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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nugeun Mar 03. 2022

문학이란 무엇인가, 독서록

Qu'est-ce que la littérature?

 최근에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을 읽었는데 조지 오웰이 서문에 이런 내용을 적어 놓았다. 


어떤 책도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관련이 없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이 서문을 읽고 동물 농장을 읽고 나니 참여 문학이란 게 뭔지 궁금해져서 이리저리 검색하다가 이 책을 알게 됐다. 거창하고 도전적인 제목이 매력적이었다. 어떤 내용일까 궁금해서 서점에 가서 찾아보니 책의 뒤표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네 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사르트르는 문학의 사명이 정치와 사회 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참여에 있음을 강조한다. 


 내가 찾던 그 책인 것 같아서 바로 구입했지만, 막상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aver?bid=5155


읽기 어려운 책

 현상학이라는 학문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잘 모르면 이 책의 앞부분을 이해하는 게 굉장히 어려울 수 있다. 관련 지식이 부족했던 나는 처음 80여 페이지를 읽는데 근 일주일이 걸린 것 같다. 현대 시나 소설 비평문에서 종종 느꼈던 어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개념이나 단어를 번역문 느낌이 물씬 나는 문장으로 줄줄이 엮어 놓아서 한 문장을 몇 번씩 다시 읽어야 했다. 아래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문단이다. 


… 그러나 행위의 성과에 대해서 아무리 무관심하다 하더라도, 시인은 19세기 전까지는 대체적으로 그의 사회와 화합했던 것이 사실이다. 시인은 산문이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서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산문가와 마찬가지로 언어를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사회가 성립한 이후로는 시인은 산문작가와 이구동성으로 그 사회가 살 수 없는 사회라고 선언하게 되었다,(오타인지 모르겠지만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로 되어 있다) 시인으로서는 여전히 인간의 신화를 창조하는 것이 본령이었으나, 그는 이제 백색의 마술(설명할 수 있는 자연적인 인과 관계를 통해 희한한 효과를 산출하는 기술)로부터 흑색의 마술(어떤 신령이나 특히 귀신의 개입으로 발생하는 초자연적인 효과)로 옮아갔다. 인간은 전과 다름없이 절대적 목적으로 다루어졌지만, 그 기도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공리적인 집단 속으로 매몰되고 만다. 따라서 그의 행위의 배후에 있으면서 신화로 옮아가는 것을 가능케 해주는 것은, 이미 성공이 아니라 좌절이다. 오직 좌절만이 인간의 기도와 끝없는 전개를 장벽처럼 가로막으면서 인간을 순수한 자기 자신으로 되돌려준다. 세계는 여전히 비본질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패배의 계기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사물의 목적성은 인간의 길을 막아서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게 하는 데 있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은 세상의 흐름을 함부로 패배와 파멸로 향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패배와 파멸만을 주목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인간의 기도에는 양면이 있다. 그것은 성공인 동시에 좌절이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에는 변증법의 도식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우리의 어휘와 아울러 우리의 이성의 틀을 더욱 유연하게 만들어야 한다. 역사란 객관적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주관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역사에 있어서는 변증법이 일종의 반변증법에 의해서 부정되고 침투되고 침식되면서도 역시 변증법적이다. 나는 후일 이러한 역사적 현실을 서술해 볼 생각이지만, 그것은 철학자로서의 일이다. 


 ‘따라서’, ‘이제는’, ‘이미’와 같은 접속사로 앞뒤 문장이 엮여 있는데 어떻게 이 앞뒤 문장이 이런 접속사로 이어질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 문단의 끝에서 사르트르가 ‘이러한 역사적 현실’을 이 책이 아니라 다른 곳에 서술하기로 결심한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이 책에 다 서술했으면 이 책을 읽는 것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런 문단들 사이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아름다운 문장들이 등장해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읽을 수 있었다.  


 발레리(20세기 전반 프랑스의 시인·비평가·사상가) 식으로 말하자면, 햇빛이 유리를 거쳐 통과하듯이, 말이 우리의 시선을 스쳐서 지나갈 때에 산문이 있는 것이다.
 흰 장미를 ‘충실성’의 뜻으로 새긴다면, 그것은 이미 그 흰 장미를 꽃으로 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 시선은 흰 장미를 가로질러 그 너머에 있는 그 추상적 덕목을 겨냥한 것이다. 나는 흰 장미를 잊고 만다.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 꽃송이도 삭은 듯이 달콤한 향기도 지나치고 만다. 나는 그것을 지각조차 못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예술가로서 행동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소리나 형태의 질에 주목하고 끊임없이 그것으로 되돌아오고 그것에 홀린다. 그리고 그가 캔버스에 옮겨놓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물체로서의 색체인데, 그가 거기에 가하는 유일한 수정은 그것을 ‘상상적’ 물체로 변형한다는 것뿐이다. 


읽을 때 주석은 필수, 그리고 앞부분을 읽을 때는 조금 힘을 빼고

 처음에는 번역이 이상한 건가 싶었는데 책 마지막에 옮긴 분이 작성하신 해설을 읽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해설은 본문과는 다르게 읽기도 쉬웠고(사르트르의 글은 문자 그대로 읽는 것 자체부터 어려운 문장이 많았다) 이해하기도 쉬운 문장으로 수려하게 잘 적혀 있었다. 번역이 잘못된 게 아니라 애초에 사르트르가 글을 난해하게 쓴 것이었다. 또한 책 뒤표지에서 이런 문구도 발견했다. 


 앞뒤가 모순되는 발언도 보이고 난해한 대목도 수두룩하다. 


 사르트르의 문학은 물론 그의 조국 프랑스와 유럽의 문학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 책은 주석과 해설이 필수라고 생각한다. 글을 읽으면서 정말 큰 도움을 받았다. 지금도 이 책의 절반이나 이해했으려나 싶지만 아마 주석이 없었으면 그 반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참고로 해설에서 가장 깊이 공감한 부분은 아래였다.  


 다만 사르트르를 읽는 재미(차라리 괴로움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지 모르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는 것이긴 하지만, 앞부분을 읽을 때 적당히 힘을 빼고 읽어도 될 것 같다. 그냥 용어에 익숙해진다는 개념으로 모르는 용어가 나오면 용어의 개념만 인터넷 검색으로 짧게 파악하고 넘어가는 게 나은 것 같다.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들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몇 번이고 다시 읽다가 나처럼 졸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그래도 뒷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같은 개념을 반복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뒤로 가면서 자연스럽게 앞부분이 이해가 되는 부분도 많았다. 


 그렇게 작가가 사용한 용어에 조금씩 익숙해지면 흐릿하게나마 작가의 생각을 따라가면서 작가가 자신의 머리에 그린 생각과 비슷한 그림을 내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이 책에는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앞에서 설명한 개념에 계속 작업을 더해가는 식의 설명이 많은데, 이때 각 부분 부분을 철저히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보다는 일단 전체 그림을 한 번 보고 각 부분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는 게 나은 순간이 많았던 것 같다. 


이제 각 장을 읽으며 내 수준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부분을 정리해 보겠다.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2.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

3.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4. 1947년 작가의 상황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1장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읽으며 내게 남은 것은 독자가 글을 통해 ‘보게 된다’는 개념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모습이든 자기 자신의 모습이든 간에 독자는 작가의 글을 통해 어떤 상황과 그 상황 속에서의 누군가의 모습, 행태 등을 보게 되는데 이 보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자신이나 남을 돌아보거나 반성하거나 고찰하게 되는 효과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새롭게 와닿았다. 꼭 글을 통해 어떤 개선안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현실을 고발한다’는 측면에서 자기에게 영감을 준 세상의 어떤 단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 자체가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시도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 상황을 바꾸기 ‘위한’ 기도(企圖)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상황을 바꾸기 위하여 나 자신과 남들에게 상황을 드러낸다. 나는 상황의 핵심을 찌르고 그것을 관통하고 만인의 안전(眼前)에 고정시켜 놓는다.  


 즉 글쓰기는 기도라는 게 사르트르의 생각이다. 어찌 보면 우리가 언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역할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이 장에서 사르트르는 작가가 쓰는 글은 ‘살아 있는 인간이 쓰는 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책을 통해서 우리의 정당성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며 ‘비록 먼 훗날 우리가 과오를 저질렀다는 판정이 내린다 해도 미리부터 과오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밝힌다. 소심하게 살아온 사람으로서 나를 돌아보며 깊이 공감한 부분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사르트르는 비평가들을 혹독하게 비판하는데 주석을 통해 등장인물과 상황을 파악하며 읽으면 이 책에서 흔치 않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

 내가 이해하는 선에서 2장의 키워드는 자유와, 자유에 대한 호소, 자유를 위한 참여이다. 사르트르는 글쓰기가 독자와 작가의 자유에 대한 호소, 그리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참여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은데, 사실 이 부분은 내가 사르트르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다. 자신이 없다. 


 모든 문학 작품은 호소이다. 

 사실, 우리는 강요나 매혹이나 탄원을 통해서 남의 자유 그 자체에 호소할 수 없다. 그 자유에 도달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우선 자유를 인정하고 다음으로 자유를 신뢰하고 마지막으로 자유의 이름으로, 다시 말해서 그것에 대한 신뢰의 이름으로 그 자유로부터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책은 도구처럼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독자의 자유에 대해서 자신을 목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쓴다는 것은 세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독자의 고매한 마음이 수행해야 할 과업으로서 세계를 제시하는 행위이다. 


 또한 사르트르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글쓰기를 살펴보기도 한다. 왜 글쓰기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인지를 설명한 뒤 독자의 읽기란 작가가 인도하는 창조라면서 글쓰기라는 창조는 독자의 읽기를 통해 완성된다고 말한다. 즉, 작가인 나는 이미 내가 알고 생각한 것을 쓰고 있기 때문에 책이란 작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독자를 위한 것이며, 작가의 입장에서는 진정한 창조라고 할 수 없다. 독자는 작가의 글을 읽으며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되는데 이때 독자의 읽기란 작가가 인도하는 창조가 되며, 이에 따라 진정한 창조로써의 글쓰기란 예술은 독자의 읽기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글을 쓰는 것과 책장을 펼치는 것은 모두 각자의 자유 의지에서 비롯되고, 동시에 각자의 자유를 인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문학 작품은 독자의 자유를 향한 호소라는 것인데… 그렇다고 한다. 잘 납득이 가진 않았다. 솔직히 간단한 말을 그럴듯하게 설명하기 위해 어려운 개념을 잔뜩 집어넣어 장황하게 설명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렇게 설명해야 하는 게 마땅한데 중간 부분을 추상화해서 요약하거나 건너뛴 결과로만 이해할 수 있는 내 지식의 얕은 깊이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사르트르는 글쓰기란 자유를 희구하는 한 방식이며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참여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사람은 굳이 글을 쓴다는 그 사실 자체로 말미암아 독자의 자유를 인정하고, 또한 글을 읽는 사람은 책을 펼친다는 그 단 한 가지 사실로 말미암아 작가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인 이상, 예술 작품은 어떤 면에서 보든 간에 인간의 자유에 대한 신뢰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떤 곡절로 작가가 되었든 간에, 당신이 어떤 견해를 표명했든 간에, 문학은 당신을 싸움터로 끌어들인다. 글쓰기는 자유를 희구하는 한 방식이다. 따라서 일단 글쓰기를 시작한 이상에야, 당신은 좋건 싫건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글쓰기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참여라면, (글을 쓰는 당신은 중세 시대의) 성직자처럼 이상적 가치의 수호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 사회적 투쟁에서 어느 한편에 서서 구체적이며 일상적인 자유를 지킬 것인지’ 물으며 3장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로 넘어간다.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이 장에서 사르트르는 언뜻 글쓰기란 당연히 ‘보편적 독자’를 위해서이고 작가의 요청은 원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지향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면서 이를 설명해 나간다. 설명하기 위해 역사를 훑기도 하고, 당시 사르트르가 말하는 참여로서의 문학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말을 가져와 반박하기도 한다. 


 사르트르는 작가의 책이 모든 사람을 지향하지만 실제로는 소수만 읽게 된다는 걸 설명하면서 작가를 기생충에 비유한다.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지 못하던 시절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왕족과 귀족에 기생해서 먹고사는 존재였고, 이후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후에도 실제로 책을 읽는 것은 주로 먹고사는 것이 아닌 것에도 돈과 시간을 쓸 정도로 삶의 여유가 있는 지배 계층인데 작가가 이런 지배 계층의 돈을 받아서 쓴 글은 결과적으로 피지배계층을 위한 글이 되기 때문에 기생충이라고 말한다. 강렬한 비유라서 마음에 남았다.


 작가는 이처럼 사회에 대해서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자신의 현상을 걸머지거나 혹은 그것을 변혁하도록 촉구한다. 아무튼 간에 사회는 달라진다. 그것은 무지의 덕분으로 유지해 오던 균형을 잃고 수치심과 뻔뻔함 사이에서 도용하고, 자기기만에 빠져든다. 이렇듯 작가는 사회에 불행 의식을 준다. 바로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작가는 보수적인 세력들과 끊임없는 대립 관계에 있다. 그 세력들은 균형을 유지하려고 하고, 작가는 그것을 깨뜨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직접적인 것의 부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매개적인 것으로의 이행은 곧 부단한 혁명이다. 
 한데, 이토록 비생산적이며 위험한 활동에 보수를 준다는 사치를 부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지배 계급의 사람들뿐이다. 그리고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전술인 동시에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오해이다. 물질적인 걱정에서 벗어난 지배층의 엘리트들은 충분히 자유로워서, 반성적인 자기 인식을 바랄 정도로 되어 있다. 그래서 자신을 되찾기 위해서 작가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요청하는데, 일단 그 모습이 제시되면, 그것을 스스로 걸머져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작가를 대우하는 것이 전술일 수가 있다. 그들은 작가가 초래하는 위험을 알고는 그의 파괴적인 힘을 통제하기 위해서 돈을 주는 것이다. 이리하여 작가는 지배 세력인 엘리트의 기생충이 된다. 그러나 작가는 그 본래의 기능으로 말미암아, 그를 먹여 살리는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대립할 수밖에 없다.


 이 개념은 이 책의 끝까지 줄곧 이용되는데, 현대로 넘어와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 구도에서 작가는 부르주아지에 속하면서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글을 쓰게 된다는 사르트르의 입장을 밝히는 데에도 이용된다. 


 아래는 이 장의 앞부분에 나오는 말인데 현재 발간되는 책 중 많은 책들이 이런 내용의 책들인 것 같아서 가져와 봤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묶여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은폐하기에 여념이 없다. … 등불을 어둡게 하고, 앞뒤를 다 같이 살펴보려고 하지 않고, 수단은 묵과한 채 목적만을 염두에 두고, 같은 운명의 사람들과의 연대성을 거부하고, 근엄의 정신(기존 관념에 의지하고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을 믿음으로써, 인간 조건의 진실을 외면하려는 태도) 속으로 피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또한 삶을 죽음의 견지에서 관조함으로써 삶의 모든 가치를 박탈하고, 또 동시에 범용한 일생 생활 속으로 도피함으로써 죽음의 공포를 뭉개버릴 수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억압 계급에 속하는 사람은 고상한 감정을 통해서 자신의 계급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고, 다른 한편으로 피억압계급에 속하는 사람은 내면적 생활을 함양하기만 하면 쇠사슬에 묶여도 여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억압자와의 공범 관계를 은폐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작가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모든 술책에 의지할 수도 있다. 사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조용히 잠자기를 바라는 독자에게 숱한 잔꾀를 제공해 주려고 한다. 


1947년 작가의 상황

 이 장에서 사르트르는 제목 그대로 당시 프랑스 작가들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독자는 누구이고, 무엇에 관해서 쓸 수 있고, 쓰기를 바라고, 또 써야 하는지를 얘기한다. 장의 이름이 마치 부록 같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앞서 세 장에서 살펴본 내용을 종합해서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하는, 말하자면 결론과 같은 부분이다. 


 여러 가지 이념이 생겨나고 발전하고 확산되다가 결국 서로 충돌하면서 일으켰던 두 번의 세계 대전과 비록 소련에서는 썩은 열매를 맺고 말았지만 사르트르가 생각하기에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었던 사회주의에 대해서 당시 시대가 어떻게 반응하고 있었는지, 당대에 이름을 알린 작가나 유명인들이 어떤 태도와 행동을 취했는지를 살펴보며 왜 문학은 참여해야 하고, 참여할 수밖에 없으며, 어떤 식으로 참여해야 하는지 말하는 부분이다. 페이지로만 따지면 1장부터 3장까지를 합친 것과 비슷할 정도로 내용이 방대하다. 내용 전체를 잘 요약하는 건 어려울 것 같고, 재밌게 읽었던 몇 부분을 발췌하는 것으로 끝내겠다.


 먼저 아래는 당시 프랑스 작가들을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글을 쓰고 있는 미국과 영국, 이탈리아의 작가들과 비교하면서 비꼬는 부분이다. 깊은 내용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사르트르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게 재밌어서 가져왔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부르주아적인 작가들이다. 주거 환경이 좋고 옷가지도 단정하게 입을 수 있다. 단지 식사가 썩 좋지는 않지만, 그 사실에조차 의미가 있다. 부르주아는 음식에 있어서는 노동자보다 씀씀이를 줄이고, 그 대신 의복과 주거에 한결 많은 돈을 소비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작가가 부르주아 문화에 젖어 있다. 프랑스에서는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부르주아가 되기 위한 면허장인데, 최소한 그 자격도 얻지 못하고 글을 쓰려고 덤비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아래는 현재 세계정세와 맞물려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부분이었다. 사르트르의 시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참여할 수밖에 없고, 의식하고 있든 하지 못하고 있든 이미 어느 집단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가 그동안 반겼던 모든 약속이 사실은 위협이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고, 우리가 살아온 나날이 그 진모를 드러낸 것이다. 우리는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그 하루하루의 시간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신속하게, 그리고 느긋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우리를 새로운 전쟁으로 내몰아 갔다. 우리의 개인 생활은 우리의 노력, 우리의 장점과 단점, 우리의 행운과 액운, 그리고 극소수의 사람들의 선의와 악의에 따라 좌우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 그런 개인 생활의 사소한 부분마저도 은연한 집단적인 힘에 의해서 지배되고, 가장 사적인 경우조차도 세계 전체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러자 우리는 갑자기 우리가 ‘상황 속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의 선배들이 그토록 애써 시도하려고 했던 초탈은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았다. 미래에 부각되고 있던 것은 집단적 모험이며, 그것은 ‘우리의’ 모험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모험이 후일 우리의 세대의 특징이 되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직전인 마지막 순간에, 무슨 섬광처럼 우리의 모습을 자신에게 비춰줄 그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행위의 비밀도, 우리의 가장 내밀한 목소리의 비밀도, 우리의 전방에 있었다. 우리의 이름들이 새겨질 재난 속에 있었다. 
 이제 역사가 우리에게로 역류한 것이다. 우리가 만지는 모든 것에서, 우리가 숨 쉬는 공기에서, 우리가 읽는 책에서, 우리가 쓰는 책장에서, 심지어 사랑에서, 우리는 역사의 맛과 같은 것을 느꼈다. 삶의 매 순간은, 우리가 그것을 향유하려는 바로 그 찰나에, 교묘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가 절대적인 것처럼 신바람 나게 살아온 현재의 순간순간은 보이지 않는 죽음의 엄습을 겪고, 아직도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시선에 의해서 다른 차원의 뜻을 띠고, 바로 눈앞에 현존하면서도 말하자면 ‘이미 지나가 버린 것’같이 보였다. 


 아래는 사르트르가 이 책에서 잠재적 독자를 현실적 독자로 편입시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이야기하며 매스 미디어를 언급하는 부분이다. 장차 독자로 삼아야 할 사람들(사르트르에게는 노동자)에게 매스 미디어의 역할과 영향력이 커질 것이니 그에 따라 작가도 매스 미디어에 적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잠재적 독자들 중의 일부를 어떻게 현실적 독자 속으로 편입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새로운 수단에 의지해야 한다. 한데 그것은 이미 존재한다. 이미 미국 사람들은 그것에 ‘매스 미디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신문, 라디오, 영화, 그런 것들은 잠재적 독자를 획득하기 위한 진정한 방편이다. 물론 우리는 기우를 가라앉혀야 한다. 책이 가장 고귀하고 가장 오래된 형식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고, 결국은 책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데에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라디오의, 영화의, 신문 논설의, 르포르타주의 ‘문학적’ 기술이 존재하는 것이다. … 따라서 이제는 이미지로 이야기하고, 우리가 책에 담아온 사상을 새로운 언어로 옮겨놓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겉으로는 양보를 해서 우리가 꼭 필요한 존재처럼 만들고, 또 가능하다면 안이한 성공을 통해서 우리의 입지를 다져야 한다. 그다음으로는 정부 행정의 무질서와 어떤 제작자들의 무능력을 이용해 그들의 무기를 거꾸로 그들에게 돌려야 한다. 그때 작가는 미지의 세계로 나서게 된다. 그는 어둠 속에서 그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여태껏 거짓말만 듣고 지내온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게 된다. 그는 그들의 분노와 근심을 대변할 것이다. 어떠한 거울에도 반영되지 않았던 사람들, 소경처럼 웃고 우는 것만을 배운 사람들이 작가를 통해서 갑자기 자신의 모습과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로 말미암아 문학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분명한 것은, 만일 우리가 매스 미디어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단지 부르주아만을 위해서 쓴다는 상황에 체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비단 이 장에서뿐만 아니라 이 책 전체에 초현실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은데, 초현실주의에 대해서는 끽해야 살바도르 달리가 그렸던 녹아내리는 시계 정도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독서록에 그 내용을 포함할 수는 없었다. 3장까지의 내용과 비교해 4장은 훨씬 읽기 쉽기 때문에 궁금하다면 직접 읽어 보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 


글에서 느껴지는 에너지

 이 책은 다소 장황하게 설명하는 면이 있으며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해설에서도 그랬고, 주석을 참고하며 힘겹게 읽은 나 역시 그런 점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굉장히 읽기 힘든 책이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이 책을 놓을 수 없었던 건 문장이 난해하고 글에 논리적인 빈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내용에서 끝도 없이 에너지가 솟아 나왔기 때문이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이 차고 넘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르트르란 사람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됐기 때문에 태생이 그런 사람인 건지, 아니면 이 책을 쓸 때 유독 (당시 문학의 행태에 열 받아서) 그랬던 것인지 알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 만큼은 그는 마치 자신이 ‘문학’을 만들어 낸 장본인인 것 같은 태도로 열변을 토한다. 그 점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와서 나와 생각이 다를지라도 그의 얘기를 끝까지 한 번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마지막 장까지 읽게 되었다. 


그래서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이 책에서 말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어찌 됐든 책을 끝까지 다 읽었으니 자유를 모티브로 독자와 작가를 이리저리 얽어서, 그의 시대의 문학이 계급과 계급의 투쟁으로의 참여,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참여를 향하기를 바랐던 사르트르의 의도를 명확하게 짚어보고 싶지만, 잘 못하겠다. 그건 내가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사르트르의 시대와 이 책이 처음 번역된 시대는 판이하게 다른 시대이고, 이 책이 처음 번역된 시대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는 또다시 판이하게 다른 시대가 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이 책에서 얻은 것은 사르트르가 원했던 문학의 모습이 어떠한가가 아니다. 내가 얻은 것은 사르트르의 에너지다. 나는 이 책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문학이 움직여 주길 바라는 사르트르의 마음이 어떤 글을 만들어 냈는지를 발견했다. 구체적이면서 생동적이고 필사적인 호소의 에너지가 담긴 글을 발견했고, 그런 글이 몇십 년이 지난 뒤에 프랑스와 그 어떤 것도 닮지 않은 동양의 어떤 나라의 어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옮긴이는 해설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설사 자유, 평등, 정의와 같은 낱말이 아직도 잔존한다 하더라도 그런 개념들은, 이미 사르트르가 생각한 바와 같은 절대적 척도로서의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이 시장원리에 비추어서 규정되고 조정되고 허용될 성질의 것으로 변해 버린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거창하게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문학에 기대하는 바는, 다시 이 세상에 자유, 평등, 정의와 같은 낱말이 절대적 척도로서의 가치를 지닐 수 있도록 힘을 보태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던 것처럼 작가는 피억압자의 편에 서서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는 억압자와 피억압자들을 독자로 삼고 글을 써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국내 문학이 조금 더 다양해지면 좋겠다. 순수 문학으로서 개인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거나 자신의 성적 정체성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개인을 다루거나 성별에 따른 차별이나 갈등을 다루는 것도 좋지만, 그 외 다른 가치, 그 외 다른 피억압자들도 고민하고 환기하는 문학이 조금 더 나와주면 좋겠다. 지금 국내 문학은 성별의 문제에 너무 치우쳐져 있는 느낌이다. 조금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국내 문학은 사르트르가 말했던 매스 미디어뿐 아니라 그동안 자신들이 업신여겼던 웹툰과 웹 소설에까지 자신의 역할과 독자의 상당 부분을 넘겨주고 말았다. 남은 파이마저 넘기고 싶지 않으면 그들과 비교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신속하고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나라에 사르트르와 같은 작가가 등장하기를 원하지만, 그렇다고 사르트르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옮긴이가 해설에 적은 것처럼 당시 사르트르가 꿈꿨던 사회주의 국가는 이 책이 나온 지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이상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특히 사회주의를 내세웠던 대표적인 두 국가인 러시아와 중국의 현재 꼬락서니는 참으로 안타까운 수준이다. 사실 그 둘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전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자본주의에 기반한 독재 국가일 뿐이었다. 얼마 전 러시아는 말도 안 되는 명분을 앞세워 모두가 설마하며 우려했던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했다. 몇 마리 돼지들의 욕심 때문에 수많은 우크라이나 국민과 러시아의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내몰렸고 안타까운 희생자가 속출하고 있다. 홍콩을 집어삼킨 뒤 대만을 위협하던 중국은 그런 러시아에 찬동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러시아가 대만에 적용할 수 있는 성공 사례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만 같다. 그 와중에 자신에 대한 관심이 식었다고 생각한 건지 북한은 미사일을 쏘아 올렸다. 이게 지금 우리나라 주변에서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국가들의 현실이다. 그 와중에 우크라이나 대통령 탓을 한 어느 대선 후보와 화난 얼굴을 귀엽게 그려 넣은 귤 사진을 응원이랍시고 SNS에 올리고 앉아 있던 다른 대선 후보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심할 따름이다.


 다행히 우크라이나는 아직 버텨내고 있다. 풍전등화를 지나 풍속등화가 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목숨을 잃고 있지만 아직 생존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국제 사회의 지원도 줄을 잇고 있다. 물론 이런 상황을 이용해 다시 세계 여러 곳에서 군국주의의 망령이 되살아 날까봐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일단은 우크라니아가 끝까지 잘 버텨 결국 생존해 내길 바랄 뿐이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문학이 그들의 지금의 생존과 추후의 생존에 보탬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러시아든 중국이든 미국이든 일본이든 간에 주변 국가를 무력으로 위협하는 국가들에 맞서는 사람들에게 문학이 힘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게 내가 생각하기에 문학이 담당해야 하는 역할이고, 지금 시대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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