언행이 안타깝게도 초등학생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작중 단테가 자꾸 길잡이를 칭찬하고 길잡이는 그런 칭찬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단테를 위로하기도 하고 야단치기도 하면서 인도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야말로 코미디를 보는 느낌이랄까.
아래는 Thebæ라는 도시를 공격하면서 제우스가 와도 자신을 못 막을 거라고 얘기하는 바람에 제우스의 벼락을 맞고 죽었다는 카파네우스가 지옥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순간 길잡이가 있는 힘껏 고함을 쳤다.
그가 그토록 크게 소리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카파네우스, 이놈! 너의 오만이 수그러지지 않는 한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다.
너의 괴로움은 너의 분노에서 나오니
다른 벌이 없을 것이다.”
신화 속 존재가 등장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전쟁터에 나가면서 기독교의 신도 아닌 그리스 신화의 신 제우스를 모욕하며 오만한 모습을 조금 보였다고 냅다 지옥에 처넣은 것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이단의 신을 모욕한 것이니 오히려 칭찬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이외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 여럿 있는데 가장 중한 죄인들이 수감된다는 9층 배신 지옥을 그린 장면도 그중 하나였다.
애초에 기독교식 지옥에서 죄를 판단할 때 이단의 죄보다 배신의 죄가 더 무겁다고 설정한 것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는데 그런 배신의 지옥에 수감된 죄인 중에서 가장 죄가 무겁다고 설정한 세 명이 유다와 브루투스, 롱기누스라는 점도 이해하기 어려웠다(참고로 이들은 루시퍼의 입에 반쯤 물려 영원히 씹히는 형벌을 받고 있다).
먼저 예수를 배신한 것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신의 아이콘 유다는 ‘유다 복음’과 관련해서 ‘만들어진 신’에 나왔던 아래 설명으로 내 마음을 대신하고 싶다.
저자가 누구든, 그 복음서는 유다의 관점에서 쓰였고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은 오로지 예수가 그 역할을 맡으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전부 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리게 함으로써 인류가 대속할 수 있게 하려는 계획의 일부였다. 그 교리도 못마땅하지만 유다가 그 뒤로 죽 비난을 받아왔다는 점도 불쾌함을 심화시킨다.
기독교에서 전지전능하다고 일컫는 신이 유다의 배신을 몰랐을 리 없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유다의 배신은 유다가 의도적이었든 아니었든 신의 계산 하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다. 그걸 과연 배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더 나아가서 모든 생명을 사랑으로 인도하신다는 주님이 누구에겐 천국의 길을 예비하시고 누구에겐 지옥이나 연옥의 길을 예비하셨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있는 일일까.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지옥 자체가 논리적이지 않으므로 이런 책을 읽을 때는 그런 관점을 배제하기로 하겠다.
백번 양보해서 유다의 경우를 배신으로 볼 수 있어서 기독교 입장에서 가장 괘씸한 배신자가 예수를 직접 배신한 유다라고 인정해보자. 그럼 예수를 세 번 부정한 베드로는 왜 봐주는 것인가. 왜 베드로는 여전히 천국의 열쇠지기로 추앙받고 있는 것인가. 단테의 나머지 두 죄인은 그 유명한 ‘브루투스 너마저’ 일화에 등장하는 인물들로 카이사르를 배신한 죄로 이곳에 끌려와서 유다와 함께 루시퍼에게 질겅질겅 씹히고 있다. 이들 대신에 베드로가 씹히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꼭 베드로가 아니더라도 신곡 지옥편에 등장하는 여러 교황들은 신을 가장 최측근에서 섬기다가 그 뜻을 직접 배신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인간 카이사르를 배신한 죄보다는 이들의 죄가 더 큰 것 아닌가. 기껏 모세를 시켜 이집트에서 구원시켜줬더니 틈만 나면 불평하거나 우상을 만들어 섬기면서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배신했던 유대 족속들은 왜 안 씹히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자꾸 머리에 떠올라서 책에 몰입하는 게 상당히 어려웠다.
내 배경 지식이 부족해서 몰입할 수가 없다. 등장하는 인물이나 표현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워서 계속 주석을 참고하며 왔다 갔다 읽다 보니 흐름이 너무 자주 끊겼다. 단테의 신곡을 주석 없이 이해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이건 내 무지의 소치로소이다.
단테가 창조한 지옥은 내려갈수록 형벌의 강도가 점점 더 강해져야 할 것 같은 설정인데 형벌 묘사를 읽다 보면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지옥 초입부터 형벌이라면서 가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수반될 것 같은 고문들을 등장시키는 바람에 아래로 내려가면서 강도를 더 높이는 게 불가능할 것 같긴 했다.
신곡 지옥편은 별로 두껍지 않은 책이다. 일반적인 소설책의 두께인데 앞서 언급한 여러 이유로 쉽게 몰입하지 못해서 진도가 너무 안 나가고 있다. 지옥편 하나 읽는데 족히 2주는 걸린 것 같다. 무신론자로 알려진 노벨 문학상 수상 시인 사뮈엘 베케트도 신곡을 애독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내가 기독교를 믿지 않거나 종교가 없어서 책에 몰입하지 못하는 것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사실 베케트가 쓴 ‘고도를 기다리며’도 읽고 나서 이게 뭔가 싶었으니 이들의 취향과 내 취향이 맞지 않는 건가. 그러기엔 또 ‘그리스인 조르바’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아주 재밌게 읽었는데. 잘 모르겠다. 잘 몰라서 독서록도 횡설수설인 것 같다. 아무튼 일단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명작이라고 치켜세우는 작품이니 천국편까지 전부 읽어보긴 할 작정이다. 덕분에 오래간만에 고행이라고 느껴질 만한 독서를 하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