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yranny of Merit
이 책의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이다. Tyranny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봐서 사전을 찾아봤다.
1. 명사 압제, 폭압; 포학 행위
2. 명사 독재 (정치), 독재 국가 (=dictatorship)
그렇다면 merit의 압제, 폭압, 독재라는 뜻인데 그동안 알고 있던 merit의 뜻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이번엔 merit를 사전에서 찾아봤다.
1. 명사 격식 가치, 훌륭함 (=worth)
2. 명사 가치 있는[훌륭한] 요소, 장점 (=strength)
3. 동사 격식 (칭찬, 관심 등을) 받을 만하다[자격/가치가 있다] (=deserve)
그동안 merit를 장점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책의 내용을 고려했을 때 동의어로 worth나 deserve가 나온 1번이나 3번 뜻이 가장 부합하는 것 같다.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의 압제, 폭압, 독재’
역자와 출판사는 이 책의 제목을 ‘공정하다는 착각’이라고 뽑고 부제를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로 설정했다. 아마 현대 한국 사회를 살면서 이 사회가 공정하며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책장을 펼치도록 유인하기에 적절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제목에서 오는 기대 반, 저자에 대한 기대 반으로 책을 구입했다.
책을 읽어보니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 기회의 평등을 바로 잡자는 내용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회의 평등으로 대표되는 능력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나온 책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부제는 이 책의 내용과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 실태를 비판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 능력주의의 이상이 실현돼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여전히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한 책이다.
그는 능력주의 신화에 주목한다. 그 신화는 대체로 세 가지 명제로 이루어진다.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며, 능력에 따라 성과를 배분한다. 이 명제들은 자유시장경제의 핵심 테마이며, 미국이 ‘기회의 땅’이라는 꿈의 나라가 된 것도 이 명제에 충실한 정책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왜 문제라는 것인가.
‘누구나 재능이 이끄는 만큼 차별 없이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언뜻 보기에는 이상적인 능력주의적 사회에 과연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문제가 있다면 능력주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은 현실이 문제인 것 아닐까? 아니면 설마 능력이 아니라 출신이나 신분을 따지는 세습 귀족 사회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일까?
샌델은 이 책에서 이 모든 질문에 대해 논리적인 설명에 자료를 곁들여 친절하게 답해준다. 다행히 다시 세습 귀족 사회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샌델이 생각하기에 능력주의 사회는 능력주의적 경쟁에서 패배한 다수에게 너무나 가혹하고 불평등한 사회이며, 그런 가혹함에 노출된 다수의 불만이 어느덧 위험 수위까지 쌓여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샌델이 캐치한 경고 신호는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이다. 물론 이게 경고라고 생각하는 샌델의 의견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책을 읽으면서 샌델이 말하는 능력주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내가 공감한 내용을 잘 줄여서 정리하고 싶었지만 워낙 방대해서 쉽지 않았다. 그래서 꼭 기억하고 싶은 부분만 얼기설기 발췌와 함께 산만하게 정리했다.
샌델이 제기하는 능력주의의 문제에 공감하려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그 자체로 삶을 영위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 우선 동의해야 한다. 만약 이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능력주의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도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생각의 시작은 이렇다. 우리 모두의 탄생은 운에 기반한다. 내가 이 시대에 이 장소에 이 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순전히 운이며, 그렇게 태어난 내가 이런 외모와 성격, 이런 능력을 갖게 된 것도 순전히 운이다.
내가 가진 재능과, 사회로부터 받은 대가는 과연 온전히 내 몫인가? 아니면 행운의 산물인가? 나의 노력은 나의 것이지만, 그런 노력은 패배자도 하는 것이다. 내가 나의 재능을 가지게 된 것은 우연한 운이다. 나의 노력에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는 사회를 만난 것도 내가 시대를 잘 만난 행운의 결과인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만약 2차 세계 대전 즈음에 유럽이나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난 벌써 총 맞고 죽었거나 리틀 보이의 효과를 몸소 깨달았거나 야간 행군 전에 각성제로 보급된 필로폰에 중독돼 약물 중독자로 인생을 마쳤을 수도 있다(참고). 현대에 태어났더라도 아마존 원주민의 일원이나 내전 중인 시리아 혹은 소말리아에서 태어났다면 지금과 똑같은 능력을 갖고 태어났다고 해도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중국에서 태어났다가 누군가의 원한을 사 인체의 신비전의 주인공이 됐을 수도 있고.
언제 어디서 태어나든 노력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노력하는 행위 또한 강한 자기 확신과 의지, 인내심과 같은 타고난 성품과 체력과 같은 개인의 건강 상태에 크게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에 운에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내가 받은 사회적 명성과 대가가 행운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겸손해진다. 이런 겸손의 정신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민적 덕성이다. 우리를 분열하게 하는 성공의 거친 윤리에서 돌아와, 능력주의의 폭정을 뛰어넘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능력주의의 문제를 느끼게 해주는 단초다.
능력주의는 이와 같이 삶을 크게 좌우하는 운의 역할을 가리고 오로지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역할만 부각한다. 우리는 여러 매체를 통해 수많은 능력주의적 성공 스토리를 접하는데 그런 스토리의 대부분은 그들이 얼마나 어려운 난관을 만났으며 이를 어떤 노력을 통해 극복했는지에 집중한다. 이는 암암리에 우리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개개인의 노력(용기와 실천)이 부족했기 때문이며 승자는 그럴만해서 승자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게끔 만든다. 성공하지 못한(대부분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지 못한) 모두를 노력하지 않은(의지가 부족하거나 게으르거나 겁이 많아서 배우지 않고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 사람으로 만들고 패배자로 낙인찍는다. 실제로 문제는 개개인이 아니라 그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 환경인 경우가 많은데도 환경을 개선할 생각보다는 노력하지 않은 개인을 비판하려고 든다. 이런 능력주의의 특징은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해답은 능력주의적 사명에서 찾을 수 있다. ‘뭘 해내라’, ‘뭘 이뤄라’, ‘뭘 성공해라’ 하며 끊임없이 떨어지는 사명. … 그것은 그들의 생애 초기부터 들려오던 것이며 행복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가르치는 목소리다. 돈을 많이 벌어라.
이런 병리학적 상황을 넘어 심리학자들은 이 세대 대학생들의 보다 미묘한 정신적 문제점을 찾아냈다. ‘완벽주의라는 숨은 전염병’이다. 몇 년 동안이나 불안 속에 분투해 온 결과 젊은이의 마음은 약하디 약한 자부심, 그리고 부모, 교사, 입학사정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냉혹한 한 마디에도 산산조각 날 자의식으로 채워져 버렸다.
완벽주의는 능력주의의 대표적인 병폐다.
정상에 올라서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불안증, 강박적 완벽주의, 취약한 자부심을 감추기 위한 몸부림으로서 능력주의적 오만 등을 심는다. 한편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극심한 사기 저하와 함께, ‘나는 실패자야’라는 굴욕감마저 심는다.
능력이란 상대적이기 때문에 능력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를 잠재적인 경쟁자로 여길 수밖에 없다. 실상 그렇지 않을 수 있음에도 능력주의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줄을 세우고 제로섬 게임을 시작해 불필요하게 많은 돈과 명예를 소수에게 몰아준다.
이런 경향은 특히 요즘 기업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몇몇 임직원을 스타 직원으로 만들어 사내 방송이나 게시물로 띄워준 뒤, 그들의 성과를 강조하며 그들의 연봉만 큰 폭으로 올려주고 성과급을 몰아준다. 회사는 이름부터가 모일 회(會)에 모일 사(社)로 개개인이 하기 힘든 일을 모두가 모여서 힘을 합쳐 이뤄내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고 실제로 그렇게 굴러가고 있음에도 마치 그 몇 명이 전체 회사를 먹여 살리고 있는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 간다. 그런 이미지 메이킹이 성공하면 많은 임직원은 자신과 주변이 아니라 스타를 바라보며 그들처럼 되는 것을 꿈꾼다. 자신이 낸 성과가 없으니 당연한 것이라는 자책과 언제 올 지 기약도 없는 장밋빛 미래의 달콤한 환상이 당장 자신에게 돌아온 낮은 연봉 인상률과 미미한 성과급에 둔감하게 만든다. 불공평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렇게 되면 기업 입장에서는 쉽게 원가를 절감할 수 있다. 전체 임직원에게 공평하게 나눠줄 때 써야 할 돈보다 훨씬 적은 돈을 몇 명에게 몰아주기만 하면 된다.
이런 승자 독식 구조는 게임에 참여한 모두가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게 만든다. 꼭 승자가 되어야겠다는 절박함과 삐끗하면 패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공포는 주위를 돌볼 수 있는 감성을 증발시킨다.
일과 자기 구제에 대한 이런 입장은 연대와 시민의 상호적 책임에 대한 입장에도 영향을 준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성공하리라 믿어도 되고, 실패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탓해야 하는 게 옳다면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이 공감을 얻기 어렵다. 이것이야말로 능력주의의 혹독한 면이다.
샌델은 세습 특권 귀족제에서 능력주의로 변화한 뒤에도 사회의 불평등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심화됐다고 밝힌다.
미국의 경우 1970년대부터 지금껏 늘어난 국민소득 대부분이 상위 10퍼센트에게 돌아갔고, 하위 50퍼센트는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실질소득 기준 노동 가능 연령 인구의 중위소득은 약 3만 6,000달러인데, 그것은 40년 전보다 낮은 수준이다. 오늘날 가장 부유한 1퍼센트의 미국인이 하위 50퍼센트가 버는 것보다 더 많이 벌고 있다.
지난 40년 동안 대졸자와 고졸자의 수입 격차는 두 배로 늘어났다. 1979년, 대졸자는 고졸자보다 40퍼센트 정도 많은 수입을 올렸다. 2000년대에는 80퍼센트까지 높아졌다.
세계화 시대가 고학력자에게는 많은 보상을 해주었지만, 일반 노동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1979년에서 2016년까지 미국 제조업 일자리의 수는 1950만에서 1200만까지 줄었다. 생산성은 올랐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산품 가격에서 갈수록 더 적은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반면 경영자와 주주의 몫은 점점 더 많아졌다. 1970년대 말 주요 미국 기업 CEO는 일반 노동자보다 30배 정도 많은 보수를 받았다. 2014년 그것은 300배로 늘어났다.
미국 남성의 중위소득은 물가 연동 실질 가격으로 볼 때 반세기 동안 답보 상태다. 1979년 이후 일인당 국민소득은 85퍼센트 늘어났지만, 비대졸자 백인 남성의 소득은 1979년 당시보다 실질적으로 낮다.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 결과다. 사실 능력주의는 평등을 위한 이념이 아니다. 능력주의를 이상적으로 구현하면 할수록 불평등이 정당화될 뿐이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음을 주의해야 한다. 능력주의는 부자와 빈자의 차이가 벌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단지 부자의 자식과 빈자의 자식이 장기적으로, 능력에 근거하여 서로 자리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볼 뿐이다. 오르거나 떨어지거나 모두 그들의 노력과 재능의 소관이다. 그 누구도 편견이나 특권에 따라 억지로 아래로 떨어지거나 위로 올려질 수 없어야 한다. 능력주의에서 중요한 건 ‘모두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다리의 단과 단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문제가 안 된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
이는 그 자체로는 능력주의의 반론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다. ‘능력주의적 경쟁에서 비롯된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능력주의 옹호론자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모두가 공평한 조건에서 경쟁한다면 그 결과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샌델은 능력주의가 일의 존엄성 또한 심각하게 깎아내리고 있다고 말했다. 가장 깊이 공감했던 내용이었다.
능력주의 시대는 하는 일의 존엄성을 깎아내리고 있다. 이른바 ‘브레인’을 칭송하기 위해, “당신이 하는 일은 돈 잘 버는 전문직업인들의 일에 비해 시장에서 별 가치가 없어요. 공동선에도 별 기여를 하지 않죠. 당연히 사회적 인정이나 명망도 별로 따라붙지 않아요.” 그것은 시장이 승자에게 퍼붓는 과도한 보상을 정당화함과 동시에 비대졸자 노동자에게 던져 주는 쥐꼬리 만한 보상도 당연시했다.
이런저런 직업의 시장 가치가 그것이 공동선에 기여하는 정도와 비례한다고 보면 오류다(부유한 마약 딜러와 박봉의 고등학교 교사 이야기(미국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를 떠올려보라).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사회에는 ‘우리가 버는 돈이 우리의 사회적 기여도를 반영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내려버렸다. 그런 주장은 공적 문화 곳곳에서 메아리친다.
일은 경제인 동시에 문화인 것이다. 그것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방법이자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는 원천이다.
그래서 세계화가 일으킨 불평등이 왜 그토록 강력한 분노로 이어졌는지 설명된다. 세계화에 뒤처진 사람들은 다른 이들은 번영하는 동안 경제적 곤경에 처했을 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종사하는 일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함을 깨달았다. 사회의 눈에, 그리고 아마 스스로의 눈으로도 그들의 일은 더 이상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라고 비치지 않는다.
능력주의 사회는 직업의 귀천 없음은 물론 일의 존엄성과 가치를 하락시키고 있다.
특히 능력주의와 함께 부동산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폭등하면서 수도권에서 일반 직장인 월급으로는 내 몸 하나 뉘일 집 구하는 것도 어려워진 한국 사회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평생 죽도록 일해도 집 하나 구하기 힘든 직업을 소중하게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주식 시장과 부동산 시장, 가상 자산 시장이 호황이다. 주식이나 부동산, 가상 자산으로 큰돈을 번 사례를 여러 언론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다뤄주면서 그냥 묵묵히 성실하게 일만 하는 사람은 졸지에 자신이 벼락 거지가 된 것처럼 느끼다가 실제로 벼락 거지가 되어 버렸다. 똑똑한 아빠는 주식 투자를 공부한다거나 부지런한 엄마는 부동산을 공부한다거나 일이나 공부 대신 가상 자산 투자를 선택했다는 책이나 강연이나 인터뷰가 쏟아지면서 자기 본분에만 충실했던 사람들은 어느새 미련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상황을 욕하는 게 아니라 비생산적인 경쟁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을 안쓰러워하거나 조롱하기 시작했다. 비정상적인 집값 상승에 동참하기 싫었던 사람들은 연봉 상승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이 뛰어오르는 집값과 그에 맞춰 올라버린 전셋값을 감당하지 못하고 집을 줄이거나 출퇴근 시간을 늘려야 했다. 당장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이런 사람들에게 일의 존엄성이 중요하다는 말이 와닿을 수 있을까?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크게 벌어지면 이상은 점차 환상이 되어 버린다. 지금 바로 잡지 않으면 일의 존엄성이나 성실, 근면 같은 가치는 판타지 문학에서나 접할 수 있는 덕목이 될지도 모른다.
샌델은 그나마 능력주의에서 기대했던 사회적 이동성과 기회의 확대 또한 실현되지 않았다고 밝힌다. 현대의 대학 입시 제도는 능력주의의 첫 번째 관문이자 선봉 역할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는데 샌델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의 대학은 사회적 이동성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근 경제학자 라지 체티와 그의 동료들은 대학이 세대 간 사회적 이동성에 기여하는 정도에 대해 포괄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그들은 1999년부터 2013년까지 대학생 3,000만 명의 생애 추이를 조사했다. 미국의 각 대학 학생들 가운데 소득 수준의 밑바닥에서 상층부까지(다시 말하면, 최하위 5 분위에서 최상위 5 분위까지) 올라온 비율을 따져보았다. 말하자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상위 20퍼센트에 들 만한 소득자로 성공한 학생들의 비율을 각 대학별로 조사한 것이다. 그 결과는? 오늘날 고등교육은 사회적 상승에 놀랄 만큼 거의 영향을 못 미치고 있다. … 이들 대학은 애초에 불우한 배경의 학생들을 적게 뽑으므로 사회적 이동 기여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하버드 출신들 가운데 1.8%만이(프린스턴은 1.3퍼센트) 소득 기준 최상위로 올라갔다.
명문 사립대에서 열 명 중 한 명만이 소득 사다리에서 겨우 두 계단(5 분위로 따져 보았을 때)을 올라갈 수 있다. … 미국 대학은 놀랄 만큼 소수의 학생들에게만 사회적 상승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 미국의 고등교육은 대부분의 사람이 최상층에서 올라타는 엘리베이터와 같다. … 실제로 대부분의 대학들은 기회를 늘리기보다 특권을 공고히 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고등교육을 기본적인 기회의 엔진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이는 슬픈 소식일 것이다. 이는 오늘날 정치에서 금과옥조처럼 받들어지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바로 불평등 증가의 해법이 사회적 이동성 증가이며, 사회적 이동성을 늘리는 방법은 더 많은 사람을 대학에 보내는 것이라는 주장 말이다.
애초에 사회적 이동성과 기회의 확대가 절실하게 필요한 불우한 환경의 학생들은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고 있다. 자연히 대학이 사회적 이동성 증대에 기여하는 효과도 미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능력주의적 군비 경쟁은 부유한 집안 쪽으로 전세를 기울인다. 그리고 부자 부모들이 스스로의 특권을 대물림하기 쉽게 해 준다. 이런 식의 특권 대물림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런 판에서 유리한 고지를 찾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매우 불공평하며, 이 판에 자식들이 뛰어들어 있는 상황에서는 지나친 압박이 된다. 능력주의적 경쟁은 침략적이고 성취만 쫓으며 과도한 부모의 압박을 불러온다. 10대 청소년에게 과중한 부담을 준다는 말이다.
결국 능력주의 사회는 세습 사회만큼이나 세습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능력주의 엘리트들은 논란과 논쟁을 피하기 위해 능력주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최근 경제학자들은 바람직한 행동을 이끌어내기 위해 시장적 인센티브를 주자는 주장을 해왔다. 이런 인센티브 이야기는 하도 널리 퍼져서 인센티브제화하다(incentivize)라는 새 동사까지 만들어졌다.
인센티브제화는 당파주의나 이념적 논쟁을 피하려는 오바마의 본능에 잘 들어맞는 기술관료적 개념이었다. 이는 돈 욕심을 활용해 공공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며, 따라서 정부의 강압과 자유방임적 시장 선택 사이의 적절한 중용을 확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념 문제를 피하고 경제 쪽으로만 이야기하려는 능력주의 엘리트의 담론은 공적 담론이 갈수록 거칠고 난폭해지는 추세(정당 구성원들이 서로에 대해 고함을 지르고 트윗 악플을 날려댐에 따라)와 우연히 겹친다. 기술관료적 담론과 고성 경쟁은 민주 시민을 움직이는 도덕적 신념의 실종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두 쪽 모두 정의와 공동선에 대한 경쟁적 개념들을 갖고 합리적으로 토론하려는 태도를 외면한다.
양당 구조로 고착화된 정치 체제에서 갈수록 심해지는 논쟁을 피하기 위해 정치인들은 자꾸 관심을 기술 발전과 경제 성장으로 끌고 가서 가치중립적으로만 행동하려고 한다. 목표가 다 함께 잘 사는 사회가 아니라 오직 기술 발전이나 경제 성장에만 맞춰지면서 모든 문제가 효율의 문제로 바뀌며 전문가가 아니면 정책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꺼내기도 힘든 상황이 되어 버렸다. 대중은 이제 서로 대화할 때도 잘 모르면 닥치라는 위험한 태도로 임한다.
그러나 트럼프 시대에 양극화된 정치를 놓고 오바마는 대중이 기본 사실들에 대해 의견을 같이 할 수 없음이 일차적 문제라고 분석했다. 그는 “왜 우리 정치에 그렇게 병목 현상과 독기, 양극화 현상이 많은가 하면, 부분적으로는 팩트와 정보의 공통적인 베이스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폭스뉴스>를 보는 사람과 <뉴욕타임스>를 읽는 사람은 전혀 다른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의견의 차이에 그치지 않고 사실에 있어서 벌어지는 격차다. 마치 뭐랄까, 인식론상의 차이와 같다.”
그러나 정치적 이견을 단지 액면의 사실을 부정하거나 과학을 부정하는 일이라 여긴다면, 그것은 사실과 의견이 정치적 설득 과정에서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정치 이전에 ‘우리 모두는 어떤 기본 사실에 전원 동의해야 하며, 그 이후에 우리 각자의 의견과 신념을 가지고 토론하면 된다’는 생각은 기술관료적 기만이다. 정치 토론은 종종 의제와 연관된 사실을 어떻게 잡아내고 정의할지에 대해 벌어진다. 어느 쪽이든 사실을 프레임화하는 데 일단 성공하면, 그는 장기적으로 그 논쟁에서 이긴 셈이다. 모이니한의 말과는 정반대로 우리의 의견은 우리의 인식을 사로잡는다. 의견이라는 것은 사실이 명확히 규명되고 정립된 뒤에 비로소 생겨나는 게 아니다.
결국 능력주의 사회에서 수많은 대중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낼 수 있는 기회는 오직 투표 하나만 남았다. 정치인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의견을 사회에 반영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차악을 투표하자’라는 해괴망측한 구호로 선동해 양당 체제를 더욱 확고히 다지고 있다. 이 구호에 선동된 사람은 자신이 보기에 더 나은 사람이 있어도 양당 후보가 아니면 내가 투표해도 안 될 것 같으니 그냥 양당 중에서 차악을 골라버리며 양당 체제를 확고히 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다. 그야말로 엿같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샌델은 또한 엘리트 위주, 효율 위주 정치에 대한 반발로 포퓰리즘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프 당선이라고 말한다.
사실 능력주의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적 반감이 트럼프 당선과 그해 초 영국에서 예상을 깨고 이루어진 브렉시트 표결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믿을 이유가 있다. 선거는 복합적 이벤트이므로 어떤 일이 투표자의 표를 이끌어냈는지 확실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트럼프와 브렉시트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포퓰리스트 정당들에 표를 던진 많은 노동계급 사람들은 사회적 상승에 대한 약속보다는 국민 주권 원칙의 재확인, 국가 정체성과 국가적 자존심 등의 강조에 동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장 주도적 세계화를 환영하면서 그 이익 대부분을 챙기고 노동자들을 외국 노동자들과의 경쟁에 내몬 장본인들, 동료 시민들보다는 세계 각지의 엘리트들과 더 가까워 보이는 능력주의 엘리트, 전문가, 전문직업인 계층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포퓰리즘은 이른바 ‘국민의 뜻을 따르는 정치’와 한 끗 차이라서 현재 나타난 현상이 어느 쪽인지 쉽게 판별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다만 포퓰리즘이나 국민의 뜻을 따르는 정치나 둘 다 결국 다수(혹은 목소리 크고 힘이 세서 다수처럼 보이는 소수)의 뜻을 밀어붙이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소수(혹은 다수의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쉽게 침해할 가능성이 크다. 역사를 살펴봐도 인종주의나 국수주의, 나치즘이나 파시즘과 같은 폭력적이고 위험한 길로 빠져 수많은 생명을 순간에 앗아간 사례가 많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뚜렷한 자기 철학 없이 ‘국민의 뜻에 따르는 정치’라는 미명 하에 대중에 영합해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거나(그것도 몇 달 사이에!) 퍼주는 공약을 남발하면서 툭하면 책임질 생각도 없는 말로 사람들을 이리저리 선동하는 경박한 포퓰리스트들이 주류 정치계에 속속 등장하고 있다.
먼저 자신의 성공에 겸손해야 한다는 게 샌델의 시작이다. 그런데 어떻게 겸손하면 되는 것일까? 사실 겸손이란 게 주로 말이나 태도를 뜻하기 때문에 수동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렇다면 누가 ‘능력 좋으시네요!’라고 말하면 ‘허허허, 아닙니다. 그저 운이 좋은 것이죠.’라고 답례하면 된다는 것일까?
책을 읽어보면 그것보다는 능동적이고 물질적인 겸손을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이 아주 어렵고 서로의 생각이 강하게 충돌하는 지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섬세하면서 대담한 정책 설정과 적극적인 설득이 필요할 것이다.
아무리 모든 게 운에 기반한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누군가는 긴 시간 이 악물고 노력하며 성과를 만들어 이 사회를 발전시키고 있고, 그 반대 지점에 있는 사람들은 남들이 구축해 놓은 사회에서 그들이 낸 세금을 축내며 살아가고 있다. 속내야 어떻든 간에 표면적으로 보면 그렇다. 가정에서, 기업에서, 정부 기관에서 재능을 갖추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 덕분에 이 사회는 유지되고 발전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겉보기에는 아무 기여도 하지 않은 사람이 다가와 ‘당신은 그저 운이 좋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카지노 잭팟과 다를 게 없지요. 난 운이 좋지 않았어요. 타고난 재능도 없었고 노력하기에도 여의치 않았어요. 그런데 우리 같은 인간이잖아요. 함께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 성과 좀 나눠 먹읍시다’라고 말한다면 누가 순순히 따를 수 있을까.
그래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그 자체로 삶을 영위할 가치가 있다는 것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저 문장에 기계적으로 공감을 표하는 수준이 아니라 저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진심으로 공감해야 한다. 길고 지난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매 순간 그 사실에 공감할 수 있어야 말뿐인 수동적인 겸손이 아닌 적극적인 겸손을 행할 수 있다. 그래야 내 성과를 내가 생각하기에 전혀 성과 창출에 기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다.
만약 모든 인간이 평등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인간은 성격이나 능력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며 그 가치에 따라 함께 살만한지 아닌지가 결정된다고 생각한다면, 혹은 인생은 야생과 다를 게 없어서 결국엔 각자도생이라고 생각한다면 위에서 말한 얘기들은 전부 쓸데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운이고 노력이고 모르겠고 난 나에게 운 좋게 주어진 것들을 혼자 즐기며 살다 가겠다고 생각한다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냥 그렇게 살다 가면 된다.
그런데 쉽지 않을 것이다. 내 성과를 나눠주는 것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게 더욱 쉽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국가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는 국민, 주권, 영토다. 국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국민을 매우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데, 그중에서도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여기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단순히 숫자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 주권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수밖에 없다. 이는 대한민국의 근간이자 개국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헌법에 잘 나와 있다. 헌법 제1조와 10조, 34조의 내용을 조합하면 능력 좋은 몇 명만 잘 사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잘 사는 나라가 되겠다는 국가의 의지가 잘 나와 있다.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제34조 ①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②국가는 사회보장ㆍ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
③국가는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④국가는 노인과 청소년의 복지향상을 위한 정책을 실시할 의무를 진다.
⑤신체장애자 및 질병ㆍ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⑥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샌델이 결과의 평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대신 조건의 평등을 이야기한다.
샌델이 말하는 조건의 평등이란 것이 내게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책 말미에 등장하는데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나 예시는 나오지 않는다.
종종 기회의 평등의 유일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다. 그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계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숙의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그 때문인지 책을 전부 읽고 난 뒤에도 ‘조건의 평등‘이 무엇이냐고 자문했을 때 대답할 수가 없어서 검색해 보았다. <사회학사전>이라는 책에 따르면 사회학 관점에서 세 가지 평등이 있고, 그중의 하나가 조건의 평등이었다.
(1) 기회의 평등: 관련되어 있는 사회집단 간의 제도나 사회적 위치에 접근할 평등의 조항. 즉 남녀 공학, 모든 계급 출신의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평등과 같은 것이다.
(2) 조건의 평등: 모든 관련되어 있는 사회집단의 삶의 조건에서의 평등. 즉 소득의 평등과 같은 것이다. 조건의 평등을 수반하지 않고 기회의 평등을 극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이한 능력을 가진 개인에 의해 획득된 다양한 특혜를 즐기는 기회의 평등의 옹호자들은 성공을 거둔 한 세대에 의해 다음 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물질적, 문화적 이점을 무시한다. 조건의 불평등은 기회의 평등을 방해한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3) 결과나 산출에서의 평등: 궁극적인 평등의 시발점으로서, 불평등을 변혁하기 위해 다양한 사회집단에 서로 다른 정책이나 과정을 적용하는 것. 예를 들면, 교육이나 직업적 선발에서 여성이나 흑인, 혹은 도시 내의 빈민에게 유리하게 차별 대우하는 것은 조건의 불평등을 상쇄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기회의 평등이 무의미해질 것이다. 사회적 평등은 무계급성과 동의어가 아니다. 계급의 정의는 다양하지만 계급의 철폐가 그 자체로서 모든 사회적 불평등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평등 [equality] (사회학사전, 2000. 10. 30., 고영복)
이 설명을 읽고 나서도 조건의 평등이 무엇인지 잘 와닿지 않았다. ‘모든 관련되어 있는 사회집단의 삶의 조건에서의 평등.‘이라는 말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뒤에 이어진 ‘즉 소득의 평등과 같은 것이다.’라는 예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만약 무대를 대학교로 한정 지어 본다면 조금 이해는 된다. 입시에 합격하고 나면 모두가 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만 실제로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다면 그 기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 등록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소득의 평등을 이루면 대학 교육의 장에서 만큼은 조건의 평등을 이룬 셈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무대를 사회로 넓혀 보면 소득의 평등이 과연 조건의 평등인지 조금 모호해진다. 소득의 평등이 그 어떤 평등보다 결과의 평등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 역시 돈이 모든 가치보다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인 걸까.
샌델은 조건의 평등을 말하기에 앞서 대학 입시와 일의 존엄성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몇 가지 정책을 제시한다. 아마도 이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 역으로 샌델이 말하는 조건의 평등이 무엇인지 조금 감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샌델은 대학 입시와 일의 존엄성 회복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정책을 제안한다.
개인적으로 샌델이 제안한 대학 입시 정책은 너무나 파격적이라서 쉽게 공감하기 어려웠다. 샌델은 이를 ‘유능력자 제비뽑기’라고 명명했다. 샌델 스스로도 ‘선별과 분투의 악순환을 어떻게 깨트릴 것인지에 대한 스케치 정도’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런 대안을 생각해보자. 매년 4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하버드와 스탠퍼드가 제시하는 신입생 정원 약 2,000명 안에 들기 위해 몰려든다. 입학사정관은 지원자들 대다수가 하버드나 스탠퍼드에서 충분히 수학할 만한 역량의 소유자라고 말한다. 아마 경쟁률이 심한 다른 수십 개 대학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충분히 능력은 되는데, 들어갈 문이 좁다 보니 탈락자가 많은 것이다. 이미 1960년대에, 당시만 해도 지원자 수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지만, 예일대에서 오래 근무해온 입학사정관은 이런 말을 남겼다. “때때로 수천 명의 지원자들을 모두 합격시켜 주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나는 그들의 지원서를 계단 아래로 집어던져 버리고, 아무나 골라 1,000명을 뽑을 수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훌륭한 학생들을 보유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제안은 그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검토해 보자는 것이다. 4만 명의 지원자들 가운데 하버드나 스탠퍼드에 다니기 힘들어 보이는 일부와, 동료 학생들과 잘해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일부만 솎아낸다. 그러면 아마 3만 명, 또는 2만 5,000명이나 2만 명의 지원자가 남으며 이들은 누가 합격하더라도 충분히 잘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을 두고 극도로 어렵고 불확실한 선별 작업을 다시 할 것이 아니라 제비뽑기 식으로 최종 합격자를 뽑는다. 달리 말해 그들의 지원 서류를 집어던져 버리고 아무나 2,000명을 골라잡는 것이다.
이 대안은 능력주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능력이 있는 사람만 합격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을 극대화되어야 할 이상으로 보기보다 일정 관문을 넘을 수 있는 조건으로만 본다.
…
그러나 유능자를 제비뽑기로 뽑자는 대안의 가장 유력한 근거는 그렇게 함으로써 능력의 폭정과 맞설 수 있다는 점이다. 일정 관문을 넘는 조건으로만 능력을 보고, 나머지는 운이 결정토록 하는 일은 고등학교 시절의 건강함을 어느 정도 되찾아줄 것이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영혼까지 끌어 모아 스펙을 채우고 강박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는 경험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다. 또한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바람을 뺄 것이다. 결국 어찌되었든 정상에 오른 사람은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가 아니라 운이 좋았던 것이며, 탈락한 사람이나 자신이나 엇비슷한 가정환경과 천부적 재능, 그리고 도덕적 자격을 갖추고 있음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실로 파격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다. 대학 입시 제도에 극도로 예민한 우리나라에서는 아마 이런 제안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반발이 있을 것이다. 그런 반발을 감수하고 실행에 옮길 정부가 실제로 존재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업에서는 비슷한 사례가 있다. 예전에 언론에서 크게 한 번 다뤘던 것 같은데 바로 일본의 미라이 공업이라는 회사에서 선풍기 날리기로 과장 진급을 시켰던 사례가 있다.
물론 딱 한 번이었다는 점에서 아쉽긴 하지만 이후로도 미라이 공업이 아무 문제없이 성공적으로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선례가 아닐까 싶다.
다음으로 샌델이 제안하는 정책은 일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한 정책이다. 먼저 샌델은 일의 존엄성 회복이라는 의제를 진지하게 정치적 어젠다로 다뤄야 한다고 제안한다.
일의 존엄성 문제는 좋은 출발점이 된다. 겉으로 보면 이는 논쟁거리가 될 만한 이상이 아닌 듯하다. 어떤 정치인이 “일은 존엄하지 않다”고 주장하겠는가? 그러나 일의 존엄성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정치적 어젠다가 나온다면 주류 진보파와 보수파 모두 껄끄러워할 질문이 더불어 나오게 될 것이다. 그것이 시장 중심적 세계화 주창자들이 널리 공유시킨 전제, 즉 ‘시장의 성과는 각자가 공동선에 기여한 것의 참된 사회적 가치를 반영한다’는 전제에 정면 도전하기 때문이다.
급여를 생각해 보면, 이런저런 직업들이 각자의 일 성과에 대해 참된 사회적 가치를 반영한다’는 전제에 정면 도전하기 때문이다.
시장 사회에서는 우리가 버는 돈과 우리가 공동선에 기여한 내용의 가치를 혼동하기 쉽다.
그런 혼동은 단지 생각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결과가 아니다. 그 논리적 결함을 지적하는 철학 논증만 하고 만족스러워할 일도 아니다. 그것은 세상이 ‘우리는 우리가 받을 몫을 받는다’는 식으로 짜여 있다는 능력주의적 희망에서 비롯된 혼동이다. 그런 희망은 구약성서 시대서부터 오늘날까지 ‘역사의 옳은 쪽에 서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섭리론적 사고를 부추긴 희망이기도 하다.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논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방법을 세우는 것이다. 공동선에 우리가 진정으로 가치 있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시장의 낙인이 잘못되었는지를 반성하고, 숙고하고, 민주적으로 공동의 대책을 수립하는 것이다.
그런 논쟁이 어떤 합의를 반드시 낳으리라 본다면 비현실적 이리라. 공동선은 불가피하게 논란의 여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일의 존엄에 대한 새로운 논쟁은 우리의 당파적 경향을 무너뜨릴 것이고, 우리의 정치 담론을 도덕적으로 활성화할 것이며, 우리가 40년 동안 시장의 신앙과 능력주의적 오만에 빠져든 탓에 양극화된 정치 현실을 넘어설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샌델은 이어서 보수적 입장과 진보적 입장에서 각각 정책을 제안한다.
먼저 보수적 정책은 저소득 노동자 임금 보전과(이게 보수적인가 싶지만) 비숙련 내지 중급 숙련 미국 노동자들에게 수준 있는 삶을 살고 가족을 부양하며 지역사회에 공헌할 만한 수입을 제공할 노동 시장을 만드는 데 중점을 두는 측면에서 환경 규제를 철폐하고, 무역과 아웃소싱, 이민 등에 어느 정도 규제를 두는 것이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가 제안한 정책 중 하나는 저소득 노동자에게 임금 보전을 해주는 것이었다. 공화당이 주장해온 표준 임금 수준보다 훨씬 넘는 수준이 되겠지만 말이다. 이 아이디어는 정부가 시간당 임금으로 따질 때 저임금으로 분류되는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에게 정부가 시간당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임금 보전은 한편으로 급여세의 정반대 개념이었다. 노동자 개인 수입에서 얼마씩 빼는 게 아니라 정부가 얼마씩 보태주는 것이다. 저소득 노동자들이 당장 상당한 시장 임금을 받을 기술이 없더라도 수준 있는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카스의 다른 정책 제안들은 보수파에게 좀 더 어필할 만했다. 가령 제조업과 광업에서 일자리 감소를 가져온 환경 규제를 철폐하는 식이다. 이민이나 자유무역처럼 골치 아픈 주제에 대해서 카스는 소비자가 아닌 노동자의 시각에서 바라보자고 권했다. 우리의 목적이 최대한 소비자 가격을 낮추는 데 있다면 자유무역, 아웃소싱, 그리고 상대적으로 개방된 이민 정책 등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우리의 주 관심사가 비숙련 내지 중급 숙련 미국 노동자들에게 수준 있는 삶을 살고 가족을 부양하며 지역사회에 공헌할 만한 수입을 제공할 노동 시장을 만드는 데 있다면, 무역과 아웃소싱, 이민 등에 어느 정도의 규제를 두는 편이 정당할 것이다.
카스의 개별 제안들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따지기에 앞서, 그의 프로젝트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우리의 주 관심을 ‘GDP 극대화’에서 ‘일의 존엄과 사회적 응집에 친화적인 노동 시장 조성’으로 옮기도록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1990년대 이래 핵심적 정치 균열은 더 이상 좌우가 아닌 ‘개방 대 폐쇄’라고 역설해 온 세계화 주창자들에게 크게 한 방을 먹인다. 카스는 적절하게도 지적한다. 그런 식으로 세계화 논의에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기술 수준이 높고, 대졸자이며, ‘현대 경제의 승리자’인 사람들을 ‘개방’ 편으로, 그 반대자들을 ‘폐쇄’ 편으로 줄 세우는 것’이라고 말이다. 마치 상품, 자본, 사람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일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수구주의자라는 듯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그럴싸하게 변호하며 그에 뒤떨어진 사람들을 능멸하는 그 이상의 방법은 없을 것이었다.
다음으로 진보적 정책은 세금과 관련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금융 시장에서 세금을 더 걷고(금융 거래세) 급여세의 일부 또는 전부를 없애는 것이다. 나는 이런 세제 개편의 뜻에 깊이 공감했고 샌델이 내놓은 정책 중 가장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금융 활동이 생산적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가치 있는 재화와 용역을 생산할 경제 능력을 증진시켜 준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최선을 다 한다고 해도 금융은 그 자체가 생산적일 수가 없다. 그 역할은 자본을 사회적으로 유용한 목적별로(신생 기업, 공장, 도로, 공항, 학교, 병원, 가정 등등) 배당함으로써 경제 활동을 돕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이 미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최근 몇십 년 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함으로써 그 투자는 점점 실물경제와 유리되었다. 점점 더 관계자들에게 큰 수익을 창출하는 복합 금융공학과 연계되고 있는데, 이 금융공학이란 경제를 보다 생산적이게 하는 일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1984년 경제의 금융화가 막 시작될 무렵, 저명한 예일대 경제학 교수인 제임스 토빈은 ‘금융시장의 카지노적인 성격’에 대한 직감에 따른 경고를 했다. 그는 “우리는 우리의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을 포함해 우리가 가진 자원을 점점 더 많이 금융계로, 재화와 용역 생산과는 동떨어진 분야로 집어넣고 있다. 그런 금융 활동은 사회적 생산성과는 전혀 비례하지 않는 높은 사적 수익을 창출하는 활동이다”라며 우려했다.
금융 활동의 어느 정도가 실물경제의 생산성을 높이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가 금융계 자체에게 비생산적인 불로소득을 창출하는지 정확히 알기란 어렵다. 그러나 믿을 만한 권위자인 어데어 터너는 미국이나 영국 같은 선진경제에서 금융은 15퍼센트만이 생산성 있는 신생 기업으로 투자되고 나머지는 기존 자산이나 인기 있는 파생상품 등에 투기된다고 추산한다. 이것이 금융의 생산적 역할을 설령 절반으로 낮춰 본 것이라 쳐도, 역시 경악할 만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 영향은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도덕과 정치에도 악영향을 준다.
나는 제안한다. 급여세의 전부 또는 일부를 없애는 대신 금융거래세를 일종의 ‘죄악세’로 신설하여 카지노나 다름없고 실물경제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투기 행위를 억제하는 방안을 토론의 주제로 삼을 것을. 당연히 다른 입장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넓게 보아 일의 존엄을 회복하려는 것이고, 그러려면 우리 경제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도덕적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
그런 질문 중 하나는 어떤 종류의 일이 인정과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느냐다. 또 다른 것은 우리는 시민으로서 서로에게 어떤 책임이 있느냐다. 이 질문들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무엇이 긍정적인 기여인지 따져보려면 우리 공동의 생활에서 목표와 수단이 무엇인지부터 가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소속이라는 의식 없이 우리 스스로를 우리가 빚지고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라는 인식 없이 공동의 목표와 수단에 대해 숙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의존을 인식하기에 우리의 집합적 복지에 대한 기여도를 평가할 까닭이 있는 것이다. 이는 시민들이 “우리는 모두 함께입니다”라는 말을 위기 때에 건성으로 내뱉는 말로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믿고 할 만큼 건실한 공동체 의식을 필요로 한다. 그런 말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한 믿음이 가는 묘사여야 한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구매력 증진 정책에 집중하고 있다.
노동계급과 중산층 가정의 구매력을 높여주는 것으로 그들의 곤경을 보상하려는 정책 대안, 또는 사회적 안전망 강화를 도모하는 정책 대안 등은 지금 한창 불붙고 있는 분개와 분노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이는 그 분노가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잃은 것과 관련되어 있어서다. 구매력의 저하도 분명 문제지만, 노동계급의 분노를 직접 촉발한 상처는 그들이 생산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일단 직면한 코로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임시 절차로는 효과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 정책이 코로나 사태 이후로도 지속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언론을 비롯한 미디어 매체도 문제다. 모든 매체에서 화려하고 편리한 소비자 정체성만 강조한 덕분에 일의 존엄성 확립에 꼭 필요한 생산자 정체성이 자꾸 희미해지고 있다.
GDP 증대에 중점을 두는 정책은 비록 뒤처진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동반되더라도, 생산보다 소비를 강조하게끔 했다. 따라서 우리는 생산자보다 소비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재정립했다. 물론 실제는 우리 정체성은 양쪽 모두다. 소비자로서 우리는 우리가 버는 돈 거의 전부로 가능한 한 싸게, 원하는 재화와 용역을 구입하길 바란다. 그런 것들이 해외의 저임노동자의 손으로 만들어졌든, 고임금 미국 노동자의 손으로 만들어졌든 말이다. 그리고 생산자로서 우리는 만족스럽고 수입이 좋은 일자리를 바란다.
우리의 소비자 정체성과 생산자 정체성 사이를 조화시키는 일은 정치의 몫이다. 그러나 경제성장에 올인하는 세계화 프로젝트는, 그리고 소비자 복지 우선주의는 아웃소싱, 이민, 생산자 복지를 금전적 의미로만 풀이하는 방식이 가져오는 악영향에 눈을 감는다. 세계화를 주도하는 엘리트는 그것이 초래한 불평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일의 존엄성에 끼치는 악영향을 직시하지 못했다.
모두가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읽고 나서 아래 문장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결국 우리는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샌델은 문제를 짚어보기 전에 능력주의의 탄생 과정을 쭉 훑어본다. 샌델이 훑어보는 역사는 당연하게도 지극히 미국 관점이며 또한 종교적이다. 샌델(을 비롯해 설명에 등장하는 서구권의 유명 학자들)은 능력주의의 시초를 기독교의 역사에서 찾고 있다. 샌델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능력주의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 기독교라고 말하는 그의 주장에 일견 그럴듯한 논리적 구조가 보인다. 일견이라고 한 이유는 그의 설명은 미국에만 적용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길고 긴 기독교 역사의 흐름에 따라 논리가 하나씩 촘촘히 얽혀 있어서 짧게 줄이기가 꽤나 어려웠다. 그래서 그냥 포기했다. 샌델이 생각하는 능력주의의 발전 과정에 관심 있다면 꼭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