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에서
내가 살고 있는 이 동네에는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참으로 많다.
아파트 경계선 한쪽으로 맞닿아 있는 나지막한 산은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한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도 별로 숨차지 않는, 꼭대기에 나있는 길을 따라 가로등이 길게 서있는 그런 동산이 창문을 열면 손닿는 곳에 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오면 대여섯 군데의 카페가 거의 균일한 거리를 두고 서있고, 그 옆으로 꽃집이 그리고 그 옆으로는 작은 미용실이 있다.
나는 가끔 이 골목을 지나곤 한다. 그리고 카페 안쪽을 힐끔거리기도 한다. 낮에도 켜진 조명등으로 실내는 부드럽고 아늑한 분위기이다. 나와는 아무런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서로 마주보며 진지하게 또는 편하게 대화하는 장면이 보인다. 얼마나 평온한 풍경인가. 이런 평범하고 여유로운 일상이 나를 기쁘게 한다.
나는 작년 가을에 이곳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으로의 이사는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급하게 결정되었고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 추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최선의 선택을 몇 가지 꼽으라 하면 나는 단연코 이 일을 들 것이다. 적어도 내 판단으로는 그렇다.
작년 8월 마지막 주 금요일이었다.
가까이 사는 친구로부터 아침에 전화가 왔다.
우리 시 지역에 공공택지지구로 대단위 아파트 단지들이 새롭게 조성되었는데, 숲으로 둘러싸여 경관이 빼어나다 하니 구경이나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마침 심심하던 터라 빠르게 집을 나섰다. 이동하는 동안 친구는 여기저기에서 들은 그 동네에 관한 정보를 전하느라 바빴다.
우리는 차로 30분을 달렸다.
그런데 번잡한 도심으로부터 빠져나와 도착한 곳에는 과연 말로만 들은 새로운 도시가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자연과 바로 인접한 도시라니, 새 건물 · 넓은 도로 · 아담한 공원 · 편의성을 고려하여 세련되게 배치된 상가와 주택 등.
더구나 신도시를 이루고 있는 10여 개의 단지 중 6단지는 아파트 경계선이 나지막한 산과 맞닿아 삼면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었다. 와! 아무리 숲세권이라 떠들어대도 이런 경관을 연출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터였다.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이런 세상이 있을 줄이야.
저녁때가 다 되어 집으로 돌아와서도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사하고 싶다. 이사하고 싶다. 이제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
그런데 이사를 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20년을 넘게 살아온 고마운 집이다. 여기에서 두 아이는 성인이 되었고, 남편과 나는 은퇴를 하였다. 이웃은 다정하고 말끔한 산책로도 가까이 있다. 다른 지역으로의 접근성도 웬만하다.
그러나 이사를 하지 말아야 할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나도 나이가 들었다. 조용한 곳을 찾을 때이지 않은가. 살림살이도 가볍게 줄이고 싶다. 지금까지의 내 번잡한 삶을 돌이켜보건대 내게도 그 정도의 권리는 있을 법하다.
나는 남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는데도 펄쩍 뛰었다. 불통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편을 향한 억지와 감언은 자정을 넘어서도 계속되었다. 한곳에서 오래도록 살지 않았나, 한적한 곳에서 살고 싶지 않은가, 공기도 맑고 여름에는 도심보다 시원하기도 하다더라, 자연 친화 중의 자연 친화이다, 마음을 사로잡을 동산이 있다, 나무가 있고 풀이 있고 새가 있고 산들바람이 있는 그 언덕과 그 좁은 비탈길을 상상해 보라…….
그날 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곳의 장면들이 눈에 밟혀 꿈속에서도 중얼대었다. 이사하고 싶다. 그곳에서 살고 싶다.
다음날인 토요일에 결국 나는 부동산사무소에 들러 여러 집을 보게 되었고, 그다음 주 화요일에는 기어코 매매계약을 하고야 말았다. 계획부터 실행까지 일주일을 넘기지 않은 초속의 결과물이었다.
그리하여 그리도 가슴 뛰던 8월 마지막 주 금요일로부터 정확히 두 달 뒤인 10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 나는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다.
나는 오늘도 뒷동산에 올랐다.
왼쪽으로 1km 정도 걸으면 벽천광장과 하늘산책로를 만나게 되고, 오른쪽으로는 에코브리지와 철쭉원과 동의보감약초원으로 가는 1km 남짓한 둘레길이 있다. 지난주에는 팔각정자까지 가보았고 그저께는 버들공원에도 갔었다.
나는 지금 산마루쉼터에 앉아있다. 갈참나무 식생 복원지에 있는 정자이다. 잔잔한 바람 사이로 한적한 겨울햇살이 내려오고 있다. 나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고 싶다. 아니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앉아있고도 싶다.
한겨울의 마른 숲이 멋지다. 버석대는 나뭇잎도 색깔 바랜 풀잎도 모두 정겹다. 지난날의 영화를 묻고 휴식 중이리라.
숲 속에 오랫동안 앉아 이들을 마주하다가 나는 문득 수구지정을 떠올린다. 여우가 여우굴이 있던 구릉을 향해 머리를 두었던 것처럼, 아련한 옛일들이 자꾸만 헤집고 나오려 한다. 그것이 가슴 쓰린 아픔이었을지라도 혹은 일렁이는 행복감이었을지라도.
겨울 산에서 홀로 느껴보는 이러한 상념들이 비약이기만 할까?
나도 이제 자연과 벗하고 싶은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나간 일들을 꺼내어 되뇌고 싶어 하는 나이가 되었다.
나는 숲 속 산마루쉼터에 지금까지도 앉아 있다.
수필집 <우리의 사랑법> (2020.08.01)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