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nugeun Jun 03. 2022

자유론, 독서록

On Liberty, John Stuart Mill

시민의 자유, 사회적 자유

 밀은 이 책에서 사회의 각 구성원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시민의 자유, 사회적 자유다. 우리는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 그다음에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함께 모여 사회를 이뤄 살아가고 있다. 야생에서는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해 그 안에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었겠지만, 여럿이 모여 부대끼며 살아가다 보면 부득이하게 각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밀은 이때 각 개인의 자유를 어디까지 제한해야 하는지, 바꿔 말하면 사회가 개인을 상대로 권력을 행사할 때 어느 정도까지가 적당하다고 볼 수 있는지, 그 선을 어디에 그어야 개인과 사회가 서로 상생하며 발전해 나갈 수 있는지 살펴본다.

 다소 추상적이긴 하지만 밀은 그 선을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는 경계’ 위로 긋는다. 어떤 개인의 행동이 오로지 그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친다면 그 행동이 무엇이든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설사 그 행동이 그 사람에게 해를 끼칠 것 같은 행동이라고 하더라도 사회의 개입은 설득을 위한 충고나 조언 정도에서 멈춰야지 물리적으로 아예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는다는 기준은 상당히 애매한 구석이 있다. 이 사회에서 그 영향이 오로지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행동이 얼마나 있을까? 예를 들어 내가 집에서 술을 담가서 틈만 나면 혼자 홀짝이며 기분 좋게 취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보자. 내 주변 사람들은 그런 내 모습에 조금씩이라도 영향을 받을 것이고 그중 일부는 내가 마시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호기심이 생길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권하지 않고 혼자 마셨지만 그런 내 행동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 것이다. 아마 이런 식으로 따져나가면 사회에서 영향이 한 개인에게로만 국한되는 행동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 도대체 어디까지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고 어디까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당연하겠지만 이 책에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랬다면 법전이 됐을 것이다. 몇몇 예시를 들긴 하지만 그 예시는 어떤 경우에서건 최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쪽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한 보조 장치일 뿐이다. 밀은 구체적인 예를 많이 들기보다는 현재 개인의 자유가 어떤 식으로 억압받고 있으며, 그게 왜 악영향을 끼치는지, 왜 사회적 자유를 보장해야 우리가 더 발전할 수 있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힘쓴다.

 물론 책 중간에 나오는 아래 문단을 읽어보면 아무리 밀이라도 술이 아니라 메스암페타민이나 아편을 제조해 투약하는 것은 금지했을 것 같다.


 사람들이 숱하게 실험해보고 나서 나쁜 것으로 결론 내린 것, 다시 말해 여러 차례 실험을 통해 어느 누구의 개별성에도 유익하지 않고 또 적합하지 않다고 밝혀진 것은 금지하는 것이 좋다.


환기와 되새김, 그리고 절충

 이 책의 앞부분에서 인상 깊었던 내용 중 하나가 토론의 자유에 관한 내용이다. 밀은 이미 많은 사람들의 검증을 거쳐 옳다고 알려진 의견에 대해서도 누구나 자유롭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구나 옳다고 생각하는 명제에 부담 없이 시비를 걸 수 있는 정신적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주기적으로 그 생각이 왜 옳은 것인지 재조명해 사람들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법치주의나 민주주의 같이 아주 오랜 시간 힘든 과정을 거쳐 사회에 적용된 의견들도 막 도입한 당시에는 사람들이 아주 소중하게 여기며 가꿔 나가려고 노력하지만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나면 점차 그 소중함을 잊고 홀대하게 될 수 있다. 마치 늘 숨을 쉬고 있어 종종 존재 자체도 잊게 되는 공기처럼. 급기야는 애써 도입했던 최초의 이유를 잊고 이를 지켜나가기 위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할 불편에만 집중하다가 도입되기 전이 좋았다고 다시 바꾸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거나 혹은 그런 주장에 동조하게 될 수 있다.


 기존의 생각이 옳다고 해도 그것을 살아있는 진리로 만들기 위해 토론이 필요하다. …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의 근거를 조금도 알지 못하고, 극히 피상적으로 제기되는 비판에도 전혀 대응하지 못한다 이때 높은 권력자의 선동에 휘말리기 쉽다.


 그럴 때 그런 이의 제기를 강압적으로 찍어 누르기보다는 다시 한번 토론의 장으로 초대해 그 근거를 모두에게 환기시키는 게 더 낫다는 것이 밀의 생각이다. 밀은 이런 토론이 기존 의견이 왜 옳은 것인지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거나 간과해 왔던 기존 의견의 단점이나 부작용을 파악해 보완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얘기한다.


 또한 밀의 말처럼 수학의 영역이 아니라면 서로 대립하는 두 주장은 모두 일정 부분 진리를 담고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자유롭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야 우리 안의 진리의 근거를 보다 탄탄하게 다져 발전시켜 나갈 수 있고, 더 나아가 새로운 진리를 우리 안으로 들여와 우리가 증명한 진리의 지평을 넓혀 나갈 수 있다.


여론의 영향을 줄이고자 했던 밀

 밀은 당시 밀이 살던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대표적인 방법으로 법과 여론이 있는데 밀은 이 책에서 주로 여론을 타깃으로 삼는다. 밀이 당시 여론을 형성했던 대중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아래 단락에 아주 잘 드러나고 있다.


 과거에는 지위가 높거나 세력이 강한 자들이 힘이 넘친 나머지 법과 제도에 끊임없이 저항했다. 따라서 그들이 법과 제도 아래 꽁꽁 묶여 있어야 그들의 영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 오늘날 사회에서는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모두 적대적인 시선과 가공할 만한 검열의 위협에서 살고 있다. 그 결과 다른 사람에게 관계되는 일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일에서조차, 개인이나 가족을 막론하고, 자신이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자기 성격과 취향에 맞는 것은 무엇인지, 또는 어떻게 해야 자신이 타고난 최고 최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고 최대한 키울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자신의 위치에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이 주로 무엇을 하는지, 또는 경제적 여건이 비슷한 사람이 주로 무엇을 하는지, 심지어는 자기보다 높은 위치의 사람이 즐겨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이는 그들이 자기 기질에 어울리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말이 아니다. 관습적인 것을 빼고 나면 그들에게는 따로 자기 고유의 기질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 정신 자체가 굴레에 묶여 있는 것이다. 재미 삼아 하는 일도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먼저 살피고서 따라 하고 군중 속에 묻혀 가기를 좋아한다. 선택도 그저 사람들이 흔히 하는 것 중에서 고르는 데 국한된다. 독특한 취미니 유별난 행동은 범죄처럼 기피 대상이 된다. 자기 자신의 타고난 성질을 따르지 않다 보니 마침내 따라야 할 각자 고유의 성질까지 없어지게 된다. 그들이 지닌 인간 능력들은 시들고 죽어버린다. 그 어떤 강력한 소망이나 자연적 쾌락도 느끼지 못한다. 한 마디로 자기만의 생각이나 고유한 감정 또는 그 무엇이든지 자기만의 것이 없어진다.


 밀이 그려내는 19세기 영국의 모습은 무언가 하나 유행하기 시작하면 모두가 동참해 무섭게 소비하는 현대 우리나라의 모습과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패션이든 교육 방식이든 먹을 것이든 프로그래밍 방식이든 소설이나 영화의 소재든 취미로 하는 운동이든 여행지든 여행을 떠나는 방식이든 조직 운영 방식이든 건축 양식이든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이 우리나라에서는 삶의 어떤 영역에서 무언가 한 번 유행하기 시작하면 그 영역의 풍경이 온통 그 유행으로 칠갑돼 버린다. 유행은 마치 벚꽃처럼 순식간에 온 사방을 물들이고는 번졌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져버리고, 사람들은 마치 메뚜기 떼처럼 유행을 게걸스럽게 소비해 완전히 소진시켜 버리고는 곧 다른 유행으로 옮겨간다. 이런 과정에서 유행의 타깃이 되지 않았다면 차분하게 자신만의 영역에서 보다 내실 있는 발전을 꾀할 수 있었던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제대로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다.

 이와 같이 밀은 당시 영국 사회의 대중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개인의 삶에 쓸데없이 깊이 간섭하는 바람에 사회에 꼭 필요한 독창성과 개별성이 자꾸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늘날 인간의 삶의 모습에 만족하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바로 그런 삶의 주인공이라 그렇다) 왜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똑같이 살면 안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 독창적이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독창성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기 어렵다. 독창성이 자기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밀의 자유는 비범한 사람들의 생존을 향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자유롭게 자라났다면 사회를 떠받칠 거목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묘목들이 쓸데없이 자꾸 가지치기를 당해 그저 그런 나무로 자라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독창적으로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삶을 살아내서 궁극적으로 이 사회의 지평을 넓혀야 할 사람들이 필요한 자유를 보장받지 못해 그저 대중 속의 한 사람으로 전락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밀의 모습을 자유론을 읽다 보면 여러 번 만날 수 있다.

 

 그저 관습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는 사람은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무엇이 최선인지 구분하는, 또는 가장 좋은 것에 욕망을 느끼는 훈련을 하지 못하는 셈이다.
 욕망과 충동 역시 신념과 자제 못지않게 완전한 인간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요소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인간의 욕망이 너무 강해서 나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양심이 약한 것이 문제이다. 강한 충동과 약한 양심 사이에는 어떤 근본적인 인과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의 섭리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어떤 사람의 욕망과 감정이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하고 더 다양하다는 것은 분명히 말하자면 인간으로서 타고난 자질이 더 풍부하고 따라서 남보다 나쁜 일을 더 많이 할 수도 있지만 대체로 그보다는 좋은 일을 할 가능성이 더 큰 셈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 충동을 생생하고 강렬하게 만들 수 있으며 이런 감수성이 있어야 열정적으로 덕을 추구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


 이런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밀은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여러 번 주장하는데 이 책에서 꼭 남겨야 하는 부분을 고른다면 바로 그런 내용이 담긴 아래 발췌와 같은 부분을 고르겠다.


 인간이 무엇을 하는지뿐만 아니라 그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의 삶을 완전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인간 그 자체이다.
 이 책은 사람들이 개별성을 발전시키고 다양한 행동 양식을 추구함으로써 대단히 많은 이득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해 왔다.
 각자의 개별성이 발전하는 것과 비례해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되며, 또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도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그 방식 자체가 최선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 인간은 똑같은 도덕적 기준 아래에서는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없다. … 동일한 생활양식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행동 능력을 잘 키워주면서 최선의 상태에서 건강하고 즐겁게 살 수 있도록 해주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모든 내적 삶을 황폐하게 만들어버리는 지긋지긋한 암초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일들, 고통을 느끼게 되는 상황, 이런 문제들을 지각하는 육체적 정신적 작용은 사람에 따라 아주 다양하다. 그러므로 각자의 경우에 맞는 다양한 삶의 형태가 허용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충분히 행복해질 수 없다. 제각기 타고난 소질에 맞게 정신적 도덕적 미적 능력을 발전시킬 수도 없게 된다.


사회를 조금 더 적극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인문 고전

 밀은 이 책에서 줄곧 자유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다시 궁극의 자유를 얻기 위해 야생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앞서 말했듯 밀이 주장한 자유는 ‘사회적’ 자유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회를 이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는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래서 더 반가웠다. 이제 와서 이승윤이나 윤택처럼 자연으로 돌아가 혈혈단신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인데 그렇다고 마냥 순응하고 살자니 자꾸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운 것처럼 답답한 기분이 들던 차였다. 일상을 영위하며 차곡차곡 쌓여온 이런 감정을 자유론을 읽으면서 명확히 직시하고 왜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 논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극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야생에서 살아야 하는 삶과, 모두가 똑같은 모습과 똑같은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는 획일적인 사회에서의 삶,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길이 어렴풋이 눈앞에 나타난 기분이었다.

 물론 앞서 말했듯 이 책을 읽는다고 당장 내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기준을 얻을 수는 없다. 대신 싫어도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믿어왔던 사회의 관습이나 법 규정에 의문을 품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됐다. 이 사회를 이루는 구조를 수동적으로 군말 없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게 ‘자유론’이나 그전에 읽었던 ‘사회계약론’ 같은 고전 인문 서적의 힘인 것 같다.

 아. 그런데 아래 문단을 보면 밀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에는 동의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회는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회적 의무의 근거를 끌어내기 위해 계약론을 거론해봐도 별 뾰족한 수가 없다.


 이처럼 먼저 읽었던 책에 관한 내용을 다른 책에서 발견하는 것도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다. 출장길에서 예상치 못했던 친구를 만난 기분이랄까. 더 많이, 더 빨리 읽고 싶은데 체력이 문제다. 체력이….

매거진의 이전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독서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