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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nugeun May 01. 2022

사회계약론, 독서록

굳이 다 같이 모여서 이렇게 살 바엔 모두 함께 자연으로 돌아가자!

 나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법을 있을 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정당하고도 믿을 만한 통치 법칙이 정치 사회 속에 있을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연구에서 권리가 허용하는 것과 이해타산이 명하는 것을 끊임없이 조화시키고자 노력할 것인데, 그것은 정의와 이익이 결코 분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루소가 서문에 밝힌 책의 목적이다. 책을 읽고 나니 서문의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유를 보장한다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법을 있을 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사문화된 법이 없고 입법과 사법이 제대로 이뤄지는 법치주의를, 정당한 통치 법칙은 각 구성원이 모두 동의하고 기꺼이 따를 수 있는 정당한 권위를 획득한 통치 법칙을, 믿을 만하다는 것은 이 통치 법칙이 일부 구성원이 아닌 모든 구성원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설계됐으며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믿음을 확보했고 실제로도 그러한 통치 법칙을 말한다.


 사회계약론의 핵심은 각 구성원이 자유롭게 계약에 합의하는 구조로 형성한 공동체와 그 통치체만이 정당한 권위를 얻을 수 있다고 바라보는 것이다. 루소는 왜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한 뒤 그렇게 형성된 사회의 주권과 법, 정부, 투표 방식, 선거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더 나아가 지역 균형 발전이나 독재가 필요한 시기, 종교와 국가의 관계까지 다룬다. 외교와 같은 국제 관계를 제외한 국가 제도 전반을 거의 다 아우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책의 얇은 두께를 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구체적인 방식을 다루는 것은 아니고 철학적인 차원에서의 논의다. 


 읽다 보면 민주주의의 뼈대를 이루는 설명들이 많이 나온다. 그래서인지 책의 뒤표지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루소가 나의 왕국을 무너뜨렸다 - 루이 16세


 루이 16세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시기의 프랑스 왕으로 프랑스혁명 당시 국외로 도피하다가 붙잡혀 와서 재판장에 끌려가 사형을 언도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왕이다. 루소가 실제로 프랑스혁명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루소는 1778년에 세상을 떠났고 프랑스혁명은 그로부터 11년 뒤에 일어났다. 루소가 직접 참여하진 않았지만 그의 사상이 프랑스혁명에 큰 영향을 주었기에 이런 문구를 적어 놓은 것 같다. 


 여담으로 루이 16세가 어떤 상황에서 이런 말을 뱉은 것인지 전후 맥락을 좀 더 확인하고 싶어서 위 문구를 네이버와 구글에서 검색해 봤는데 결과로 나온 게 온통 내가 읽은 이 책과 관련된 것 밖에 없었다. 물론 출판사에서 어느 정도 확인을 하고 이런 문구를 실었겠지만 조금 의심이 간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이 책을 읽기 전에 루소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건 학창 시절에 시험을 위해 키-값 쌍으로 외웠던 ‘루소’ - ‘자연으로 돌아가라’가 전부였다. 그야말로 오직 시험을 위한 공부였다. 그 후 한 번도 루소란 사람이 왜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건지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외울 당시에 저 문구만으로 지레짐작해서 루소란 사람이 요즘의 환경보호론자나 자연주의자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던 건가 추측했을 뿐이었다. 만약 루소가 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는지 그 연유를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 


 그러다 최근에 사회계약론에 구입하고 읽으면서 이 책을 쓴 루소가 예전에 외웠던 ‘자연으로 돌아가라’의 그 루소라는 것을 알고 난 뒤 조금 혼란스러웠다. 내 기억에 루소는 사회를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사람인데 왜 갑자기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사회를 인식하고 구성해 나가야 하는지 얘기했던 걸까. 


 그제야 궁금해서 검색해 봤고, 루소가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이유가 불균형하게 분배된 사유 재산과 지배-피지배로 나뉜 계급 구조 등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민주주의 사회는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가


 사회계약론을 읽다 보면 제목을 ‘민주주의 사회는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가’로 바꿔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 이 책이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됐는지 알 수 있다. 마치 법치주의 국가 설립 가이드를 보는 것 같은 이 책은 여러 사람이 모여 하나의 사회를 구성할 때 그들 모두에게 공유돼 공감과 동의를 얻어야 할 사안들을 모아 놓았다. 


 그럼 내용을 한 번 요약해 보겠다. 요약한답시고 책을 그대로 옮겨 놓은 형태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소개하고 싶은 내용이 너무 많아서 실패한 것 같다. 우리 모두 곁에 두고 꼭 한 번씩 읽어야 할 책이다.



내용 요약


1부

 루소는 여러 사람이 모인 공동체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위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힘의 논리에 기반한 권위인지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이 합의한 정당한 권력의 논리에 기반한 권위인지 살펴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참고로 루소는 공동체에서 권위의 정점에 있는 사람을 ‘최강자’라고 지칭한다. 의미를 생각하면 맞는 표현이지만 조금 유치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최강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힘을 권리로, 그리고 복종을 의무로 변화시키지 않는 한 계속해서 주인이 될 만큼 결코 강할 수는 없다. 

 힘에 복종하는 것은 불가피한 행위이지 자발적인 행위는 아니다. 기껏해야 조심성에 기인한 행위일 뿐이다. 그럴진대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 도덕적 의무일 수가 있을까?

 권리를 만드는 것은 힘이 아니라는 것을, 따라서 정당한 권력에만 복종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 

 어떠한 인간도 자기와 같은 인간에 대해 타고난 권위를 갖지 못하기에, 그리고 또 힘은 어떠한 권리도 만들어내지 못하기에 인간들 사이에 남아 있는 정당한 권위의 기초는 오로지 계약뿐이다. 


 바로 이 생각이 사회계약론의 뿌리가 되는 생각이다. 여기에 루소는 자유를 더한다. 이로써 각 구성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사회계약은 정당한 계약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격과 인간이 갖는 권리, 심지어는 자신의 의무까지도 포기하는 일이다. … 그러한 포기는 인간의 본성과 비양립적이며, 그의 의지에서 자유를 모두 제거해 버리는 것은 그의 행동에서 도덕성을 모두 제거해 버리는 것과 같다. 


 의지에서 자유가 제거된 사람의 행동에는 도덕성이 없기 때문에 자유가 보장된 사람들의 자발적 계약으로 구성된 사회만 정당한 권위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내용을 조금 더 확장시켜보면, 노예들이 체결한 계약은 의미가 없고, 자발적으로 노예가 된 사람들은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에는 어떤 의미도 부여할 필요가 없고 부여해서도 안 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공동체로 묶인 각 구성원은 공동체의 의견에 따라야만 하기 때문에 공동체에 참여하는 순간 자신의 자유를 잃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루소는 그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계약으로 형성되는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공동의 힘으로 각 구성원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보호해 주는 결합 형태, 즉 각자가 전체와 결합되어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게 하면서 이전과 다름없이 자유롭게 남아 있게 하는 그런 결합 형태를 찾아내는 것


 루소는 이런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각 구성원을 그가 가진 모든 권리와 함께 공동체 전체에 전적으로 양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와 같은 형태로 결합하면 아래 세 가지 이유로 위와 같은 특성을 지닌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첫째, 각자가 자기 자신을 모조리 내주기에 조건은 모두에게 동일하며, 또 조건이 모두에게 동일하기에 누구도 타인의 조건을 더 무겁게 만드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둘째, 양도가 전적이기에 결합은 더없이 완전하며, 어떠한 구성원도 이제 주장할 권리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셋째, 각자는 전체에게 자신을 양도하기에 아무에게도 양도하지 않는 것이 되며, 모든 구성원은 자신이 양도한 권리와 동일한 권리를 타인들로부터 받기에 그가 잃은 모든 것과 동일한 대가를, 뿐만 아니라 그가 소유하는 것을 보호하기 위한 더 많은 힘을 얻는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의문이 발생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원칙 아래 공동체를 형성했다고 해도 각 구성원이 공동체의 모든 결정에 매번 모두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앞서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에 대해 타고난 권위가 없다고 말한 루소는 공동체에서 이견이 있는 사항을 결정할 때 다수결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자는 합의 자체는 최초에 전원 합의로 결정해야 한다고 한 점이다. 루소는 이 합의가 있어야 다수결에 따라 어떤 사항을 결정했을 때 그 사항에 반대했던 소수가 다수의 선택을 따라야 할 의무가 생긴다고 말한다. 


이후 루소는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미꾸라지를 잡기 위한 방편을 마련한다.

 

 의무는 이행하려 들지 않은 채 시민권만 향유할 것이다. 그것은 부당한 행위로, 그 행위가 진척되면 결국 통치체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계약 속에는 그것이 빈 공식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보편적 의지에 복종을 거부하는 자는 누구나 집단 전체에 의해 복종을 강요당할 것이라는 약속이 암묵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그 약속만이 다른 약속들의 효력을 발휘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민에게 자유롭도록 강요하는 것 외의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 이 조건이 없을 경우 시민으로서의 그 약속들은 터무니없고 압제적인 것이 되어, 엄청나게 악용되기 쉬울 것이다. 


 루소는 이어서 토지 소유권에 관해서도 의견을 밝히는데 그중 선점권에 대한 의견이 인상 깊었다. 


 일반적으로, 어떤 토지가 되었든 그 토지의 선점권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그 토지에 아무도 거주하지 않을 것, 둘째,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점유할 것, 셋째, 쓸데없는 의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동과 경작을 통해 점유할 것. 이것이야말로 법률상의 권리는 없지만 타인으로부터 틀림없이 존중받을 소유에 대한 유일한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 획득이 어떤 식으로 행해지든, 각 개인이 자기 자신의 토지에 대해 갖는 권리는 언제나 공동체가 모든 토지에 대해 갖는 권리에 종속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회적 유대에서는 견고함이, 주권 행사에서는 실제적인 힘이 없을 것이다. 


 주기적으로 불거지는 농지법 위반 사례가 떠오르기도 하고 한때 화제가 됐던 토지 공개념 3법이 떠오르기도 한다.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 위와 같은 루소의 생각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기본적으로는 위 생각에 동의한다. 여기까지가 1부다. 


2부

 흔히 국가를 이루는 세 가지 구성 요소로 국민과 주권, 영토를 꼽는다. 국민과 영토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니 이제 주권 차례다. 2부에서는 정당한 권위 위에 형성된 공동체의 주권이 어떠해야 하는지 꼭 갖춰야 할 특성을 설명하고, 이 주권 행사의 틀이 될 법에 관해 이야기한다. 


 루소는 먼저 주권은 양도할 수 없고, 분할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이 부분은 아마 요즘 시대에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식 선에서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주권의 한계를 짚어보기 전에 공동체의 생각인 보편적 의지가 오류를 범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얘기한다. 이 부분에서 거대 양당의 선동에 넘어가 자기가 속하거나 지지하는 당이 마치 자기 자신 그 자체인 양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이 나온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원하지만,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항상 잘 구별하지는 않는다. 
 전체의 의지와 보편적 의지 사이에는 대개 큰 차이가 있다. 후자는 오로지 공통의 이익과만 관련된 데 반해, 전자는 개인적인 이익과 관련되며 따라서 개별적인 의지의 총합일 뿐이다. 그런데 그 개별적 의지들에서 서로 상쇄하는 과부족 의지 부분을 빼면 보편적 의지가 남는다.
 파당적 집단들이 만들어질 때 그 파당적 집단 각각의 의지는 자신의 구성원들에 대해서는 보편적인 것이 되지만 국가에 대해서는 개별적인 것이 된다. 그때에는 인원수만큼의 투표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파당적 집단 수만큼의 투표자만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의견의 차이는 줄어들기에, 그로부터 도출되는 결과는 보편성을 덜 띤다. 요컨대 그 파당적 집단들 가운데 하나가 너무 커서 그 밖의 모든 집단을 압도하면, 당신은 이제 작은 의견 차이들의 총화가 아닌, 단 하나만의 차이만을 그 결과로 갖는다. 그리하여 더 이상 보편적 의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눌러 이긴 개별적 의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보편적 의지가 명확히 표현되려면 국가 내에 파당적 집단이 없어지는 것과, 시민 각자가 자신의 의견에 따라 소신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위대한 리쿠르고스의 탁월하고 숭고한 제도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만일 파당적 집단들이 존재한다면, 그 수를 늘려 그것들 사이의 불평등을 예방할 필요가 있다. 솔론과 누마, 세르비우스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보편적 의지가 언제나 명백히 표명되고, 인민이 기만당하지 않게 하는 데 대한 적절한 대비책으로는 오로지 그것밖에 없다. 


 나 역시 루소의 생각에 절실히 공감하기에 이번 대선에서 안철수와 김동연이 제발 끝까지 완주해 주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꼭 끝까지 완주하겠다던 그 두 머저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명은 국민의 힘으로, 한 명은 더불어 민주당으로 자진해서 흡수돼 버렸다. 


 잠깐 얘기가 다른 곳으로 샜다. 핵심은 보편적 의지는 오류를 범하지 않지만, 전체의 의지와 보편적 의지는 다르기 때문에 무엇이 보편적 의지인지 제대로 판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체 집단이 아닌 집단 일부의 큰 목소리가 전체의 보편적 의지로 둔갑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얘기다. 


 이후 루소는 주권의 한계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이 부분에서 앞서 사회계약을 설명하며 언급했던 ‘각 구성원을 그가 가진 모든 권리와 함께 공동체 전체에 전적으로 양도해야 한다’는 설명과 대치되는 설명을 하기도 한다. 


 각자는 사회계약에 의해 자신의 힘과 재산과 자유를 전부가 아닌, 그중 공동체에 중요하게 사용되는 일부만을 양도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데 오로지 주권자만이 그 중요한 부분에 대한 판단자라는 점도 인정한다. 


 모든 권리는 물론 자기 자신까지 전적으로 양도해야 한다고 했던 루소가 갑자기 공동체에 중요하게 사용되는 일부만 양도하는 것이라고 하니 좀 의아했다. 최초에 사회계약에 따라 공동체에 전부 양도한 뒤 주권자의 판단에 따라 각자의 몫 혹은 각자가 관리해야 할 부분을 다시 배분받는 형태인 것인가 생각해 봤지만 이 역시 주권자의 판단에 따라 일부만 양도한다고 하는 루소의 설명과 맞지 않는다. 글을 길게 쓰다 보니 앞서 자기가 쓴 부분을 잊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겠다. 


 루소가 생각하기에 주권의 한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 가는 아래 두 발췌로 요약할 수 있겠다. 


 주권자는 공동체에 필요하지 않은 부담을 신민에게 지워서는 안 되며, 시민은 자신이 국가에 할 수 있는 모든 봉사를(목숨까지도), 주권자가 요구하자마자 바칠 의무가 있다. 시민들 사이의 사회계약은 시민들 모두가 동일한 조건에서 계약하며, 또 모든 권리를 동일하게 향유해야 한다. 보편적 의지의 공인된 행위는 모든 시민에게 똑같은 의무를 지우거나 혜택을 준다. 
 주권자의 권리와 시민권이 어디까지 확대되는지 묻는 것은, 시민들이 서로, 즉 각자가 전체와 전체가 각자와 어느 정도까지 약속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로부터 주권은 그것이 아무리 절대적이고 신성불가침한 것이라 할지라도 보편적인 계약의 한계를 넘지 못하며 넘을 수도 없다는 것과, 인간은 누구나 그 계약으로 자신에게 남겨진 재산과 자유를 전적으로 처분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주권자는 한 신민에게 다른 신민보다 더 큰 부담을 지울 권리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문제는 개별적이 되어 주권자의 권한 밖의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핵심은 계약은 상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생살권에 관해 이야기한다. 생살권이라는 표현이 조금 생소했는데 집단의 생존을 위해서 소수의 희생이 필요한 경우에 주권이 소수에게 그 희생을 강요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전쟁이 발발했거나 집단의 생존을 위해 위험한 공사를 해야 하는 상황을 떠올려 볼 수 있겠다. 이 역시 앞서 나온 주권의 한계를 설정할 때와 마찬가지로 핵심은 상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을 희생하고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원하는 사람은 필요할 때엔 마찬가지로 남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여기서 루소는 주권이 집행하는 형벌에 관해서도 이야기하는데 인상적인 부분이 있어서 발췌해왔다.


 형벌의 응징이 자주 행해지는 것은 언제나 정부의 무능과 무기력의 표시인 것이다. 쓸모 있게 만들 수 없는 악인은 없다. 비록 본보기로 처형을 한다 할지라도, 살려 둘 경우 오히려 위험할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처형할 권리가 없다.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형벌의 응징이 거의 없는데, 사면을 많이 해주어서가 아니라 범죄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국가가 망해 가고 있을 때에는 많은 범죄가 묵인되어 처벌을 면한다. … 잦은 사면은, 머지않아 중죄를 범해도 사면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데,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는 누구나 다 안다.


 법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특히 굵직한 범죄로 교도소에 들어갔던 기업가나 정치인들을 공정과 정의를 내세워 당선된 대통령이 사면해 줄 때 그런 사실을 새삼 뼈저리게 깨닫는다. 


 이제 루소는 법으로 넘어간다. 루소는 법을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우리는 사회계약으로 통치체에 존재와 생명을 부여했다. 그러니 이제는 입법으로 그 통치체에 활동과 의지를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법은 통치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규정한 것이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어떤 법을 만들어야 하는지 나열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썼다면 법전이 됐겠지. 법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정의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이어서 그와 같은 역할을 하는 법을 누가 만들어야 하는지, 즉 입법 행위를 누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국민에게 적합한 가장 좋은 사회 규칙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어떤 정신적 존재가 필요할 것이다. 인간의 모든 정념을 이해하지만 어떤 정념도 느끼지 않고, 인간의 본성과 관련이 없으면서 철저히 알고 있으며, 그의 행복이 우리와 무관함에도 우리의 행복에 큰 관심을 쏟고자 하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먼 훗날의 영광을 준비하면서 이전 세기에 노력하고 다음 세기에 그 결실을 향유할 수 있는 그런 뛰어난 정신적 존재다. 인간에게 법을 제정해 주는 데는 신들이 필요한 것이다. 


 응? 신이라고? 그렇다. 루소는 신이 입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루소의 냉소적인 표현은 책 속에 종종 등장해서 독서가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 준다. 그 무엇보다 공정해야 하고 통찰력이 필요한 작업이기에 이렇게 표현한 것 같다. 루소는 외국인에게 입법을 맡긴 그리스 도시 국가의 사례를 언급하기도 한다. 


 인간을 지배하는 자가 법을 지배하지 말아야 한다면, 법을 지배하는 자도 인간을 지배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 리쿠르고스가 그의 조국에 법을 제정해 주었을 때, 그는 왕위를 포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자신들의 법 제정을 외국인에게 맡기는 것이 그리스의 도시국가 대부분의 관습이었다. 근대 이탈리아의 여러 공화국들도 자주 그 관례를 따랐다. 제네바 공화국도 그랬는데, 그에 대해 만족해했다. 로마는 전성기에 한 사람의 지도자 손에 입법권과 주권이 모두 쥐어졌기에, 전제정치에서나 볼 수 있는 온갖 범죄가 되살아나는 것을 보았으며, 멸망할 뻔했다.


 이 사례를 그대로 적용할 순 없겠지만, 입법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했다는 사례는 현시대의 입법자들도 꼭 새겨 들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길고 긴 집권 기간 동안 내내 조용히 있다가 대선에 패배하자마자 갑자기 검수완박을 들고 나와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모자라 탈당 꼼수까지 동원한 입법 단체에서 특히 새겨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력의 찬탈자는 인민이 침착한 상태에서는 절대로 채택하지 않을 파괴성의 법을, 공중의 공포심을 틈타 통과시키기 위해 그 혼란기를 야기시키거나 택한다. 법 제정의 시기로 어느 때를 택하느냐는 것이야말로, 그것이 입법자의 행위이냐 폭군의 소행이냐를 구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이어서 루소는 인민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인민의 수준을 다루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 조금 민감하게 느낄만한 설명도 있다.


 건축가가 큰 건물을 세우기 전에 지반을 관찰하고 살펴보는 것처럼, 현명한 입법자도 먼저 법을 지켜야 할 인민이 그 법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지를 검토하지, 자체로는 훌륭할지라도 법을 대뜸 만들지는 않는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플라톤이 아르카디아인과 키레네 인들에게 법을 제정해 주는 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는 두 민족이 부유해서 평등을 받아들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지구 상에는 뛰어나지만 훌륭한 법을 감당하지 못한 국민이 수없이 많았다.
 사람에게처럼 인민에게도 성숙기가 있어서, 그들이 법에 복종하도록 하려면 그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인민의 성숙기를 알아보는 일이 항상 쉽지만은 않다. 
 자유는 어떤 풍토에서건 다 열리는 열매가 아니기에 모든 나라 인민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루소가 2부에서 말한 것들의 결과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아래 문단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만일 모든 입법 체계의 목적이어야 하는 구성원 전체의 가장 큰 이익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아보면, 그것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가지 주요한 목적으로 귀결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유가 목적인 것은, 모든 개인적인 종속은 그만큼 국가라는 단체의 힘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평등이 목적인 것은, 자유가 평등 없이는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다른 시민을 살 수 있을 만큼 부유하면 안 되고, 어느 누구도 자신을 팔아야 할 만큼 가난하면 안 된다. 


3부

 이어지는 3부는 정부에 관한 내용이다. 정부란 무엇인가로 시작해 정부에는 어떤 형태가 있고 각 형태의 장단점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먼저 루소가 생각하는 정부란 아래와 같다. 


 신민과 주권자 사이에 상호 연결을 위해 확립된 일종의 매개체로, 법 집행과 시민적이고 정치적인 자유의 보존을 책임지고 있다. … 단지 주권자의 관료에 불과한 그들은 주권자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주권자의 이름으로 행사한다.


 정부가 어떤 형태여야 한다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열린 답변을 내린다.


 인민에 따라 훌륭한 정부가 있을 수 있으며 같은 인민일 경우라도 훌륭한 정부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루소는 가장 뛰어난 정치 형태로 선거로 뽑는 귀족 정치를 꼽는다. 왜 민주 정치가 아니라 귀족 정치를 꼽는지 의아해 할 수 있는데 이 책에서 루소는 오직 직접 민주주의만을 민주주의로 간주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 제도는 루소의 입장에서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아닌 정도가 아니라 루소는 현재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대의 민주주의를 따로 ‘대의원, 혹은 대표자에 관하여’라는 꼭지까지 만들어서 신랄하게 비판한다. 


 조국애의 약화, 사익을 위한 활동, 국가의 거대화, 정복, 정부의 권력 남용은 총회에서 인민의 대의원, 혹은 대표자를 생각해 내게 만들었다.
 주권은 양도할 수 없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대표될 수 없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보편적 의지에 있다. 그런데 이 의지는 절대로 대표될 수 없다. 그것은 그것일 뿐이거나, 아니면 다른 것이다. 그 중간은 없다. … 인민이 직접 승인하지 않은 법은 어떤 법이든 무효다. 영국 인민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의회의 의원 선출 기간에만 자유로울 뿐이다. 의원을 선출하자마자 그들은 곧 노예가 되며, 별것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 짧은 자유의 기간 동안, 그들이 자유를 행사하는 것을 보면 자유를 빼앗겨도 마땅할 정도다. 
 당신들, 근대인들은 노예가 없다. 하지만 당신들 자신이 바로 노예다. 당신들은 자신의 자유의 대가를 치르고 노예의 자유를 얻는다. 그 선택을 아무리 자랑한다고 해도 나는 거기에서 인간성보다는 비굴함만 발견한다.
 인민은 대표자를 갖는 순간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 따라서 인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 우리가 겪고 있는 대의 민주주의의 단점을 아주 적나라하게 짚어줘서 뼈가 아플 정도다. 


 루소는 민주 정치가 실현되려면 국가가 아주 작아서 모든 결정 사항을 모든 시민이 모여서 투표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각 시민은 여론에 휘둘리거나 매표를 당하지 않을 정도로 부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평등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너무 많은 토의로 생계가 마비되지 않도록 까다로운 논의를 미연에 방지해 줄 만큼의 순박한 풍속도 필요하다고 한다. 아주 까다로운 조건으로 루소도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진정한 민주정치는 존재한 적이 없으며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선거로 뽑는 귀족 정치로 돌아와서, 루소는 선거로 뽑는 귀족 정치가 최상의 정부 형태라고 말하며 ‘선거라는 수단을 통해서 청렴, 견식, 경험, 그리고 다른 모든 대중의 선호와 존경의 이유들이 다 현명한 다스림에 대한 새로운 보증이 되고, 공사가 더 질서 있고 신속하게 처리되며, 가장 지혜로운 자들이 일반 대중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올바른 일이며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물론 루소 역시 ‘선거로 선출된 귀족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중의 이익을 위해서 다스린다고 확신하는 한’에서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하긴 하는데 사실 이런 귀족 정치가 루소가 신랄하게 비판한 대의원이나 대표자를 뽑는 형태와 무엇이 다른지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 대의원이나 대표자를 비판한 논리를 그대로 가져와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서 인민의 수준을 논의했던 루소는 그래도 귀족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이어서 루소는 정부는 끊임없이 권력을 남용하고 타락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통치체의 사멸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스파르타나 로마조차 멸망했는데, 어떤 국가가 영원히 존속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지속적인 제도나 조직을 만들고 싶다면, 그것을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 생각일랑 말자. 성공하기 위해서는 불가능한 것을 기도해서도 안 되고, 인간의 작품에 인간이 갖지 않은 불변성을 부여하려는 환상을 품어서도 안 된다. 


 시니컬한 루소의 면모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 루소는 언제 통치체를 사멸한 것으로 봐야 하는지 시점도 얘기한다. 


 법이 노후화되면서 약화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바로 그 사실이 그곳에는 더 이상 사법권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국가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루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국가가 살아 있지 않은 곳이 여러 군데 있는데 예를 들어 문재인 정부의 법무부 장관 주변이나 새로 들어설 윤석열 정부의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 주변이 그러하다고 볼 수 있겠다. 


 루소는 앞서 민주 정치가 실현하기 어려운 형태라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민주 정치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모든 시민이 모이는 게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며 실제로 로마에서는 모든 시민이 모였다고 얘기한다. 


 주권자는 입법권 이외의 다른 힘을 갖지 않기에 법에 따라 행동하며, 법은 보편적 의지의 진정한 행위이기에 주권자는 인민이 소집될 때에만 행동할 수 있다. 인민이 소집된다고! 얼마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인가! 그런 일은 오늘날에는 공상 같은 일일 뿐이나, 이천 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이 변했다는 말인가?
 로마는 실제로 자주 인민을 소집해 주권자로서의 권리뿐 아니라, 정부의 일부 권리도 행사했다. 상당한 양의 국사를 다뤘고 소송 재판도 했다. 모든 인민은 광장에서는 대체로 시민이자 행정관이었다. 초기 국가들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대의 정부 대부분은 마케도니아나 프랑크족들의 정부 같은 군주제까지도 이와 유사한 회의(conseil)를 가졌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정신적인 일에서 가능성의 한계는 생각보다 좁지가 않다. 그것을 축소시키는 것은 우리의 유약함과 악습과 편견이다. 저속한 영혼의 소유자들은 위대한 인간을 믿지 않는다. 비천한 노예들은 자유라는 말에 빈정거리는 태도로 비웃는다. 


 시니컬 루소가 다시 한 번 등장했다. 방대한 영토를 자랑했던 로마가 실제로 인민을 소집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었다. 루소는 이런 민주 정치는 인민 역시 그에 걸맞은 성품을 지녀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민주정치, 또는 인민 정부만큼 자칫 내전과 소요에 휘말리기 쉬운 정부도 없다는 것을 덧붙여 두고자 한다. 그토록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형태의 변화를 지향한다든지, 자기 유지에 경계와 용기를 이보다 더 요구하는 정부 형태는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런 구조 안에서 시민은 힘과 의연함을 겸비해야 하며, 한 덕망 높은 폴란드 주지사가 의회에서 했던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는 위험한 자유를 택할 것이다.”라는 말을 날마다 마음속에 되뇌어야 한다. 만일 신의 인민이 있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민주적으로 다스릴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완전무결한 정부는 인간들의 처지에는 맞지 않는다.


 말이 쉽지 노예의 평화보다 위험한 자유를 선택하는 것은 덕망 높은 사람도 날마다 마음속으로 되뇌어야 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지금 현실이 개판인 이유도 이게 어렵기 때문이다. 종종 노예의 평화를 택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워졌다. 참고로 루소의 생애를 살펴보니 루소 형님도 본인의 삶을 되돌아볼 때 떳떳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정부의 월권행위를 막는 방법을 언급하는 부분에선 현대 사회에서도 꼭 고려해야 할 만한 것들을 언급한다. 


 합법적이고 정당한 행위와 폭동의 소요를 구별하고 인민 전체의 의지와 한 도당의 주장을 구별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절차의 준수에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지나침이 없건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https://www.yna.co.kr/view/AKR20220430037900001?input=1195m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강요하는 침묵이나 인민에게 범하게 만드는 불법행위를 이용하여, 두려워서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의 동의를 아전인수격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 용감하게 입을 여는 사람들을 응징한다.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루소의 조언이 효력을 잃지 않은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나라나 바다 건너 나라나 권력을 가진 놈들은 늘 권력을 남용하려 들기 때문일 것이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430500006&wlog_tag3=naver


 이런 정부의 월권행위를 막을 수 있는 방법으로 루소는 정례 총회를 이야기한다. 법으로 정의해 놓아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기가 법의 위반자이며 국가의 적이라고 선언하지 않고는 막을 수 없는, 정기적으로 항상 열리는 정례 총회를 만들고, 이 정례 총회에 다음 두 가지 안건이 필히 올라와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주권자는 현행의 정부 형태를 유지하기를 원하는가
 둘째, 인민은 현재의 정부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맡기기를 원하는가. 


 현재 우리나라도 정기적으로 국민 전체가 참여하는 여러 선거가 열리고 있으니 위 두 가지 안건을 상정하고 그 결정을 인민(국민)에게 맡기라는 내용이 반 정도는 구현돼 있다고는 할 수 있겠다. 다만 나머지 반은 앞서 루소가 비판한 것처럼 대의 민주주의라는 형식에서 오는 폐해 때문에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


 이밖에도 루소는 지역 균형 발전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정책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주기적으로 회자되는 수도 이전 정책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아예 수도를 정하지 말고 정부의 소재지를 계속 옮기라고 조언하기도 하고, 영토에 골고루 주민이 살게 하라거나, 그 주민들이 어디를 가나 똑같은 권리를 누리게 하라, 어디에서나 풍요와 활기를 똑같이 향유하게 하라는 등의 조언을 한다.


4부

 드디어 마지막 4부다. 4부의 첫 번째 장인 ‘보편적 의지는 소멸될 수 없다는 것’에서 루소는 국가에 어떻게 망조가 드는지 그 과정을 잘 요약해 놓았다.


 사회적 유대가 느슨해져 국가가 약화되기 시작할 때, 사적인 이해관계가 의식되고 소집단들이 전체 집단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할 때, 공동의 이익은 변질되며 반대자가 생기고 투표에서는 더 이상 만장일치가 지배적이지 않게 된다. 따라서 보편적 의지는 더 이상 전체의 의지가 아니다. 그리하여 반대와 갈등이 생기고, 아무리 좋은 의견도 다툼이 없이는 통과되지 않는다. 마침내 멸망에 가까운 국가가 가공적이고 텅 빈 형태로만 존재할 뿐이며, 사회적 유대가 모두의 마음속에서 끊어져 버려, 가장 비루한 이해관계가 공익이라는 신성한 이름으로 치장될 때, 그때 보편적 의지는 입을 다물어버리게 되고 알 수 없는 이유에서 모두는 시민으로서 더 이상 의견 개진을 하지 않게 되어 국가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같이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개별적인 이익만을 목적으로 갖는 불공정한 법령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속여 통과시킨다.


 ‘이거 뭐야. 이거 지금 우리나라잖아?!’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해외 뉴스를 보면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대체 왜 우리는 이런 국가 제도를 아직 유지하고 있는지, 왜 아직 망하지 않은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이어서 루소는 투표에 관해 이야기한다. 


 인민의 총회에서 누가 법을 제안할 때, 인민에게 제안하는 것은 정확히 말해 그들이 그 제안에 찬성하느냐 거절하느냐가 아니라 그 제안이 그들의 보편적 의지에 일치하느냐 일치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각자는 투표권을 행사함으로써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말하며, 개표로부터 보편적 의지의 표시가 도출된다. 그러므로 자기 견해와 반대되는 견해가 우세할 때, 그것은 내가 잘못 알았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보편적 의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줄 뿐이다.


 사실 표 대결에서 진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상대편이 잘못 선동돼 이런 결과가 나왔다거나 투표 및 개표 과정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하지 내가 생각했던 것이 보편적 의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정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최소한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루소는 이어서 선거권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이 부분에서 독특한 선거 방식을 제안했다. 


 추첨은 어느 누구의 마음도 아프지 않게 하는 선거 방식이다. 그것은 모든 시민에게 조국에 봉사할 적합한 희망을 부여한다.


 선거가 아니라 대학 입시와 관련된 내용이긴 했지만,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에서 마이클 샌델도 추첨 방식을 제안했던 게 떠올랐다. 


 이 외에도 국가에 위기가 닥쳤을 때는 아주 짧은 기간을 두고 독재 체제로 전환할 수도 있다는 얘기도 하고, 감찰관직에 관해 얘기하면서는 아래와 같은 인상 깊은 조언을 하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국민에게, 그들의 쾌락의 선택을 결정짓는 것은 본성이 아니라 여론이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로 세워보라. 풍속은 저절로 순화될 것이다. 


 또한 종교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감히 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국가로부터 추방되어야 한다. 국가가 교회가 아니고 군주가 교황이 아닌 이상 말이다’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루소는 자신이 다룬 내용이 국외 상황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정치권에 관한 진정한 원리를 정립하고 그 원리를 바탕으로 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해 보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여러 외적인 관계들로 국가를 떠받쳐 주는 일일 것이다. 그런 것들로는 국제법, 무역, 전쟁과 정복의 권리, 공법, 동맹, 협상, 조약 등이 포함될 것이다. 


 아주 짧게 언급됐지만 이 점은 굉장히 중요한 점이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해서 살육 잔치를 벌이고도 죄의식조차 없는 러시아의 천인공노할 모습과, 스스로 자초한 핵 위협 때문에 그런 러시아를 직접 제재하지는 못하고 말로만 떠들며 대리전을 펼치고 있는 과거 자칭 세계의 경찰국가들을 보면 아직 국제 관계는 야생 그대로 약육강식의 원칙 지배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백날천날 인권이나 공정, 정의에 대해서 논의해 봤자 국제 관계에서는 쓸모가 없는 것이다. 동서양의 유명한 학자들이 남긴 저서보다는 우라늄과 핵분열이 먹히는 곳이다.



우리는 자유인인가 노예인가


 자신의 의지에서 자유가 제거된 사람의 언행은 도덕성이 모두 제거돼 있다는 루소의 말은 도처에 진짜 노예가 널려 있던 루소의 시대뿐 아니라 요즘 시대에도 새겨 들어야 할 말이다. 


 상업과 숙련 기술에 대한 걱정, 이익에 대한 탐욕, 나태, 편리에 대한 욕심이 개인으로서의 국가에 대한 의무를 돈으로 바꾸어놓는다. 편하게 자기 이익을 증가시키기 위해 자신의 이익의 일부를 포기한다. 돈을 주어라. 그러면 곧 당신은 노예 상태가 될 것이다. 이 금전(파이낸스)이라는 말은 노예의 단어다. 그것은 공화국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말이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나라에서의 시민들은 모든 것을 자신의 두 팔로 하지, 돈으로 해결하지 않는다. 자신의 의무를 면제받기 위해 돈을 지불하기는커녕, 그들은 그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그들 자신을 바친다. 나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지만, 부역이 오히려 조세보다 자유에 덜 반한다고 생각한다. 
 당신들, 근대인들은 노예가 없다. 하지만 당신들 자신이 바로 노예다. 당신들은 자신의 자유의 대가를 치르고 노예의 자유를 얻는다. 그 선택을 아무리 자랑한다고 해도 나는 거기에서 인간성보다는 비굴함만 발견한다.


 루소의 기준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노예들이 득시글거리는 나라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해결하려고 드는 사람들이 날로 증가하는 우리 사회를 루소가 보았다면 그는 주저하지 않고 노예 사회라고 정의 내렸을 것이다. 그런 노예들의 정신 상태를 루소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노예들은 예속 상태에서 모든 것을 잃는데, 심지어는 그 예속 상태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까지 잃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예 상태를 좋아한다. 



우리 사회는 살만한 사회인가


 루소는 인간이 서로 모여 살아가는 이유는 각 구성원의 생명 보존과 번영이라고 말했다. 사실 너무 당연한 말이다. 원시 시대부터 인류가 함께 모여 살아가는 단 하나의 이유는 생존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너무도 간단한 한 특징을 무시하거나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는 것에 항상 놀란다. 정치적 결합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구성원의 생명의 보존과 번영이다. 그렇다면 구성원들의 자기 보존과 번영에 대한 가장 확실한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구성원 수, 즉 인구 증가다. 그러니 그토록 이론이 분분한 그 특징을 다른 데 가서 찾지 마라. 그 밖의 모든 조건이 같은 경우, 외국의 도움이나 귀화나 식민 등이 아닌 상태에서 시민이 더 많이 살고 더 느는 정부는 확실히 최상의 정부다. 반면, 인민이 줄고 쇠퇴해 가는 정부는 최악의 정부다. 


 내가 속해 있는 사회가 내 생명 보존에 도움을 줄 수 없다면, 더 나아가 오히려 내 생존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나는 그 사회에 속해 있을 이유가 없다. 이제 국가 통계 포털에 들어가서 우리나라의 인구 통계를 살펴보자. 


https://kosis.kr/visual/populationKorea/PopulationByNumber/PopulationByNumberMain.do?mb=Y&menuId=M_1_1

 이대로라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굳이 루소가 말한 사회계약을 유지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대한민국 영토 외에서 거주지를 확보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계약 때 반대자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반대는 계약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그 계약에 포함되지 못하게 할 뿐이다. 그들은 시민들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인 것이다. 국가가 수립될 때, 그곳에 거주하는 것은 곧 그 국가 수립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영토 안에 거주하는 것은 주권에 복종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사회계약을 마음대로 깰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어디 산에 들어가 이승윤과 윤택 외에는 아무와도 접촉하지 않고 그야말로 자연인으로 살지 않는 이상 결국 우리는 사회계약에 매여 살아야 한다. 그게 억울하지 않으려면 루소의 이론을 십분 활용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우리가 왜 모여 살고 있는지 그 최초의 이유를 끊임없이 되새기면서.


왜 우리가 이런 책을 읽고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가

 이것에 대해선 책 도입부에 시니컬 루소 형님이 너무나 잘 적어 놓은 문단으로 대신하겠다. 


 이렇게 정치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을 보고 “당신은 군주냐, 아니면 입법자냐” 하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군주도 아니고 입법자도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정치에 관한 글을 쓴다. 만일 내가 군주이거나 입법자라면, 행동으로 옮겨야 할 일을 입으로나 나불대며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행동으로 옮겨야 할 일은 행동으로 옮길 일이다. 그러지 않을 경우 차라리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 일이다. 
 나의 목소리가 국가의 일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아무리 약하다 할지라도, 자유 국가의 시민이자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 투표권을 가진 것만으로 정치에 관해 알아야 할 의무를 나 자신에게 부과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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