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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nugeun Oct 02. 202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독서록

Muss es sein? Es muss sein!

 그저 제목만 듣고, 귀여운 강아지(아마도 카레닌)가 컬러풀하게 그려진 표지를 보고, 또 책 뒤표지에 적어 놓은 발췌 문구를 읽고 막연히 유추했던 내용과는 아주 다른 책이었다. 

 

“내게 돈은 중요하지 않아.”
“그러면 뭐가 중요하지?”
“사랑.”
“사랑이라고?”
“사랑은 전투야.
 나는 오랫동안 싸울 거야.
 끝까지.”

 난 이 책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라이트 노벨 같은 느낌의 사랑 얘기일 거라고 잘못 짐작했다. 군대에 있을 때 한창 탐독했던 귀여니 소설을 아주 잘 정제하고 다듬은 버전을 상상했던 것 같다. 요즘 내 감성은 그런 감성과는 워낙 동떨어져 있던 터라 그동안 서점 매대에서 몇 번을 마주쳤고 마주칠 때마다 꼭 한 번씩 표지에 눈길이 갔어도 선택하지는 않았다. 이 책을 선택한 건 아내였다. 아내가 집안으로 들여놓은 덕분에 컬러풀한 강아지가 더욱 자주 눈에 띄었고,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난 뒤에 결국 첫 장을 펼치게 되었다. 


 아이를 갖고 나서부터 종종 이런 순간이 찾아오는 것 같다. 갑자기 내 존재가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면서 마음이 한층 무거워지는 시기. ‘난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던가 ‘내 삶이 지금 이대로 이렇게 흘러가도 괜찮겠는가’와 같은 질문이 마음을 온통 물들이며 대책 없이 현실을 부정하고 모든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시기. 철학적이고 심오한 것 같으면서 사실 별로 쓸데없는 질문이 자꾸 머리를 점령하는 시기. 

 

 그때 이 책 제목이 떠올랐고, 표지의 무지개 강아지가 생각나며 지금이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책장을 펼쳤고, 펼치고 나니 기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서사가 펼쳐졌다. 의외의 서사에 당황할 새도 없이 굉장히 짧게 몰아치는 한 챕터, 한 챕터를 읽으면서 순식간에 책에 빠져들었다. 수시로 나타나서 독자에게 말을 걸어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저자는 이 책의 덤 같은 매력이다.


 읽다 보니 알 수 있었다. 책 뒤의 발췌 문구에서 포인트는 사랑이 아니라 전투였다. 저자는 전투 같은 사랑 얘기에 그에 못지않게 치열한 인물들의 인생사를 엮어 (심지어 실제로 탱크가 진격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전쟁 같은 책을 만들어 냈다.


 짧게 책 내용을 소개하자면, 소련의 침공으로 공산화되는 체코와 그 주변의 유럽(프랑스와 스위스 등)을 배경으로 여러 남녀가 서로 얽히고설킨 전투 같은 사랑을 주고받으며 전쟁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이렇게 써 놓으니 무거운 느낌이 드는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네 존재가 얼마나 가벼운지를 처절하게 느끼게 된다. 책 제목이 정말 찰떡이다. 정말 참을 수가 없다. 책을 읽으면서 그 가벼움을 참아내는 게 굉장히 슬프고 허무하고 어려웠다. 


 테레자, 토마시, 사비나, 프란츠, 마리 클로드. 그리고 화려하게 표지를 장식한 우리 카레닌까지.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생명은 하나 같이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로 그려진다. 여기서 ‘가볍다’는 말은 우리가 흔히 행동거지가 신중하지 못하는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가벼운 사람’의 가볍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주적 관점에서 하나의 인간을 바라볼 때의 가벼움. 긴 세월 동안 전 세계에 걸쳐 수 없이 피고 졌던 수 없이 많은 인생 중 하나의 인생이 차지하는 비중만큼의 가벼움. 저자는 책을 시작할 때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책의 앞부분을 읽을 때는 대체 이 문장이 책의 내용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 의문이었는데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니 이 문장만큼 이 책을 잘 표현하는 문장이 없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책 뒤에는 이 문장이 적혀 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야 책을 보기 전에 이 책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파악한 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책장을 펼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코 낙원에서 추방된 적이 없’는 카레닌이 컬러풀하게 그려져 있는 앞표지는 마음에 든다. ‘토마시와 테레자 주위로 반복에 근거한 삶의 원을 그었고 두 사람도 그에게 같은 일을 해 주길 기대’했던 카레닌. ‘작은 크루아상 두 개와 벌 한 마리를 낳’고 쉬러 간 카레닌. 갑자기 눈물이…


 책을 다 읽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공허해지면서 세상만사에 초연해지는 경험을 했다. 좋게 말해서 초연해지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허무에 빠져 허우적거렸다고 할 수 있다. 바득바득 바쁘게 살아서 무엇하나. 우리 인간은 이토록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이거늘. 이런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차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랬던 나를 다시 현실로 끌어내린 건 허기였다. 수양이 부족해서 정신력이 평균 미달인 나는 아무리 정신적 문제가 심각해도 육체적 허기를 이겨 내면서까지 거기에 빠져들진 못했던 것 같다. 마침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던 나는 허무에 빠진 지 채 한 시간도 지나기 전에 배가 고파왔다. 카운터로 가서 ‘스파이시 튜나 샌드위치’라고 적힌 매운 참치 샌드위치를 주문해 먹었다. 먹고 나서 애들을 픽업하러 갔고 정신없이 애들을 돌보다 보니 어느새 다시 무거운 몸으로 땅 위에 서 있었다(거기에 애 둘을 안으면 더 무거워진다). 

 물론 이 무거운 상태 또한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늘 무한 반복이다. 무거울 때는 무거운 대로, 가벼울 때는 가벼운 대로 늘 머리는 복잡하고 인생은 살기 힘들고 배는 고파온다. 루프 돌릴 때 조건 체크를 잘해야 했는데….


 이 책에서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마음에 품었던 여러 질문의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사실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 어떤 훌륭한 책도 수많은 개인적 사연과 감정이 얽혀 들어간 개인적 상황에서 불뚝 형성된 개인적 질문에 ‘정답’이라고 할만한 답을 제시해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더 나아가 그런 답을 과감히 제시하는 책이 있다면 과감히 제끼는 게 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답이 있을 수 있을까 싶으니깐. 그건 각자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몫이다. %로 나머지나 구하며 살고 싶은데 자꾸 몫을 구하라고 한다. 그런데 구하라고 하면 구해야 한다. Muss es sein? Es muss sein! Es muss sein!


 나온 지 40년 가까이 된 책이 왜 지금까지 많이 읽히고 있는지 처절하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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