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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nugeun May 21. 2022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독서록

그는 죽지 않았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 꽃 한 송이를!

손발이 오그라드는 문체

 쓸데없는 비유와 대본식 표현을 남발했다. 글을 쓰면서 감정을 자제하지 못한 것 같다. 거기다 책 전체에 기독교 정서가 물씬 배어 있다. 아마 서점에서 이 책을 접했다면 서서 한두 장 읽고는 문체에 질려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몇 가지 예를 가져와봤다.


 두렵고 또한 설레어서 나는 펜을 쥔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첨단 기계를 좋아하는 선생과 달리 기계를 싫어하는 나는 인터뷰할 때 녹음기를 거의 사용해본 적이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마음을 고쳐먹고 힘껏 녹음기 버튼을 눌렀다.  


 책에는 이런 식의 감정 표현이 넘쳐난다. 온갖 비유를 섞어 자신의 감정을 과장해서 드러낸다. 그야말로 신을 만나 인터뷰하는 사람처럼 끝없이 인터뷰이를 찬미하면서 스스로 찬미한다는 그 감정에 과하게 몰입한다. 백번 양보해서 이어령이라는 사람을 오래전부터 잘 알아왔기 때문에 그가 살아온 인생이나 남긴 업적 앞에서 어느 정도 그런 감정이 들었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펜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거나 녹음기 버튼을 ‘힘껏’ 눌렀다는 표현은 견디기 어려웠다. 인터뷰하기 전에 어디 광야로 가서 40일간 금식이라도 했던 것일까. 아니면 자기 몸만한 펜과 녹음기를 사용했나. 마치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가 베르길리우스나 베아트리체를 대할 때의 모습과 비슷했는데 적어도 그때의 단테는 실제로 저승에 있다는 설정이기라도 했다. 아래는 뭐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간지러운 표현이다.


 나는 스승의 말씀이 하나하나 달고 새로워 더 깊이 지혜의 두레박을 내려도 된다고 스승을 부추겼다.


 또한 인터뷰 대화를 옮기면서 대화 앞에 마치 대본처럼 아래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호통치며), (힘줘서), (반색하며), (놀라며), (눈을 빛내며), …


 인터뷰 당시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옮겨오고 싶었던 것 같은데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읽기가 너무 어려웠다. 앞뒤 맥락이나 대화 내용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감정들을 굳이 대본식으로 표현해 놓아서 오히려 두 사람의 대화에 실린 감정이 진심이 아니라 연기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 정도는 독자에게 맡겨도 됐을텐데.

 또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 같아서 병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단어는 영어를 병기해 놓았으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를 것 같은 ‘노모스(nomos)’나 ‘피지스(physis)’ 같은 단어는 오히려 영어 병기를 생략해 놓아서 도대체 그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꾹 참고 넘긴 책장

 그런 이 책의 책장을 넘긴 건 선물해 준 분이 책을 보내기 전에 먼저 보내 주셨던 아래 문단이 아주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쓸 말이 없어서 남의 얘기나 옮겨봐. 그건 서생이지. 글자 쓰는 사람. 글 쓰는 사람이 아닌 거야. 사람들은 글씨 쓰는 사람과 글 쓰는 사람을 혼동하는데. 글씨 쓰는 사람은 서경이네. 베끼는 사람.


 가슴 아픈 내용이었다. 내가 주 5일, 하루 8시간씩 꼬박꼬박 하고 있는 일이 서생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이런 얘기가 나온 건지 궁금해졌다.

 사실 나는 이어령이라는 사람을 잘 알지 못했다. 언젠가 언론에서 크게 다뤘던 ‘디지로그’라는 단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이 책을 선물해 준 분이 그동안 보여준 안목과 왠지 저 문단 앞뒤로 뭔가 건질만한 내용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억지로 책장을 넘기게 만들었다.


서서히 둔해진 감각

 악취도 계속 맡다 보면 조금씩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느냐일텐데 다행히 이 책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조금씩 인터뷰어를 배제하고 인터뷰이에게 집중할 수 있었고, 그렇게 인터뷰이의 말을 듣다 보니 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어령이라는 사람이 한 얘기에 모두 공감한 것은 아니었다. 한 번씩 불거져 나오는 그의 기독교 정서, 특히 질서를 잡고 선악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나 누군가에겐 중세가 더 행복했을 것이라는 얘기는 정말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또한 구시대적 사고관에 기반한 남녀 차별적 발언과 혼밥을 바라보는 시각, 혈액형에 따른 성격 분류에 관한 얘기는 읽으면서 뜨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와 맞지 않았던 그런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얘기에 공감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결국엔 몰입

 문체만 걷어내면 이 책은 전체적으로 아주 영양가가 좋은 책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몰입하게 됐던 부분들을 모아봤다.


서생과 예술가의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인생

 ‘서생’에 관한 얘기로 충격을 받고 힘이 쭉 빠져 있던 내 마음에 다시 열정을 불어 넣어준 얘기를 먼저 소개하겠다.


 세상을 생존하기 위해 살면 고역이야. 의식주만을 위해서 노동하고 산다면 평생이 고된 인생이지만, 고생까지도 자기만의 무늬를 만든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해내면, 가난해도 행복한 거라네. … 월급 더 많이 받고, 자식이 더 좋은 학교 가고… 이게 목적이 되면 그건 리빙이야. 진선미에서 오는 기쁨이 없지. 그러니까 돈은 더 벌지 몰라도 인생이 내내 고된 거야. 진선미를 아는 사람은 밥을 굶어도 웃는다네. 공자가 그러지 않나.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에는 식사를 잊어버린다고. 자는 걸 잊고 먹는 걸 잊어. 의식주를 잊어버리는 거지. 그게 진선미의 세계고, 인간이 추구하는 ‘자기다움’의 세계야.
 돈을 받는 노동이라도 자기 생각이 들어가 있고 자기만의 성취의 기준이 있어. 그때 비로소 ‘그림자 노동’에서 벗어나는 거야. 예술가가 되는 거야. 노동을 하는 순간에도 예술을 하고 있는 거야. … 자본주의라도 노동은 재미없는 거야. 인생 그렇게 살면 노예 되는 거야. 노예는 사회주의에도 있고 자본주의에도 있어. 반대로 예술은 사회주의에서도 할 수 있고 자본주의에서도 할 수 있어. 단, 그러려면 자유의지가 있어야 하네. 길을 일탈해서 길 잃을 자유가 있어야 해. 그게 선이든 악이든 일단 나의 행위가 있어야 하는 거지.


 결국 내가 서생인지 예술가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다. 내가 그저 끌려가듯 업무에 임하면 나는 서생이 되는 것이고,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주도적으로 업무를 이끌어 나가면 예술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여러 사람에게 수시로 듣게 되는 입바른 소리 같지만 원래 입바른 소리는 그런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꾸준히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기에 주기적으로 독감 주사 맞듯이 한 번씩 들을 필요가 있다. 이번 주사는 이어령 선생님이 놔주셨다. 그는 위와 같이 말한 뒤 인터뷰어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 대화가 노동이 될래? 예술이 될래? 그게 자네에게 달려 있네.


 이 말은 나에게 ‘이 업무가 노동이 될래? 예술이 될래? 그게 자네에게 달려 있네.’로 바뀌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다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잠시 초심을 잃고 수동적인 자세로 업무에 빠져 허덕이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팔다리를 휘저어 업무를 헤치고 헤엄쳐 나아갈 수 있게 됐다.


대가에게도 쉽지 않았던 완벽한 글쓰기

 이 책의 곳곳에서 글쓰기가 쉽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이어령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평생을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정진해 온 그였지만 죽음을 앞둔 그 순간까지 자신의 글에 100% 만족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아니라네. 난 매번 KO패를 당했어. 그래서 또 쓴 거지. 완벽해서 이거면 다 됐다, 싶었으면 더 못 썼을 거야. ‘갈매기의 꿈’을 쓴 리처드 바크는 갈매기 조나단의 생애를 쓰고 자기 타자기를 바닷속에 던져 넣었다잖나. 그걸로 다 썼다는 거지. 난 그러지 못했네. 내가 계속 쓰는 건 계속 실패했기 때문이야. 정말 마음에 드는 기막힌 작품을 썼다면, 머리 싸매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을까 싶어.
 글을 쓴다는 것은 앞에 쓴 글에 대한 공허와 실패를 딛고 매번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그가 환하게 웃었다.
 모르겠어. 나는 평생 도전이 필요한 인간이었네. 계속 쓰고 또 쓰고 다시 썼네. 강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다시 하는 거라네.
 실토하지 않을 수 없군. 글이 안 써지는 거야. 내가 암에 걸리고 마지막이 되고, 그러면 ‘메멘토 모리’를 감각화하는 기가 막힌 글이 나올 것이다. 절실한 얘기가 나올 것이다. 그런데 안 돼. 당황스럽더군. 그래서 기도했지. 오 주여, 나에게 용기를 주옵소서… 이해할 수 있나? 글이 안 써져. 읽을 수도 없고. 어떤 글을 써도 평범해. 중학교 학생 작문 같은 것밖에 못써. 그게 죽음이야. 내 모든 지식, 모든 생각을 가루로 만들어버리더군. 다 지워버렸어. 암세포는 내 몸의 지우개였어. 내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모든 것의 지우개였어. 지우개로 지워놓으면 내가 뭘 쓰나? 공백이야.


 글을 잘 쓰고 싶어서 틈만 나면 키보드에 손을 올리지만 며칠이 걸려도 마음에 드는 문장 하나 뽑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와중에 동지를 만난 느낌이었다.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 차이가 나는 동지이긴 하지만.

 또한 다른 누구의 기준도 아닌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고 죽는 그 순간까지 그 기준을 달성하기 위해 달려가는 그의 모습에, 그의 삶의 태도에 감명받았다.

 번외로 글쓰기와 관련된 건 아니지만 아래 말에도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한 시간 강연만 하고 나와도 밤에 자다가 악 소리를 내는 사람이 나야. 가지 말아야 할 자리에 갔구나. 바보 같은 소리를 했구나….


 사내 메신저로 회사 사람들과 업무 얘기를 하고 나서, 아니면 가족이나 친구들과 카톡을 주고받고 나서, 혹은 누군가와의 술자리를 마치고 나서 저런 생각을 한 적이 정말 많았는데 이어령 같은 사람도 종종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걸 알고 나니 큰 위안이 됐다.  


이어령의 개인주의자 선언

 예전에 문유석 작가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고 나서 이런 책이 나왔다는 사실에 정말 가슴 깊이 기뻐했던 적이 있었다. 빌어먹을 대한민국 사회가 오로지 인싸의, 인싸에 의한, 인싸를 위한 세상 같았고 그저 떼 지어 몰려다니는 것만 좋아하는 사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으면서, 또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걸 보면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나와 문유석 작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조금 더 나이가 많은 동지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자네도 짐작하겠지만, 나는 그동안 집단주의, 국가주의를 경멸해왔네. 바글바글한 데는 끼고 싶지 않아서 해수욕장도 안 갔어. 사람들 잔뜩 있는 곳에서 군중의 한 사람으로 끼어 있는 게 싫었다네.
 무리 속에 숨어서 안전하게 살고 싶은 생각이 한 번도 없으셨어요?
 싫어. 보들레르도 그랬잖아. ‘주여, 내가 저들과 똑같은 숫자의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쓰게 하소서.
 아름다운 오만이군요!
 오만이 아니야. 인간은 다 그래야 하는 거야.
 내가 타인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건 ‘떼’로 사는 거라네. 떼 지어 몰려다니는 거지. 그게 어떻게 인간인가?


 바글바글한 데 끼기 싫어서 해수욕장을 가지 않았다는 그를 보며 회식과 행사를 싫어하고 지하철에서 양옆에 사람이 앉는 게 싫어서 구석자리를 찾아 맨 앞 칸까지 갔다는 문유석 작가가 떠올랐다. 이 분은 심지어 거기서 더 나아가서 '인간은 다 그래야 한다'고까지 얘기하고 있다.


 나를 만족시킬 만한 스승이 없다는 것과 같아. 인간이라는 존재는 바깥에서 나를 바꾸도록 용납하지 않는다네. 남이 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 어려운 일이야. 성인군자의 아들도 나쁜 짓을 해. 아버지의 선한 피를 받았는데도 교화가 안 되지. 공자님은 아들을 가르치지 않았어. 가르칠 수 없는 거지. 가장 가까운 피붙이조차 가르칠 수 없어. 결국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엉터리라네. 남을 가르칠 수도 없고 남에게 배울 수도 없어. 인간이 그런 존재야. 거기로부터 시작해야 하네. 그게 실존이야. ‘나는 혼자다’라는 걸 모르는 사람과는 얘기가 통하지 않아. 군중은 남이 이 말하면 이리로 가고, 남이 저 말하면 저리로 가지. 휩쓸려 다녀. 자기가 없으니까 자꾸 변하는 거라네.
 자기라는 게 뭔가요?
 자기는 남에게 배울 것도 없고 남을 가르칠 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나’라고 할 수 있지.


 다행히 내 주변엔 '나는 혼자다'라는 것을 알고 나서 그 위에 '우리는 함께다'를 쌓아 올린 사람들이 몇몇 있다.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참 다행이다.


진, 선, 미 구분하기

참과 거짓의 세계, 선악의 세계, 미추의 세계는 범주가 달라.


 참과 거짓의 세계인 진, 선악의 세계인 선, 미추의 세계인 미. 이 세 영역은 서로 구분해야 하는 다른 영역이다. 참이면서 악인 것이 있고, 거짓이지만 아름다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을 줄 세우는 수단으로 진선미를 사용하고 있는 사회에서 진, 선, 미 각각의 가치와 영역을 구분하며 살아가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또 다른 거라네. 참을 다루는 진도, 행위를 다루는 선도 아니야. 제 각자 미를 느끼고 판단하는 것은 표현의 영역이라네.
 생각을 다루는 인지론, 실천을 다루는 행위론, 표현을 다루는 판단론. 인간으로 풍부하게 누리고 살아가려면 이 세 가지 영역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네.
 철학자 칸트가 바로 그 세 가지 영역을 질서 있게 정리했어. 진실은 순수이성비판에서 다루고 선악의 윤리 문제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다루고 아름다움에 관한 것은 판단이성비판에서 다뤘지.


 맨날 읽어봐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아직 칸트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는데 올해에는 그의 책 중에서 가장 유명한 순수이성비판 하나만이라도 꼭 읽어봐야겠다.


인문학은 교양이 아니다

 ‘문송합니다’라는 말이 유행을 할 정도로 현대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이과의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인문학은 슬램덩크에 나오는 강백호의 왼손 역할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저 거들뿐.


 그렇지. 법의 잣대로 볼 때는 ‘소설 쓰시네요’라는 말이 얼마나 비웃는 얘긴가. 법으로 보면 소설이 가소롭겠지만, 소설계에서 보면 법이야말로 웃기는 말장난이야. 소설이 진리에 더 가깝지. 법은 내일이라도 바뀌어. 지역에 따라 달라져. 여기선 불법이 저기선 합법이지. 그게 무슨 진리인가. 그런데 소설로 쓰인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는 러시아 전쟁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어도 마치 내 비극의 가정사처럼 느껴지거든.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들인데도, 내 형제자매 같지. 그게 기호계의 힘이야. 그래서 나는 답답하다네. 과학 하는 사람, 정치하는 사람, 경제 하는 사람이 문학을 알아야 해. 교양으로 인문학 하라는 게 아니야. 인문학은 액세서리가 아니라네.


 이어령은 단순히 인맥 관리를 위한 스몰 토크의 소재 거리로 인문학을 찾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고 인간적인 사회로 만들기 위한 필수 학문으로 인문학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길 바랐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조금 더 멀리 봐야 한다. 당장 별로 돈이 되지 않는다고 인문학을 등한시하면 안 된다. 인문학은 사회적 관점에서의 시야를 넓혀준다. 누군가가 우리를 떠올릴 때 그 우리에 속하는 사람의 범위를 넓혀준다. 인류는 이미 몇 번이나 스스로를 멸망시킬 수 있는 수단을 손에 쥐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범위를 끊임없이 넓혀 나가야 한다. 그래야 공멸을 막을 수 있다.  


죽음을 대하는 그의 태도

 이어령이 자신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아래 두 문단에 잘 나와 있다.


 파도는 아무리 높게 일어나도 항상 수평으로 돌아가지. 아무리 거세도 바다에는 수평이라는 게 있어. 항상 움직이기에 바다는 한 번도 그 수평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다네. 하지만 파도는 돌아가야 할 수면이 분명 존재해. 나의 죽음도 같은 거야. 끝없이 움직이는 파도였으나, 모두가 평등한 수평으로 돌아간다네. 본 적은 없으나 내 안에 분명히 있어. 내가 돌아갈 곳이니까.
 내가 느끼는 죽음은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낙비나 조용히 떨어지는 단풍잎이에요. 때가 되었구나. 겨울이 오고 있구나…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 침대에서 깨어 눈 맞추던 식구, 정원에 울던 새, 어김없이 피던 꽃들… 원래 내 것이 아니었으니 돌려보내요. 한국말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죽는다고 하지 않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애초에 있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갑니다.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이보다도 잘 설명한 글이 있을까. 언젠가 나도 내 죽음을 목전에서 마주하게 됐을 때 꼭 이 두 문단을 떠올리고 싶다. 나는 나의 죽음을 꼭 그와 같은 태도로 맞이하고 싶다.

 또한 이 책에는 죽음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일화도 실려 있었다.


 "눈감기 전에 꼭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네."
 신입생을 위한 강연을 하고 내려오던 길이었다고 했다. 학생 한 명이 발을 동동 구르며 주차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추위에 얼굴이 파래져가지고, 나한테 꼭 할 말이 있다는 거야.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그러더군. '선생님, 돌아가시면 안 돼요!' 생뚱맞은 말에 나는 몹시 당황했네. 그래서 그만 차갑게 툭 던지고 말았지. '학생! 그게 뭔 소린가? 죽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내 맘대로 하나?' 그 학생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슬퍼하며 돌아갔네. '선생님, 그래도 돌아가시면 안 돼요....' 하면서. 얼마 전에 그날의 일들이 떠올랐어. 그 아이는 아마 내 책을 읽고 나를 좋아하게 됐겠지. 그런데 한 존재에 깊이 의지하면 '이 사람이 이 세계에서 사라지면 어쩌나' 더럭 겁이 나거든. 어렸을 때 엄마와 애착이 심해지면 치맛자락 붙잡고 그러잖아. '엄마, 나 두고 죽으면 안 돼.' 그때 어머니가 뭐라고 그래? '엄마 안 죽어. 너 두고 절대 안 죽어.' 그러면 마음이 풀리고 안심이 되지. 아무리 어린애라도 죽는다는 걸 왜 몰라. 그런데 엄마가 '너 두고 절대 안 죽는다' 그러면 그 순간 우리에게 죽음이란 없는 거야. 우리가 죽음을 이기는 거라네."
 선생님은 오래전에 스무 살이었던 그 학생을 다시 만나 이야기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때 그렇게 매정하게 떠나는 게 아니었다고. 30분 넘게 추위에 덜덜 떨며 당신을 기다리던 그 아이에게 이 말을 했어야 했다고.
 "걱정하지 마. 나 절대로 안 죽어."
 스승은 환희에 차서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내게 해줬던 것처럼 ‘걱정 마. 나 절대로 안 죽는다’ 그러면 그 아이는 얼었던 두 손을 비비며 너무 기뻐하겠지. 그 순간 주차장의 자동차들은 팡파르처럼 경적을 울릴 거야. 죽음을 이긴 승리의 트럼펫이 울리는 거야. 그러면 그 춥고 멋없는 콘크리트 차고는 초원으로 변하고 꽃들이 사방에서 피어나겠지."
 ‘내가 영화감독이라면 엔드 마크 대신 장미꽃 한 송이를 올려놓겠다’던 그의 말이 그렇게 실현되었다.
 "나 절대로 안 죽어."


 부모님이 생각나서였을까,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였을까. 이 책을 읽는 내내 인터뷰어의 거창한 비유가 눈엣가시처럼 거슬렸는데, 이 대목만은 읽는 순간 그 장면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가득 펼쳐졌고, 머릿속에선 아름답고 짜릿한 기쁨과 슬픔이 마치 폭죽처럼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마치며

 이 책에서 그는 무신론자였다가 기독교인이 됐다고 말했다. 어떤 계기였을까. 따님이 목사였다고는 하나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이어령이라는 사람은 그저 가족이 권한다고 기독교인이 됐을 것 같지는 않은데. 분명 신을 인정하고 믿게 된 논리적인 이유가 있었을 텐데. 독서록을 쓰는 지금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무척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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