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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nugeun Jul 31. 2021

보라색 히비스커스, 독서록

“근데 언제 인간이 존엄성을 잃었어?”

 아버지의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한 나이지리아 소녀가 고모의 도움을 받아 오빠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가정 폭력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그린 책이다. 가정 폭력 가해자인 아버지를 포함해 책 속에 등장하는 많은 캐릭터가 복합적이고 입체적이며 다면적이라서 여러 사람에게 감정이 이입되며 동정을 느낌과 동시에 어느 한 인물에게도 온전히 동조할 수는 없었던 소설이었다.

 다루는 서사가 한 가정의 이야기를 넘어 그들의 국가와 그 국가에 영향을 미치는 서구 열강에까지 닿아 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쌓아 온 저마다의 사연을 한 아름씩 가슴에 품고 있어서 그들의 언행의 옳고 그름을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매 순간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가치관이 치열하게 대립하며 작가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끌고 갈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나이지리아인의 생활양식과 문화, 토속 음식에 대한 사실감 넘치는 묘사가 가득한데 이런 묘사가 심각한 줄거리를 읽는 와중에도 이국적인 풍경이 눈앞에 가득 떠오르게 만들며 묘한 미적 쾌감을 느끼게 해 주면서 책 읽는 재미를 더해 줬다.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줄거리 요약


하느님 아버지 유진

 소설 속 주인공의 아버지는 가난한 집 안에서 태어나 식품 기업을 세워 큰 성공을 거둔 자수성가형 기업가다. 성공을 거두고 난 뒤에도 끊임없이 신제품을 개발하며 회사의 발전에 힘쓰는 한편, 스스로 일군 재력을 바탕으로 조국을 민주화시키겠다는 큰 뜻을 품고 위험을 무릅쓰고 군부 정권에 반대 목소리를 내는 신문, <스탠더드>의 발행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소아 병원과 편부 가정, 내전에서 장애를 입은 퇴역 군인에게 익명으로 기부도 하고 있으며,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고향으로 가서 큰 잔치를 열어 가난한 고향 사람들에게 무료로 음식을 베풀고 돈을 나눠주기도 하는 대단한 인물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주인공의 아버지 유진은 정말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캐릭터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그의 가족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에서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캐릭터였다. 유진은 빈곤한 나라의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우연히 가톨릭 선교사와 인연이 닿아 인생의 방향이 크게 바뀐 인물이다. 선교사와의 인연으로 성공 가도에 들어설 수 있었던 그는 낙후된 자신의 조국이 발전하려면 서구의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물인데 예를 들어 언어는 영어를 써야 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받아들여야 하며 종교적으로는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생각에 기반해 그는 병적으로 이단과 이교도를 혐오하며 가족들에게 수도승과 같은 신앙생활을 요구한다. 어쩌다 가족이 자신이 세운 규율을 위반하면 가차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데 그 폭력의 수준이 어찌나 심각한지 묘사 수준으로만 따지면 소설 속에서 군부 정권에 반대하다 잡혀간 <스탠더드> 신문 편집자가 받는 고문보다 더한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유진이 목숨을 걸고 민주화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정작 가정에서는 마치 독재자와 같은 행보를 보이는 그의 모습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문득 설인종 고문치사 사건이 떠오르기도 했다.

 자신의 삶을 성공으로 이끈(이끌었다고 생각하는) 문화와 사상을 자신의 가정과 사회에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는 그의 의도 자체는 선하다고 할 수 있지만, 융통성 없이 거의 결벽증에 가까운 방식으로 시도하는 바람에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경제적 성공으로 거둔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지역 사회와 가정에서 거의 무소불위에 가까운 권력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만약 그가 권력을 잡아서 자신의 조국을 진정 자기가 꿈꾸는 모습대로 바꾼다고 했을 때 그 사회가 진정 민주주의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사회일지 의문이 생긴다. 관련해서 먼저 이 책을 읽고 추천해 주셨던 회사 선배의 독서록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잘하는 건 아직 통제력이 닿지 않기 때문일 걸. 그 사람이 지배자가 된다면 모두에게 가혹하게 할 거야.’

이 말에 크게 공감했다. 유진이 권력을 잡는다면 아마 그 사회는 무늬만 민주주의일 뿐 속내는 이슬람 근본주의 사회의 기독교 버전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그는 이맘이 될 것이다.


구원자 이페오마

 주인공 남매와 그의 어머니는 유진에게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진 상태로 등장한다. 그들은 너무나 오랜 시간 두려움에 떨고 산 탓에 그의 폭력에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한다.  아버지 혹은 남편의 폭력을 그저 무기력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이들의 삶이 바뀌게 된 건 아버지의 동생이자 주인공의 고모인 이페오마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아래는 주인공이 고모를 묘사한 부분인데 고모의 성격을 아주 잘 드러내는 부분이라 가져와 봤다.


이페오마 고모의 차가 우리 집 마당에 들어섰을 때 우리는 막 아침 식사를 끝낸 참이었다. 위층 식당에 불쑥 들어오는 고모를 보고 나는 당당한 조상을 상상했다. 집에서 만든 단지에 물을 떠 오기 위해 몇 킬로미터를 걷고, 아기들이 걷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키우고, 햇볕에 따뜻해진 숫돌에 간 대도로 전쟁에서 싸우는 조상님. 고모가 들어온 것만으로 방이 꽉 찼다.

 

나이지리아 국립대 교수로 일하고 있는 고모는 늘 주변 사람들이 떠받드는, 주인공에게는 마치 하느님과 같았던 아버지를 거리낌 없이 비판하며 주인공의 눈을 틔워주는 인물이다. 그녀의 자녀들 역시 정신적으로 아주 건강하게 잘 자라서 주인공에게 끊임없이 건강한 자극을 준다. 아래는 주인공이 고모의 자녀, 자신의 사촌을 평가한 말이다.


오비오라는 내가 열네 살 때 절대 될 수 없었고 지금도 여전히 되지 못한 무엇의 대담한 남성 버전이었다.

 

고모와 사촌은 캄빌리와 자자의 마음속에 인간의 존엄성의 회복이라는 화두를 심어준다. 이 화두는 수많은 난관 속에서도 결국엔 남매의 마음속에서 활짝 피어나고 이내 남매의 어머니의 마음속으로 옮겨가서 종국에는 이들이 아버지의 가정 폭력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준다.



소설을 읽고 나서


결말에 대해

 나는 좀 더 이상적인 결말을 예상했지만 소설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이 가련한 가족은 유진을 극복한다기보다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벗어나는 쪽을 택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완전히 벗어났다고도 할 수 없다. 유진에게서는 벗어났지만 유진이 남긴 유산으로부터는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말을 읽으며 이 가족을, 특히 이 어머니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고민됐다.


민주주의 투사이자 가정 폭력 가해자 유진, 구원자이자 도망자인 이페오마

 사실 주인공의 아버지는 가족의 입장에선 극악무도한 악당이었지만 민주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그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주인공의 구원자로 등장하는 이페오마 고모는 워킹맘이자 싱글맘으로 건강한 가정을 꾸려 나가면서 자신의 오빠에게는 거침없이 쓴소리를 내뱉는 정의의 사도였지만, 거대하고 강력한 군부 독재 정권 앞에서는 꼬리를 내리고 미국으로 도망쳐 버린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오빠에게는 강했지만 자신이 상대하기 어려운 적 앞에서는 도망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런 두 사람의 다면적인 모습은 여러 방면에서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런 점이 이 소설의 깊이를 더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주인공의 어머니를 보며 나 역시 깨끗하고 넓은 거처와 차고 넘치는 식탁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자신의 인권과 존엄성을 쉽게 포기하고 주위 환경과 사람에 굴종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돌아보기도 했고, 유진을 보면서 혹시 나도 내 아이들에게 너무 내 생각을 강요하며 강압적으로 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기도 했다. 이페오마와 그녀의 자녀들을 볼 때는 나도 저렇게 건강한 가정을 꾸려나가야겠다 싶다가도 조국을 등지는 선택을 볼 때는 과연 그 선택이 최선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고민해 보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 소설을 재밌게 읽었다면 페르세 폴리스라는 만화도 추천하고 싶다. 페르세 폴리스는 이란에서 태어난 저자가 급속도로 이슬람 근본주의에 물들어가는 조국을 온몸으로 경험하며 느꼈던 자신의 경험담을 엮어 낸 이야기다. 급변하는 나라에서 그만큼이나 급변하는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해 끊임없이 주변과 마찰을 빚는 한 소녀의 눈으로 바라본 그 당시 이란의 모습을 상당히 독특한 그림체로 어찌 보면 저자에게 부끄러운 이야기까지 가감 없이 담아냈다. 처음에는 회사 선배에게 빌려 읽었는데 읽고 나니 너무 감명 깊어서 소장하고 싶어 구입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보라색 히비스커스와 페르세 폴리스를 추천해 주신 분이 같은 분이다. 주변에 좋은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있다는 건 큰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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