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푸어의 뒤를 잇는 술담배푸어 이야기
그야말로 콘텐츠 홍수 시대라서 여기저기 볼 수 있는 콘텐츠는 넘쳐나지만 내 취향에 맞는 신선하고 재미있는 콘텐츠는 여전히 만나기 어렵다. 넷플릭스를 켜놓고 한참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그냥 셜록이나 또 볼까, 생각하는 와중에 이 영화를 발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두 배우를 발견했다. 이솜과 안재홍.
이솜은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과 ‘좋아해줘’를 보면서 기억에 남은 배우다. 안재홍은 ‘멜로가 체질’과 ‘해치지 않아’를 보면서 기억에 남은 배우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둘이 동시에 출연한 영화지만 개봉한지도 몰랐다. 내가 한창 3살, 4살짜리들과 씨름하고 있을 때인 2018.03.22.에 CGV 아트하우스에서 개봉한 영화다. 총스코어는 6만 명으로 천만 관객 시대에 굉장히 겸손한 관객수가 아닐 수 없다. 내가 3살, 4살짜리들과 씨름하지 않고 있었더라도 개봉했는지 몰랐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두 배우와 시놉시스와의 조합을 보니 신선하고 재밌을 것 같았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신선한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를 원한다면 바로 이 영화가 답이다. 주인공 미소(이솜)의 콘셉트가 워낙 독특해서 중간중간 조금 뻔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전개가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
영화 제목 소공녀는 미국 작가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소설 소공녀에서 따온 듯하다. 사실 소설 소공녀의 영어 제목은 ‘a little princess’이기 때문에 작은 공주로 번역하는 게 옳았겠지만, 일본에서 소공녀라고 번역했고 일제강점기에 이 제목 그대로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소공녀로 남게 됐다고 한다. 덕분에 현대 한국인인들은 잘 사용하지 않는 소공녀라는 단어가 소설 제목으로 남았고, 다시 영화 제목으로 남게 되었다. 참고로 난 소설 소공녀는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제목으로는 내용을 전혀 유추할 수 없었다. 백지상태에서 봤다는 얘기다.
다 보고 나서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을 알게 됐다. Microhabitat. 작은 서식지라고 해석할 수 있겠는데 나처럼 소설 소공녀를 모른다면 영어 제목이 더 와닿을 것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 미소의 집(서식지, habitat) 얘기다. 미소서식지. 미소를 ‘소리 없이 웃는 웃음’이 아니라 ‘아주 작다’라는 뜻으로 영작하면 micro habitat가 되겠다. 작명 센스가 좋다.
이하 스포일러 주의
미소는 그야말로 YOLO 인생을 살고 있는 젊은이다. YOLO라고 하면 맛집을 찾아다니거나 여행이나 쇼핑을 즐기거나 이태원이나 강남 등지의 클럽에서 화려하게 현재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떠오르지만, 미소는 그런 느낌의 YOLO와는 거리가 멀다. 무슨 연유인지 나오지는 않지만 부모님은 안 계시고 다른 가족도 없이 혼자 단칸방을 떠돌며 남의 집 청소하는 일로 먹고살고 있는 젊은이다. 게다가 머리가 하얗게 세는 지병을 앓고 있어서 백발이 되지 않으려면 한약까지 먹어야 한다.
미소가 사는 단칸방은 작지만 깔끔하고 있을 것 다 있는 풀옵션 원룸을 겸손하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정말 네모반듯한 방에 아무것도 없어서 캐리어를 책상으로 쓰는 오리지널 단칸방이다. 난방도 안 들어오고 낡을 대로 낡은 벽지 위로는 바퀴벌레가 기어 다닌다.
이런 미소에게 담배와 위스키, 그리고 남자 친구 한솔은 유일한 안식처다. 이 세 가지(혹은 두 가지와 한 사람)는 미소 인생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되지만 여기서 더 필요한 것도 없다.
매일매일 금전출납부를 작성하며 그야말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고 있는 미소에게 두 가지 위기가 닥친다.
첫 번째는 담뱃값과 집세의 동반 인상이다. 하루하루 타이트하게 살아가던 미소에게 어느 날 갑자기 큰 폭으로 올라버린 담뱃값과 덩달아 오른 집세는 그야말로 치명타였다. 이런 담뱃값 인상이 누군가에겐 금연의 계기였겠지만 미소에게는 자발적 홈리스의 계기가 됐다. 두 가지가 한꺼번에 오른 상황에 미소는 일단 집을 버려 집세를 줄이는 것으로 대처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어처구니없는 대처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과감하게 집을 버린 미소는 좀 더 저렴한 거처를 찾기 전까지 주위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기로 마음먹고, 과거 대학 시절에 열정적으로 밴드부 활동을 같이 했던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아쉽게도 남자 친구 한솔은 회사 기숙사에서 살면서 미소만큼이나 타이트하게 생활하고 있는지라 미소를 도와줄 형편이 못됐다. 화면에 잠깐 비치는 밴드부 시절의 사진 속에서 그들은 모두 미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다시 만난 그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변해 있었다.
영화는 대학 졸업 후 뿔뿔이 흩어져 여기저기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밴드부원들의 가장 사적인 공간에 미소가 찾아가면서 겪는 해프닝을 다루는 데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소비한다. 미소는 밴드부 시절의 미소에서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은 이미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삶을 쌓아 나가고 있어서 불쑥 찾아온 미소를 오래 품어주지는 못한다. 자의든 타의든 예전처럼 오래 지내지는 못한다.
미소의 성격은 이들의 이런 사정에 공감하고 대처하는 방식에서 잘 드러난다. 아주 작지만 확고한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해 놓고 그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다른 사람을 충실히 배려한다. 확실하게 다져진 자존감 덕분에 누구를 만나도 위축되지 않고 일관적으로 대응한다. ‘You are fired’라는 말을 들어도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을 위로한다.
이런 미소를 흔드는 건 미소가 유일하게 자기만의 영역을 개방했던 한솔이다. 미소와 함께 살 집을 구하고 싶었던 한솔이 미소 몰래 해외 발령을 지원했고, 덜컥 합격해 버린 것이다. 첫 번째 위기에서 담배를 지켜냈던 미소에게 한솔의 부재라는 두 번째 위기가 닥친다.
이 영화에서 미소가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그대로 뱉는 유일한 씬이 바로 한솔에게 해외 발령 소식을 전해 듣는 장면인 것 같다. 얼마나 가는 것이냐고 묻는 미소의 질문에 한솔이 2년이라고 답하자 미소는 먹던 꼬치를 바닥에 집어던지며 ‘너무 길잖아!’라고 외친다. 이때도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숨을 삼키는 듯한 느낌으로 외친다. 한솔은 조용히 미소가 집어던진 꼬치를 주워서 들고 있던 비닐봉지에 집어넣는다. 이 커플의 성격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계속 떠오르는 장면이다.
살면서 무언가에 지원해서 붙어 본 게 처음이라서 신이 난다는 한솔을, 다른 무엇도 아닌 미소 자신과의 미래를 위해 돈을 벌고 싶다는 한솔을 미소는 보내줄 수밖에 없다. 미소는 자신의 거처를 걱정하는 한솔에게 자기 친구 많으니 걱정 말라고 말하고, 한솔은 곧 먼 타국으로 떠나버린다.
이후 백발로 변해 한강 변에서 텐트를 치고 생활하는 미소의 모습이 멀리 보이며 영화는 끝난다.
요 근래 인터넷 포털에 이런 기사가 몇 개 올라왔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32946
https://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21122017217
아마 미소가 실존 인물이고 이런 미소의 생활을 어떤 기자가 알았다면 ‘“집 대신 글렌 피딕 한 잔과 담배 한 모금…” 카푸어에 이어 이젠 술담배푸어까지’ 비슷한 제목으로 기사가 올라왔을 것 같다. 사람들이 카푸어를 볼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아래 기사를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6605951&code=61121111&cp=nv
미소 역시 영화가 아니라 기사로 다뤄졌다면 이렇게 좋게 그려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영화를 본 후 미소가 잘 살았으면 하는 감정을 갖게 된 건 영화를 보면서 미소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깊이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일을 하며 주위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속속들이 알게 됐기 때문에, 그녀가 아주 무해한 사람이며 자기만의 방법으로 이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 가고 있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때 문득, 어쩌면 카푸어를 자처한 사람들 중에서도 직접 만나 그들의 인생을 좀 더 자세히 알게 된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될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공녀의 미소처럼 삶의 다른 어떤 것보다 차가 좋아서 기꺼이 카푸어가 됐지만 성실히 삶을 살며 주변을 따뜻하게 만들어 가는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잘 편집한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정도로 사정을 자세히 알기 전에는 그들의 삶을 좋은 시각으로 보기 힘든 세상이 됐다. 왜 그렇게 됐을까.
어쩌면 언론의 사명이나 기능 같은 건 일찌감치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고 그저 조회수에나 목매고 있는 언론들이 우리네 인생에서 가장 자극적인 부분만 잘라내 끊임없이 재생산하며 떠들어 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이야기에 끊임없이 노출되면서 차츰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들만 잔뜩 모여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어 조금만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생활 패턴이 다른 사람을 보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들의 단편만 보고, 그들 삶의 극히 일부만 접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지레짐작해 마구잡이로 판단하는 걸 수도 있다. 사실 다들 괜찮은 사람들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정말 괜찮은 사람들일까? 그들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없을까.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성실하게 건강까지 알뜰히 챙겨가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성실히 낸 세금으로 훗날 늙고 병든 그들을 돌봐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난 열심히 살면서 노후에 남의 도움받기 싫어서 놀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최대한 줄여가며 노후 준비를 알뜰히 해놓았는데, 누구는 자기 취향이라며 매일 위스키 한 잔에 담배도 잔뜩 피우면서 단칸방 하나 마련하지 않고 여유를 부리며 살다가 늘그막에 내가 낸 세금으로 만든 시설 같은 곳에서 연명할 수도 있다. 설상가상으로 폐암이나 간암에 걸린다면 암 국가 지원 제도의 도움을 받을 텐데 그렇게 되면 내 세금이 추가로 더 들어갈 수도 있다. 나도 그런 게 싫어서 안 하고 산 게 아닌데. 하고 싶은데 참으면서 살아왔던 건데. 왜 그들은 내 인내심과 성실함에, 왜 내 피땀눈물에 무임승차하는 거지? 이러면 이거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닌가?
카푸어는 또 어떤가. 자기 사정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무슨무슨 캐피털 같은 제2금융권이나 심지어 제도권 금융도 아닌 제3금융권에서 올 할부로 차를 질러놓고는 자기 꿈을 이루었다느니 너무 행복하다느니 개소리하다가 감당 못해서 개인파산제도 알아보러 다니면서 결국 국가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생으로 전락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런 길로 제 발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왜 우리가 신경 써야 한단 말인가. 왜 그들에게 내가 낸 세금을 투입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다 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연 모든 것이 개인의 선택인가. 인내심과 자제력은 개인마다 다르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강한 인내심과 자제력을 타고난 것이고 누군가는 그렇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분명 타고난 성향이 크게 작용하는 영역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저 타고난 형질이 발현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우리의 외모를 선택한 것이 아닌 것처럼 위스키나 담배, 과시욕 같은 것을 잘 참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선택의 문제가 아닌 타고난 성향의 문제인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외모로 남을 평가하고 외모로 남을 비난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 또한 같은 문제인 것은 아닐까.
거기에 그동안 많은 미디어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 순간을 표현한답시고 고급 자동차를 타고 질주하거나 고급 주택에서 생활하거나 사치품 혹은 비싼 식음료를 소비하는 모습만 주야장천 그려대는 통에 그런 것만이 가치 있고 행복한 것이라고 집단 최면에 걸리게 된 것일 수도 있다. 함께 하는 삶이 아닌 남들과는 다른 돋보이는 삶만이 행복한 삶이고 내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 있는 삶이라는 환상에 빠져버린 것일 수도 있다.
영화 소공녀 감상문을 쓰다가 너무 샛길로 빠지는 것 같아서 여기서 마쳐야겠다. 너무나 뜬금없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나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면, 미소에게 공감하면서 한편으로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면,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