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comedia diDante ...- Purgatorio
내가 잠시 몸 담았던 개신교에는 연옥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죄를 지었으면 지옥에 가고 아니면 천국에 가는 거지 그 중간은 없었다. 위키에 따르면 연옥이란 가톨릭에서 설정한 사후 세계로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남은 죄를 씻기 위해 ‘잠벌’을 받는 공간이다. 여기서 잠벌이라는 생소한 용어가 나오는데 이 역시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지옥에서 영원히 받는 영벌과 구분해 이 세상이나 연옥에서 잠시 받는 벌이란 뜻으로 사용한다.
이런 중간 공간의 개념은 기독교 발생 이전부터 동서양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났다고 하는데 가톨릭에서 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본격적으로 발달시킨 것은 13세기부터라고 한다(단테가 13세기 사람이다). 이후 16세기에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연옥에 관한 교령’이 공표되며 가톨릭 교리의 핵심이 되는데 당시 가톨릭이 종교 개혁이라는 위기를 맞아 신교와는 다른 구교만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내부 체제와 교리를 정비하기 위해 사용했던 주요 신앙 개념이라고 한다.
참고로 개신교에서는 연옥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그 근거로 성서에 연옥이라는 단어나 개념이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들고 있다. 반면, 가톨릭에서는 구약의 마카베오 하권(개신교 성경에는 없다)과 신약의 루가복음(개신교에서는 누가복음), 고린도전서, 마태오복음(개신교에서는 마태복음) 등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면 연옥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연옥의 핵심 개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지옥과는 달리 처벌에 기한이 있어서 언젠가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아직 이승에 남아 있는 누군가의 정성 어린 기도가 연옥의 처벌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마치 탄원서를 받아주는 교도소 같다고 할까. 단테의 신곡 연옥편에서도 아내의 기도에 힘입어 처벌을 감면받는 사람이 등장한다. 같은 죄를 저질러도 생전에 인기가 많아서 기도를 많이 받는 사람은 처벌을 덜 받을 수 있다는 것인데 참 기가 막힌 논리가 아닐 수 없다. 하느님이 ‘여어. 자네에 대한 기도가 많이 들려오고 있어. 인맥 관리를 아주 잘하셨구먼. 그럼 또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자네 벌을 좀 깎아주겠네.’라고 하나보다.
누가 지옥도 천국도 아닌 연옥으로 가는 것일까.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세상을 떠났으나 세상에서 지은 경죄나 용서받은 사죄(死罪)에 대한 잠벌을 미처 보속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지옥에 가지는 않지만 천국에도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연옥으로 가서 일정 기간 동안 잠벌을 받는다고 한다. 여기서 하느님의 은총 속에 있다는 것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역시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세례를 받으면 모든 죄, 곧 원죄(아담이 이브랑 선악과 따먹고 대대로 물려준 죄)와 본죄(원죄 외의 모든 죄), 그리고 모든 죄벌까지도 용서받게 되는데 여기서 원죄는 세례 외에는 용서받을 방법이 없으므로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세례를 받지 않았다면 지옥으로 간다. 또한 회개하며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사람이기 때문에 살면서 또 죄를 지을 수 있는데 그때 지은 죄가 소죄가 아닌 대죄라면 고해성사를 통해서 다시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지옥으로 떨어진다.
참고로 가톨릭에서 말하는 소죄와 대죄에 관해서는 나무위키 - 대죄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법적으로 금지한 대부분의 사항은 대죄에 속하며 이에 더해 종교적 관점에서 중죄라고 할 수 있는 우상 숭배나 신성 모독, 헌금을 하지 않는 죄도 대죄에 속한다. 여기에 상대방이 불쾌감을 느낄 정도의 지나친 농담이나 동성애, 피임, 낙태, 자위행위 등도 포함돼 있으며 특이하게도 정당한 국가의 권위에 악의적으로 따르지 않는 경우나 가톨릭 윤리에 반하는 정책에 지지의사를 표하거나, 투표하거나, 해당 정책을 펴는 정당을 지지하는 것(교황청 신앙교리성에서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직접 금지시킴)도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민주당에서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민주당에 투표하면 대죄를 저지르는 것이 된다.
종합해보면, 세레를 받고 난 뒤 죄를 저질렀는데 그 죄가 소죄고 고해성사를 하지 않았다면 연옥으로 가서 상응하는 벌을 받는다. 만약 저지른 죄가 대죄라면 꼭 고해성사를 해야하며, 고해성사를 하고 난 뒤에 저지른 죄에 상응하는 잠벌(기도나 선행, 고행)을 이승에서 다 받지 않았다면 연옥으로 가서 이어서 받는다.
단테는 지옥편에서 보여줬던 뛰어난 상상력을 다시 한 번 발휘해 자신만의 연옥을 장대한 시로 창조해냈다. 단테가 그린 연옥은 둥근 피라미드 형태로 위로 솟아오른 산이다. 총 7단계로 구성되며 지옥과 마찬가지로 각 단계는 각 죄목과 대응한다. 아래서부터 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색욕의 죄를 저지른 죄인들이 각자의 죄에 맞는 벌을 받고 있다. 연옥의 가장 위에는 기독교의 지상 낙원인 에덴 동산이 자리 잡고 있다. 연옥에서 필요한 벌을 모두 받은 죄인은 천국으로 올라가기 전에 에덴 동산에서 대기한다. 연옥의 가장 아래에는 연옥으로 입장하는 문이 있고 단테가 설정한 문지기(우티카의 카토)가 입구를 지키고 있다. 연옥문 밖에는 연옥행이 결정됐지만 아직 연옥에 들어서지 못한 죄인들이 입장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연옥문 밖 죄인들은 생전에 자신이 참회하기 전까지 살았던 시간만큼 연옥문 밖에서 대기해야 한다. 특이한 점은, 지옥보다는 덜하지만 연옥의 처벌도 불에 태우거나 철사로 눈을 꿰매는 등 상당히 잔인한 편인데 밖에서 기다리는 죄인들은 그저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벌을 받고 있지는 않는다. 물론 작중에서 이들은 하느님이 계신 천국에 하루 빨리 가길 원하는 사람들이라 기다리는 것 자체로 벌의 의미가 있긴 하다.
단테는 이 연옥을 남반구에 있는 유일한 육지로 묘사하고 있으며 당시 기독교에서 세상의 중심으로 여겼던 예루살렘의 정반대에 위치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지옥편에서 점점 지하로 파고 들어가 가장 아래에서 죄인 세 명을 씹어먹고 있던 루시퍼를 거쳐 지구 정반대로 뚫고 나온 곳에 연옥이 있는 것이다.
지옥편에서 단지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라는 이유로 지옥에 처넣어놓고 신나게 조롱했던 단테는 연옥편에서도 역시나 자기 마음대로 연옥에 사람들을 넣어 놓았다. 객관적인 기준을 세우려고 노력한 것 같지도 않다. 일례로 연옥 문지기로 설정한 우티카의 카토는 자살의 죄를 저지른 사람인데 자살한 다른 죄인들은 지옥에서 벌을 받고 있는 반면 이 시인은 똑같은 죄를 저지르고도 위풍당당하게 연옥 문지기로 취업했다. 참고로 그는 카이사르에 반대해 폼페이의 편에 섰다가 폼페이가 패하자 카이사르에 따르느니 그냥 자살해 버린 사람이다.
그 외 단테가 생각하기에 포도주를 좀 많이 마셨거나 식탐이 좀 있었던 사람들이 이곳에서 벌을 받고 있는데 하이라이트는 연옥의 마지막 7 단계에서 색욕의 죄를 지었다고 벌을 받고 있는 죄인들이다. 지옥편 마지막 단계에서 카이사르를 배신했던 브루투스와 롱기누스가 루시퍼에게 잘근잘근 씹히며 대미를 장식했던 것처럼 이곳에서는 카이사르를 ‘여왕’이라고 불렀던 자들이 연옥의 마지막 단계에서 불 속에서 타는 벌을 받고 있다.
여기서 카이사르를 여왕이라고 불렀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로마의 경우 개선식을 진행할 때 개선식을 하는 장군이 오만해지지 않도록 하루 동안은 개선장군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야유나 조소를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로마는 아주 멋진 제도를 두고 있었다!). 카이사르 역시 피할 수 없었는데 그때 주로 받은 조롱이 ‘대머리 호색한 동성애자’라고 한다(참고로 로마나 그리스에서는 동성애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래는 관련해서 책 주석에 적힌 내용이다.
‘카이사르가 비타니아의 왕 니코메데스와 관계를 가졌다는 소문에 개선 행진 중 누군가 ‘여왕이여!’라고 외치며 놀렸다. 카이사르는 ‘자서전’에서 이런 성적 관계가 낳은 악명과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길게 쓰고 있다.’
종합해보면, 기독교에서 죄로 규정한 동성애의 죄악을 저지른 장본인은 바로 카이사르인데 단테는 그런 카이사르 대신 카이사르를 ‘여왕’이라고 조롱한 사람들을 색욕의 죄를 처벌하는 곳에 배치해 놓은 것이다. 조롱한 사람들을 조롱한 죄(상대방이 불쾌감을 느낄 정도의 지나친 농담)도 아닌 색욕의 죄를 처벌받는 곳에 놓았다는 점은 이해할 수 없는 점이다. 덤으로 지옥편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를 아래와 같이 ‘가장 큰 죄를 지은 자’로 설정해 언급하기도 한다. 24곡의 일부를 살펴보자.
“마음을 굳게 먹게! 가장 큰 죄를 지은 자가
짐승의 꼬리에 매달린 채 결코 죄를
용서하지 않는 깊은 바닥으로 끌려가는 것이 보이네.
짐승은 걸음마다 속도를 더하다가
어느 때인가 갑자기 그를 차 버리고
육신을 끔찍하게 짓밟아 놓았지.
저 하늘들이,” 하고 포레세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주석
포레세의 형제인 코르소 도나티를 가리킨다. 그는 피렌체 흑당의 수장이었는데, 보니파키우스 8세를 설득하여 샤를 발루아 왕을 피렌체로 불러들였다. 단테를 피렌체에서 추방하는 데 일조한 그는 피렌체에 대해 더 강한 지배권을 확보하려다가 정적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기에 이르고 도망치다가 살해되었다.
단테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어느 시대의 누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그런데 그 문제의 원인이 전지전능한 세상의 창조주이며 사랑과 자비까지 넘치지만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신이 아니라 무능한 통치자의 잘못된 통치라고 보고 있다. 아래 16곡의 내용을 살펴보자. 조금 길지만 기독교에서 불행한 세상의 원인을 하느님이 아닌 인간으로 돌리는 주요 논리를 알 수 있다.
세상은 사실, 당신도 방금 말했지만,
미덕은 싹이 말라 버려 황량하기 그지없고
사악함으로 뒤덮여 더욱 무성해지고 있소.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이오? 내가 사람들에게
진실을 가르쳐 줄 수 있도록 설명 좀 해 보시오.
누구는 하늘에, 누구는 땅에 있다고도 합니다만.”
그는 고통스러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형제여, 세상은 눈이 멀었소.
당신이 살던 세상은 분명 눈이 멀었소!
사람들은 모든 것이 어떤 예정된 계획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모든 원인을 하늘에 돌리려고 하오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당신들의 자유의지는
없어질 것이며, 선에 대한 기쁨도
악에 대한 슬픔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오.
하늘이 사람들의 행동을 주관하시지만,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것은 아니오. 모두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릇된 것과 옳은 것을 구분하는
스스로의 빛을 지니고 있소. 자유의지는,
처음에는 하늘과의 갈등으로 상처를 입고 약해졌지만,
잘 키우기만 하면 모든 장애를 극복할 수 있소.
인간들은 더 위대한 힘을 가진 자유로운 주체들이오.
사람들의 마음을 창조한 더 고귀한 성품에 속해 있지요.
하늘도 이것을 넘어서서 통제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세상이 어지럽다고 해도
원인은 사람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오!
이제 그 점을 잘 설명해 주겠소.
하느님은 사람들을 만들기 전에도 그들을 사랑하셨고
사람들은 그분의 자애로운 손에서 마치
웃고 울며 재롱을 피우는 어린애처럼 생겨 나왔다오.
그 단순한 영혼, 아무것도 모르는 영혼은
창조주의 기쁨에서 솟아올랐기에
그와 닮은 어떤 것으로 돌아갈 것이오.
처음에 영혼은 하찮은 장난감에 이끌리는데,
길잡이나 재갈이 그 욕망을 바꾸지 않는다면
장난감에 속아 그 뒤를 따라다닐 거요.
따라서 사람들은 법률의 구속을 필요로 하며
적어도 진정한 도시의 탑을 구별할 수 있는
통치자가 필요한 것이지요.
진정, 법은 있소. 그런데 누가 법을 지키고 있소?
아무도 없소. 앞에서 이끄는 목자는
되씹기는 하지만 갈라진 발굽은 가지지 못했소.
사람들은 저들의 목자가 저들도 탐을 내는
속세적인 재화를 탐하며 그것을
먹고 사는 것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아시다시피 세상을 혼란하게 했던 원인은
사람들의 썩어 빠진 본성이 아니라
잘못된 통치였소.
자유의지는 단테의 시대뿐 아니라 요즘 교회에서도 종종 써먹는 논리다. 사람들의 행동을 주관하지만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좀만 생각해보면 잘 되면 내 탓을 할 것이고 잘 안 되면 네 탓을 할 것이라는 예고일 뿐이다.
아래 6곡의 일부와 주석을 통해 단테는 강력한 군주가 이끄는 제국을 선망하고 있으며 그런 군주가 임해야 자신이 살고 있는 이탈리아가 번영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대의 도시 로마를 보라! 자식을 잃고
홀로 되어 밤낮으로 울면서 ‘나의 카이사르!
왜 나를 버렸는가?’라고 부르짖지 않는가!
주석
단테는 ‘제정론’에서 ‘인류는 군주 밑에서 단결하여야 완전히 자유로워진다.’고 말했다. ‘비천한 이탈리아’는 따라서 제국이 선도하지 않는, 봉건 전제군주와 난립하는 귀족들의 내분으로 생겨났다는 것이 단테의 분석이다.’
단테에게 저승 관광 패키지를 선물한 장본인인 베아트리체가 연옥편 막바지, 에덴 동산에서 마치 예수가 재림하는 것 같은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29곡
그렇게도 장대하고 아름다운 하늘 아래
스물네 명의 노인들이 백합꽃을
머리에 두르고 둘씩 짝을 지어 걸어오고 있었다.
…
별들의 무리가 다른 별들에 겹쳐 하늘
높은 곳에서 빛을 발하듯이, 그들에 이어
푸른 잎을 머리에 두른 네 마리의 짐승이 뒤를 따랐다.
짐승들은 제각기 여섯 개의 날개를 달고 있었는데,
날개의 깃털은 온통 눈들로 덮여 있었다.
아르고스의 눈들이 살아 있다면 그럴까.
독자여. 이들을 묘사하느라 더 말을
소비하지 않겠다. 다른 필요가 있을 터이니
여기서는 내 말을 아껴 두어야 한다.
하지만 ‘에제키엘’을 읽어 보라. 에제키엘은
바람과 구름과 불과 더불어
추운 곳에서 온 그들을 본 대로 적었다.
30곡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하얀 너울 위에
지옥편에서부터 인물이나 국가를 묘사할 때 비유와 상징을 즐겨 사용했던 단테는 베아트리체가 등장한 이후로 그런 성향을 마음껏 폭발시킨다. 마치 요한 계시록처럼 글 속에 온갖 상징이 난무해서 주석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33곡
전차에 깃털을 떨구고 괴물이 되게 하고
나중에는 먹이가 되게 한 독수리는
언제까지 후손이 없지는 않을 거예요.
내가 분명히 보기 때문에 말하노니,
그 무엇도 가로막지 못하는 별들이 이미
가까이 와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려 한다오.
그때 하느님께서 보내신 오백과 열과 다섯이
도둑 논다니와, 그와 더불어 죄지은
거인을 함께 죽일 거예요.
주석
독수리는 로마제국이다. 단테는 페데리코 2세를 카이사르의 마지막 후계자라 생각했다. 그가 1250년에 죽은 뒤로 로마제국은 안녕과 질서를 되찾을 강력한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단테의 생각이었다.
사람 이름을 숫자로 표시하는 예는 고대 히브리 카발라에서 발견되며, 13세기에서 14세기 유럽에서 유행하여 단테의 다른 저작에도 나타난다. 여기서 ‘515’는 로마 숫자로 DXV에 해당하며, 나중 두 글자 순서를 바꾸면 DVX, 즉 지도자라는 뜻이 된다. 단테는 1310년 이탈리아에 내려온 하인리히 7세를 가리켰던 것 같다.
베아트리체는 위대한 성인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해 단테를 나무라기도 하고 가르침과 예언의 말을 쏟아내기도 하지만 그녀가 생전에 어떤 업적을 이루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그저 단테가 사랑했던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고 위대한 성인의 역할을 맡긴 이유는 그게 다인 것 같다.
베아트리체는 아래 31곡에 나오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전 육체를 완전한 아름다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단테가 호의를 갖고 책 속에 등장시키는 인물들은 대체적으로 단호하면서 다소 오만한 성격을 갖고 있는 것 같다.
31곡
그대는 자연에서든 예술에서든 내가 전에 들어 있던,
그러나 지금은 땅 속에 흩어져 있는
육신과 같은 아름다움을 본 적이 없을 거예요.
그 완전한 아름다움이 내가 세상을 떠나며
그대를 버렸다고 해도, 다른 어떤 살아 있는 것이
그대의 욕망을 꾀어냈단 말인가요?
처음에 현혹의 화살에 찔린 것을 느꼈을 때
그대는 일어나서, 나의 뒤를 따라야만 했어요.
나는 전혀 그러하지 않았으니,
어떤 예쁘장한 계집아이나 어떤 새로운 헛된 것의
또 다른 화살을 기다리느라고
그대의 날개를 꺾지 말았어야 했어요.
지옥편에서도 그랬고, 연옥편을 읽으면서도 자꾸 종교의 섬뜩한 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래는 작중 단테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부분이다.
11곡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무량하게 위에서 처음 내리신 사랑보다
더한 사랑을 베푸셨으니,
당신의 부드러운 숨결에 감사하도록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힘이
온갖 피조물에 의해 찬미받으리이다.
끔찍한 벌을 받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도 그런 벌을 내린 주체를 향해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었다느니 자비롭다느니 혹은 부드러운 숨결에 감사하다는 말을 뱉는다. 얼마 전에 유명한 배우가 가스라이팅으로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신이야 말로 가스라이팅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렇지 않게 죽여버리고 그렇게 죽은 사람들을 지옥이나 연옥으로 보내 극도로 잔인한 벌을 받게 하면서도 끊임없이 자기를 칭송하게 만들었다. 10곡 주석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성궤’는 야훼가 모세에게 만들도록 한 것으로(출애굽기 24-25장) 이를 다윗이 옮기던 중 지휘관들 중 하나가 궤가 떨어지려 하는 것을 보고 손으로 붙잡았다가 번개에 맞아 죽었다. 야훼의 궤는 사제들만이 만질 수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궤가 떨어지려는 것을 선의로 붙잡은 사람인데 사제가 아닌 사람이 자신의 궤를 만졌다고 냅다 번개로 죽여버렸다. 그야말로 사이코패스 아닌가. 소름 끼치는 것은 그런 존재를 단테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 소망 사랑의 신으로 떠받들며 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책에 나오는 다른 신화 속의 신들도 제멋대로인 측면에서는 뒤지지 않는다. 신곡에는 그리스나 로마 신화에서 신보다 자신이 낫다고 오만을 부리다가 신에게 죽임을 당하고 지옥이나 연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신화 속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이들이 저지른 죄는 자신이 신보다 애를 더 많이 낳았다거나 베를 더 잘 짠다고 자랑한 것이다. 자랑질과 살인, 어느 죄가 더 커 보이는가. 진정 지옥에 들어가야 할 존재는 오만한 인간인가 살생한 신인가.
물론 현대 사회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로 생각할 뿐이다. 문제는 기독교나 이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 신화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지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옥편보다는 연옥편이 좀 더 읽을만했다. 지리나 시간을 천문학적으로 설명하는 장면은 여전히 매력적이었고, 열정적으로 군주제를 옹호하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생명의 탄생이나 사랑이 형성되는 과정을 시로 그려낸 장면은 순간적으로 몰입해서 읽을 정도로 재밌었다. 단테가 작중에서 항구로 묘사한 지역이 현재는 바다가 물러나면서 내륙 지역이 됐다는 사실도 인상적이었다. 이 작품은 항구가 내륙 지역으로 변할 정도로 오랜 세월 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것이다.
단테의 신곡 시리즈는 시립 도서관에서 지옥, 연옥, 천국편 세 권을 한 번에 빌려서 보기 시작했는데 반납을 일주일 연장하고도 결국 기간 내에 다 보지 못하고 연체해 버렸다. 천국편은 펴보지도 못하고 반납했는데 다시 빌릴까 하다가 계속 쫓기듯 독서하는 게 싫어서 천국편만 중고로 하나 구입했다. 이제 한 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