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4장. 붕괴하는 요새, 베르나르의 고귀한 가스

by 산 사람


1. 2026년 1월 3일, 어느 알바생의 우울한 출근길

2026년 1월 3일. 새해의 첫 태양이 뜬 지 고작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신년 계획’이니 ‘작심삼일’이니 하는 단어들을 입에 올리며 희망찬 척을 하고 있겠지만, 나에게 1월 3일은 그저 지독한 바닷바람을 뚫고 시급 만 원짜리 노동을 하러 가야 하는 ‘지옥의 토요일’ 일뿐이었다.
바다의 칼바람은 자비가 없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 내내 코끝은 이미 감각을 잃었고, 패딩 사이로 파고드는 냉기는 뼛속까지 시리게 만들었다. 텅 빈 해변에는 지난 연말 사람들이 버리고 간 폭죽 찌꺼기와 깨진 소주병들이 파도에 씻겨 기괴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하얀 유리 건물, ‘3시의 요새’는 오늘따라 유난히 더 차갑고 고립되어 보였다.
나는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오늘 가면 또 무슨 잔소리를 들을까. 장팔 아저씨는 또 누굴 향해 육두문자를 날리고 있을까. 태풍 사장은 또 어떤 말도 안 되는 사기성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을까.’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식당이 좋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식당의 그 기괴한 불협화음이 좋다. 하지만 새해부터 그 소음을 견뎌낼 에너지가 나에게 남아있는지는 의문이었다. 나는 무거운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저… 저 왔는데요.”

나의 조심스러운 인사는 허공으로 흩어졌다. 평소라면 "김 알바! 3분 늦었어! 시급에서 500원 깐다!"라며 깐족거렸을 태풍 사장의 목소리도, "야, 문 닫아! 바람 들어오잖아!"라며 호통치던 장팔 아저씨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식당 안은 마치 진공 상태에 빠진 것처럼 기괴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2. 침묵의 삼각형, 그리고 붕괴의 조짐

레스토랑 중앙 테이블. 그곳에는 세 명의 남자가 유령처럼 앉아 있었다. 태풍 사장, 장팔 아저씨, 그리고 곰탱 아저씨. 세 사람은 마치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는 전시 내각이라도 구성한 듯 심각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 빈 공간만 응시하고 있었다.
태풍 사장의 머리는 평소처럼 왁스로 쫙 넘겨져 있지 않고 부스스하게 흐트러져 있었고, 장팔 아저씨는 담배를 입에 물지도 않은 채 묵주 반지 보석이 빠질 정도로 세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곰탱 아저씨의 표정 역시 강철로 주조한 조각상처럼 굳어 있었다.
나는 이 무거운 중압감에 압도되어 주방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카운터 구석에 멀찍이 서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공기는 수심 1,000m의 수압처럼 나를 짓눌렀다. 평소의 티격태격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파멸의 전조 같은 무거운 적막만이 요새를 채우고 있었다.

‘뭐지? 설마 신년 벽두부터 폐업이라도 결정하는 건가?’

불안한 예감이 엄습했다. 내 머릿속에서는 벌써 다른 알바 자리를 알아봐야 하나, 편의점 야간 알바는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잡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 요새가 무너지면 나라는 난민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그 침묵의 요새를 지키는 건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고양이 베르나르조차 평소의 거만한 자태를 버리고 소파 구석에 온몸을 웅크린 채, 이 세 남자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녀석의 파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니 상황이 정말 심각하긴 한 모양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30분? 아니면 한 시간? 영원 같던 침묵의 방어선을 먼저 깬 것은 태풍 사장이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치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사람처럼 무겁게 입을 열었다.

“월요일부터 본격적인 신년 영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너희들 생각은 어때? 계속할지, 아니면 여기서 다 집어치울지… 오늘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다.”

그 말에 장팔 아저씨의 미간이 더 깊게 파였다. 평소라면 "이 사기꾼 놈아, 뭔 개소리야!"라며 입에 걸레를 문 듯 욕을 쏟아냈을 그였지만, 지금은 그저 묵주 반지를 쥔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곰탱 아저씨의 커다란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3. 베르나르의 고귀한 가스와 반전

그때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던 공기를 찢고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부우우웅—’

아주 길고, 아주 농축된, 그리고 아주 진한 소리. 소파에 웅크리고 있던 베르나르의 엉덩이 근처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다름 아닌 고양이의 독가스였다. 녀석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기지개를 쭉 켜고는 꼬리를 꼿꼿이 세운 채 실룩실룩 엉덩이를 흔들며 레스토랑 밖으로 유유히 걸어 나갔다.

“아씨! 무슨 놈의 고양이 방귀 냄새가 이렇게 지독해! 야, 베르나르! 너 이리 안 와!”

결의에 가득 찼던 세 남자가 일제히 벌떡 일어났다. 태풍 사장은 코를 감싸 쥐며 창문을 열어젖혔고, 장팔 아저씨는 헛구역질을 하며 허공에 손사래를 쳤다. 말없는 곰탱 아저씨조차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 코를 부여잡고 주방으로 도망치듯 향했다. 장엄했던 비장미는 베르나르의 방귀 한 방에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아, 몰라! 안 해! 안 한다고!”

장팔 아저씨가 담배를 꼬나물며 소리쳤다. 그제야 평소의 ‘장팔’다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평생 입에 붙은 욕을 어떻게 하라고! 내가 프랑스 미슐랭 주방에 있을 때 내 스승이었던 피에르 영감은 이거보다 더했어! 그 영감은 요리가 50이면 입에서 나오는 욕이 50이었다고. 그래야 뇌가 팍팍 돌아가고 요리에 간이 맞는단 말이야! 주방에서 욕 빼면 뭐가 남는데? 설탕? 소금? 웃기지 마!”

장팔 아저씨는 담배를 뻑뻑 피우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는 과거 프랑스 시절을 회상하는 듯 눈을 부라렸다. 그에게 욕설은 단순한 언어 습관이 아니라, 요리의 정체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였던 셈이다. 그러자 창가에 서 있던 태풍 사장이 발끈하며 대꾸했다.

“넌 욕이라도 하지! 나는 뭐야? 나보고 그 사기꾼 기질 좀 버리라고? 입만 가지고 떠벌리지 말라고? 야, 장팔! 내 이 화려한 입담이 없으면 이 구석진 바닷가 식당에 누가 찾아와서 네 그 비싼 요리를 먹어주냐? 내 입담에는 철학이 있고, 인문학이 있고, 삶의 애환이 녹아있어! 내 혀가 바로 이 가게의 영업부장이고 홍보팀이야! 알지도 못하면서!”

두 남자가 다시 예전처럼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주방 안쪽에서는 곰탱 아저씨가 아무 말 없이 저녁에 쓸 식자재를 식탁 위에 올리고 묵묵히 손질을 시작했다. 칼날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가 주방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태풍 사장이 곰탱 아저씨를 가리키며 다시 투덜댔다.

“저 말없는 곰탱이는 또 뭐가 문제야. 덩치는 산만한 게 하루에 세 마디도 안 하는 게 무슨 죄냐고. 야, 장팔. 저놈이 저 덩치로 소리 지르고 다녔어 봐. 손님들이 밥 먹다가 기절하지 않겠냐? 저나마 조용한 게 다행이지!”

4. 작가의 습격과 알바생의 자존심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슬쩍 사장에게 다가가 물었다.

“사장님, 지금 이게 다 무슨 소리예요? 대체 아까부터 무슨 결정을 내린다는 거예요? 설마 작가님 이야기예요?”

태풍 사장은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지수야, 너도 잘 들어봐. 신년 장사 시작하려고 했더니, 글쎄 아침에 그 ‘작가’ 놈이 왔다 갔잖아. 산속에서 벌만 키우고 살더니 성질머리가 아주 옹졸해졌나 봐. 덩치는 산만해서는 하는 짓은 아주 쫀팽이라니까!”

“작가가요? 작가가 왜요? 우리 잘 써주고 있잖아요.”

“잘 써주긴 뭘 잘 써줘! 우리 캐릭터가 너무 세서 연재가 힘들대나 뭐래나. 나는 너무 사기꾼 같아서 비호감이다, 장팔이는 욕이 너무 많아서 출판 심의에 걸린다, 곰탱이는 대사가 너무 없어서 분량 조절이 안 된다… 아주 우리를 앵벌이 시키면서 지는 손가락만 까딱거려 키보드나 치고 말이야!”

장팔 아저씨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맞아! 고생은 우리가 다 하는데, 지가 뭔데 우리 개성을 고쳐라 마라야? 난 이대로 욕하면서 계속 살 거야. 싫으면 주방장 새로 구하라고 해! 내 요리는 내 욕에서 나오는 거니까!”

나는 황당해서 한참을 침묵했다. 그러니까 이 장엄한 회의가 사실은 소설 속 캐릭터 설정에 대한 반항이었다는 건가.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저… 그럼 제 이야기는 없던가요? 저에 대해서는 뭐라고 안 하던가요?”

내 질문에 태풍 사장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무심하게 던졌다.

“너? 너는 별말 없던데.”

“아무 말도요? 아예 언급이 없었다고요?”

내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래도 내가 이 소설의 화자이자 관찰자인데, 존재감이 전혀 없다는 건가 싶어 자존심이 상하려던 찰나, 태풍 사장이 얄밉게 말을 덧붙였다.

“아, 가면서 그러더군. 알바생을 좀 더 예쁘고 화려한 애로 쓸 걸 그랬나… 미모가 좀 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런 소릴 혼잣말로 지껄이던데?”

“뭐라고요? 우 씨! 진짜예요? 그 작가 어디 살아요? 산속 어디냐고요!”

순간 머릿속에서 폭발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황당함을 넘어 배신감이 치밀었다. 아니, 내가 어때서! 이 척박한 요새에서 이만큼 버티는 미모와 인내심이면 감지덕지해야지! 알바를 미모로 뽑나? 실력으로 뽑지!

“나 안 해! 안 해! 나도 파업할 거예요!”

내가 소리를 지르자 장팔 아저씨가 다시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그래! 우리 다 같이 안 해! 이대로 욕하면서 계속 쓰던지, 아니면 연재 중단하라고 해!”

태풍 사장도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려버렸다.

“좋아, 나도 안 해. 야, 곰탱아! 네가 가서 그 작가 놈한테 우리 안 한다고 못 한다고 전해! 네가 제일 덩치 크니까 위협이라도 좀 하고 오라고!”

뜬금없이 화살이 돌아간 곰탱 아저씨의 칼질이 순간 멈칫하는 게 내 눈에도 보였다. 곰탱 아저씨는 아주 곤란한 표정으로 무를 썰다 말고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의 눈망울이 평소보다 더 슬퍼 보였다.

5. 1월 4일, 다시 열리는 요새의 문

하룻밤 사이에 마음이 바뀐 게 아니라, 원래 흔들리던 게 정리된 거였다. 1월 4일 03:00 PM, 식당 안에는 이미 육수 끓는 냄새와 버터 향이 진동하고 있었다.
태풍 사장의 바지 주머니에서 ‘카톡!’ 하는 경쾌한 알림음이 울렸을 때, 이미 상황은 종료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태풍 사장이 귀찮다는 듯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더니, 순간 동작이 얼어붙었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고, 굳어있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정말 아주 미세하게 살짝 올라갔다.

“왜? 뭐라고 왔는데? 그 쫀팽이 작가가 사과라도 한대?”

장팔 아저씨가 물었다.
태풍 사장이 헛기침을 하며 핸드폰 화면을 우리 쪽으로 슬쩍 돌렸다.

[지금 다 보고 있음. 말 잘 들으면 시즌 2, 3, 4까지 고정 출연 및 출연료 상향 고려해 보겠음. - 작가 -]

식당 안은 다시 한번 침묵에 빠졌다. 5초, 10초…

“음…”

태풍 사장이 먼저 입을 뗐다.

“생각해 보니까, 작가님도 다 우리 잘되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겠어? 우리도 조금은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해 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히히.”

금세 비굴할 정도로 부드러워진 태풍 사장의 목소리에 장팔 아저씨가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출연료 상향이라니… 쳇. 뭐, 나도 아주 욕을 안 하겠다는 건 아니야. 조금… 세련된 욕으로 순화는 해볼 수 있다는 거지. 셰프의 품격도 중요하니까.”

주방 안쪽에서 곰탱 아저씨의 칼질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까보다 훨씬 경쾌하고 빠른 리듬이었다.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신년 오픈 전날에 이 무슨 촌극이란 말인가. 작가나, 사장이나, 셰프나… 다들 돈과 명예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속물들이었다.

“그래서, 내일 오픈하는 거죠?”


나의 물음에 태풍 사장이 활짝 웃으며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당연하지! 오늘 1월 4일, ‘3시의 요새’는, 내일 예정대로 문을 연다! 지수야, 너도 가서 거울 좀 보고 와. 작가님 눈에 띄게 화장이라도 좀 화사하게 하고! 미모가 경쟁력이라잖아!”

“우 씨… 내 미모가 어때서! 은근히 진짜 짜증 나네!”

나는 씩씩거리며 걸레를 집어 들었다. 등 뒤에서는 장팔 아저씨의 “야, 이 사기꾼아! 설탕 좀 그만 쓰라고 했지!” 하는 고함과 태풍 사장의 “이게 다 대중적인 맛이야!” 하는 대꾸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고 했던가. 아니, ‘3시의 요새’는 베르나르의 방귀와 작가의 미끼 뒤에 정신을 차린 격이었다. 베르나르는 어느새 레스토랑 테라스 끝에 앉아 다시 떠오르는 달을 보며 고귀하게 털을 고르고 있었다.
나의 2026년은 그렇게 황당하고, 시끄럽고, 은근히 자존심 상하는 채로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내일 3시가 되면, 이 지독하게 인간적인 요새에는 다시 누군가의 인생의 간을 맞추기 위한 뜨거운 불길이 타오를 테니까.

‘내 미모가 어때서… 진짜.’

나는 투덜거리며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 꽤 괜찮구먼, 뭐. 작가가 눈이 삐었나 보다. 나는 콧방귀를 뀌며 유리창을 닦기 시작했다.

[지수의 주방 관찰 일지: 2026년 1월 4일. 요새는 무너질 뻔했으나 출연료라는 강력한 보강재 덕분에 다시 세워졌다. 인간의 신념은 강하지만, 현실은 더 강하다는 걸 깨달은 하루. 오늘부터 다시 전쟁이다. 미모 관리도 좀 해야 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