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comedia di Dante Alighieri - Paradiso
지옥편과 연옥편을 넘어 드디어 천국편까지 왔다. 단테가 그려낸 천국의 모습은 내가 생각한 천국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창조주에게 사랑받는 피조물로서 영원히 창조주를 찬양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바로 단테의 천국이다. 사실 피조물‘로서’가 아니라 ‘로써’인 것 같기도 하다. 단테가 천국에 등장시킨 여러 피조물의 모습과 대사를 보면 그들이 담당하는 역할은 창조주를 찬양하는 수단과 도구의 역할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의 천국에서 모든 피조물은 설사 그게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라고 할지라도 오직 유일한(이라고 말하기엔 또 삼위일체라는 개념 하에 이름도 세 개가 있고 가끔 셋이 따로 움직이는 것 같긴 하지만…) 창조주를 찬양하기 위해서만 존재하고, 실제로 그렇게만 행동한다. 이런 방식의 천국에 공감하려면 단테만큼이나 신실한 신앙이 필요할 것 같다.
땅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며 지옥을 탐방하고, 파고들던 방향 그대로 지구 반대편으로 뚫고 나와 산처럼 솟아있던 연옥에 올랐던 단테는, 그의 뮤즈인 베아트리체의 인도를 따라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하늘에 자리한 단테의 천국은 총 11개의 공간으로 나눠지며 모두 이름 뒤에 하늘이란 뜻의 천(天)이 붙는다. 지구와 달 사이의 경로인 화염천을 시작으로 지구에서 점점 멀어지며 월성천, 수성천, 금성천, 태양천, 화성천, 목성천, 토성천, 항성천, 원동천을 거쳐 하느님이 머물고 있는 지고천이 자리한다.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단테는 태양계 천체를 기반으로 천국이란 공간을 설계했는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태양계의 배치와는 조금 다르다. 책을 읽으면서 단테가 어떤 특별한 의도를 갖고 순서를 바꿔 배치한 것인지 궁금해했는데 그런 건 아니었고 내 배경지식이 부족한 것이었다. NAVER에서 퍼온 아래 그림을 보자.
그림 1. 천동설에 의한 천구의 운동을 설명하는 그림 (Bartolomeu Velho, 1568 (Bibliothèque Nationale, Paris)).
단테가 살던 시대에 유럽에서는 천동설을 믿고 있었다. 이에 따라 단테는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지구에서 시작해 달 -> 수성 -> 금성 -> 태양 -> 화성 -> 목성 -> 토성 -> 천구에 고정된 별들 -> 가장 바깥에서 움직이는 천구의 순서로 천체가 배치되어 있다고 믿고 있었다. 각 별 이름 뒤에 하늘이 붙은 이유도 정말 각각의 하늘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책을 다 읽고 나서 알게 된 게 조금 아쉽다. 단테가 천동설의 시대에 살았다는 것을 미리 알았으면 그에 맞춰 글을 읽으면서 좀 더 책 내용에 몰입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이와 같이 공간이 우주로 확장되며 배경은 많이 달라졌지만, 구조 자체는 지옥이나 연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천국 역시 단계별로 구성돼 있고 생전의 업적에 따라 자신의 자리가 정해지며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지옥에서 죄가 중할수록 더 깊은 지옥에 배치됐다면 천국에서는 생전에 달성한 신앙의 업적이 클수록 하느님과 가까운 곳에 배치돼 그분을 가까이서 모실 수 있다. 즉, 지구에서 멀어질수록 더욱 높은 단계의 천국인 것이다.
영 불공정해 보이는 자리 배치는 천국편에서도 여전하다. 단테와 정치적 입장 혹은 종교적 관점이 같았던 사람들이 대거 천국에 등장하는데 여호수아나 샤를 마뉴와 같이 기독교 입장에서는 영웅이지만 아랍과 같이 다른 종교인의 입장에선 학살자나 인종 청소자라고 부를만한 인물들도 대거 등장한다. 아래는 ‘만들어진 신’에 나온 여호수아에 대한 설명이다.
모세 시대에 시작된 인종 청소는 ‘여호수아서’에서 피비린내 나는 결실을 맺는다. ‘여호수아서’는 집단 학살과 그것을 부추기는 이방인 혐오증이 가득하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하지만 이번에도 신학자들은 항변할 것이다. … 실제로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점은 그것이 아니다. 요점은 사실이든 아니든 성경이 우리의 도덕적 원천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예리코를 파괴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약속의 땅을 침략하는 과정을 담은 성경의 이야기는 히틀러의 폴란드 침략, 사담 후세인의 쿠르드족과 습지 아랍인 대량 학살과 도덕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 성경이 인상적이고 시적인 소설 작품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당신의 자식들에게 도덕을 함양하라고 줄 만한 책은 아니다.
인물 배치도 배치였지만, 지옥이나 연옥에서 죄의 경중에 따라 다른 벌을 받는 것은 그렇다 쳐도 천국마저 단계별로 존재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차등 대우가 존재하는 곳이 과연 기쁨과 행복만이 가득한 ‘천국’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의식했는지 작중 단테도 아랫 단계 천국을 방문하며 그곳에 배정받은 인물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지는데 그 인물은 자신의 업적에는 이곳이 어울리며 아무 불만도 없고 자신은 오로지 기쁨으로 가득 차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을 뿐이라는 식으로 대답한다. 그들의 천국이 모두가 같은 장소에서 서로 사랑해 마지않는 창조주와 함께 빙 둘러앉아 활짝 웃는 얼굴로 회포를 푸는 자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옥편과 연옥편에 이어 천국편에서도 신화와 국제 정세에 밝고 정치적 혹은 종교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을 많이 알고 있는 단테의 해박한 지식이 돋보인다. 끊임없이 신화 속 혹은 당대 인물의 이미지를 차용해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해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얘기를 풀어내는데 정말 그 끝이 어디일까 궁금해질 정도로 대단하다. 다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많이 다른 옛 천문학 지식을 이용한 단락의 힘은 좀 떨어진다. 특히 1곡에서 달의 크레이터를 설명하는 부분이 영 별로였는데 지금 기준으로는 틀린 사실을 모든 것을 꿰뚫어 보며 단테를 인도하는 설정으로 나오는 베아트리체의 입을 빌려 가르치는 어투로 표현하는 바람에 몰입이 어려웠던 것 같다. 물론 별자리나 행성의 움직임을 이용한 시간 표현은 여전히 예스러운 멋이 살아있었다.
오래전에 방영된 ‘쩐의 전쟁’이라는 드라마에서 신동욱이라는 배우가 했던 대사인데…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려나 싶다. 원래 대사는 ‘누구나 가슴에 상처 하나쯤은 있는 거예요’였는데 당시 배우의 발음이 좋지 않았던 탓에 많은 사람들에게 저렇게 들리는 바람에 큰 화제가 됐었다.
단테의 가슴에는 베아트리체라는 큰 상처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루지 못한 탓에 영원히 가슴에 상처로 남아 완벽하고 이상적인 여성으로 발전해 버린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을 단테는 위대한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사실 신곡을 읽으면서 가장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가 베아트리체다. 딱히 이렇다 할 업적도 없는 인물을 솔로몬이나 다윗은 물론 예수의 직계 제자인 베드로나 요한보다도 높은 천국에 배치해 놓고 위대한 성인인양 단테를 인도하는 역할로 등장시키는 바람에 작품의 논리적 매력이 많이 반감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감성적인 측면에서는 단테를 이해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는 결국 이루지 못하고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을 자신의 작품에라도 등장시키고 싶었던 작가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단테는 자신이 창조한 가상 세계에서 자신의 사랑을 결국 실현해 낸다. 아주 고매하고 고상한 방식으로.
여담으로, 이 작품을 읽으면서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잊지 못해 평생 혼자 살면서 이런 작품을 남긴 것인가, 추측했었는데 그는 무려 아내가 있었다. 나에게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관련해서 위키에는 이런 내용이 올라와 있다.
단테는 자신의 아내가 아닌, 한 번도 소유하지 못하고 끝나버린 한 여성에 대한 불타는 사랑을 원동력으로 삼아 《신곡》에 뒤지지 않는 유명한 연애시도 썼다. 단테는 자신의 부인에 대해서는 자신의 시 속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결혼생활의 사랑은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내 마음의 여주인"인 베아트리체를 로맨틱한 열정을 기울여서, 또한 그녀의 죽음까지도 초월하여 정열적으로 사랑했다. 찬양받아 마땅한 여성, 천국과 같이 해맑은 그녀는 살아생전에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나, 사후에는 하늘에 올라가게 되었고 동정녀 마리아와 견주어졌다.
단테는 신곡을 1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완성시켰다. 단테의 아내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다른 여자를 가슴에 품고 이런 장대한 작품을 쓰고 있는 남편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사실을 알 수는 없지만, 단테가 그런 마음가짐이었다면 둘의 결혼 생활이야말로 단테와 그의 아내에게는 그야말로 지옥이었을 것이다.
작품 해설에 이런 내용도 나온다.
단테가 ‘코메디아’를 당시의 공식 언어였던 라틴어가 아니라 지방 속어들 중 하나인 피렌체어로 썼다는 점은 큰 의미를 지닌다. ‘속어론’에서 단테는 문학 언어로서 속어가 라틴어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언어는 단테의 사랑의 대상이자 터였다. 그는 피렌체 어가 몸에 밴 피렌체 작가였다. 라틴어가 학문과 문화를 지배하던 시절에서 그의 주장은 파격적이었고 그의 실천은 능력을 좀먹는 아쉬운 것으로 비쳤다. 그러나 피렌체의 언어가 그를 보편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밴 고전 시인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코메디아’가 나온 이래 이탈리아 사람들은 굳이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을 찾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속어를 채택함으로써 ‘코메디아’는 일상을 살아가는 일반 독자의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속어는 독자의 수준에 맞추어졌던 것이기에 독자와의 대화를 통해 도덕의식을 환기하는 효과를 낳았다. 또 ‘코메디아’와 함께 이탈리아의 ‘국어’는 순식간에 확립되었고, 이후 근간은 바뀌지 않았다. 이 놀라운 사건의 한가운데에는 보편적 인간에 대한 작가의 경건한 성찰과 재현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구원의 의미를 자신의 당대 현실에서 추구하는, 역사의식을 지닌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것이 단테가 추구한 구원의 실질적 의미일 것이다.
해설이 아니었다면 이런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역시 나같이 배경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주석과 해설을 꼭 함께 읽어야 한다. 신곡이 한 나라의 국어를 확립시킨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라는 작품과 작가 단테에 대한 마음속 평가가 많이 달라졌다.
역시 작품 해설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새로운 문학을 세워 나가던 곳이었고, 베아트리체의 영원한 사랑을 만난 곳이자 냉혹한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이상을 실천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피렌체는 또한 거역의 장소였다. 단테는 피렌체의 정의와 번영을 위해 목소리를 내다가 추방당했고 일생 동안 명예로운 귀환을 요청받지 못했다. ‘코메디아’는 피렌체에 대한 단테의 사랑과 분노, 그리고 거기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사실상 ‘코메디아’는 13세기와 14세기의 피렌체의 역사이며, 그와 함께한 단테 자신의 체험과 기억에 관한 책이다.
…
‘코메디아’를 떠받치는 형식과 구조는 놀랍도록 치밀하고 웅장한 건축물을 상기시킨다. ‘코메디아’는 ‘지옥편’과 ‘연옥편’, ‘천국편’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서사시다. 각각 서른 세 편의 독립된 곡(canto)으로 구성되며, ‘지옥편’에는 서곡이 추가되어 모두 100곡을 이룬다. 곡 하나하나는 대체로 140행 안팎에 달하며, 모든 행은 11음절로 구성되고 전체 14,233행에 이른다. 각운이 꺽쇠가 엇갈리듯 짜인 삼연체 형식은 아쉽게도 번역에서 도저히 살릴 수 없지만, 그 효과는 단순한 형식적 기교를 넘어선다. 그것은 각운으로 반복되는 음과 율동을 통해 이미지와 개념의 연쇄를 보장하고 단테가 제시하는 세계의 완전성을 받쳐 준다. ‘코메디아’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 이탈리아어를 따로 배웠던 수많은 시인들은 바로 오묘하게 자인 리듬과 강세에 저들의 몸을 적시고자 했던 것이다.
내가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칭송하는 이 책에 깊이 공감하지 못한 건 아는 이탈리아어라고는 ‘본 조르노’와 ‘그라찌에’가 전부이고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에 그리 밝지 못하면서 기독교에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이탈리아인이었다면 작품 해설에서 언급된 ‘각운이 꺽쇠가 엇갈리듯 짜인 삼연체 형식’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을 테고, 내가 아는 역사 속 인물이나 지명이 나올 때마다 묘한 희열을 느끼며 점점 더 신곡에 몰입할 수 있었을 것 같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와 한반도 역사 배우기에 급급했던 나에게는 끝까지 읽기 참 어려운 책이었다.
부디 단테와 그의 아내와 베아트리체가 각자의 사랑과 행복을 그들만의 'paradiso'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꼭 이뤘길 바라며 신곡 독서록을 마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