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3장. "또 한 살을 먹어버렸네"

by 산 사람

[새해 다음날]


​1. 3시 5분, 정적이 머무는 자리


​오후 3시 5분. ‘3시의 요새’는 기묘한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보통 이 시간쯤이면 장팔 아저씨의 걸걸한 욕지거리와 곰탱 아저씨의 둔탁한 도마 소리, 그리고 태풍 사장의 쨍알거리는 목소리가 뒤섞여 시장바닥 같아야 정상이었지만, 오늘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새해 첫날, 그 맹추위 속에서 오뎅 장사로 대박을 터뜨린 다음 날이라 그런지 해변은 어제 그 난리통이 언제 있었냐는 듯 잔잔한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바닷물은 햇살을 받아 잘게 부서졌고, 통유리 레스토랑 안으로는 따뜻한 겨울 볕이 깊숙이 쏟아져 들어와 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다.

​나는 주방 정리를 하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태풍 사장이 어쩐 일인지 슬슬 저녁 장사를 준비해야 하는 시간인데도 가게 앞 테라스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늘 번쩍이는 왁스로 꼿꼿하게 세워 올리던 머리는 오늘은 웬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있었고, 얼굴에는 늘 보이던 능청스러운 장사꾼 미소 대신 낯선 평온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귀에 낡은 이어폰을 꽂고 흘러나오는 음악에 몸을 맡긴 채, 멀리 수평선 너머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옆 테이블에는 어제 오뎅 국물을 팔던 빈 육수통이 덩그러니 놓여 있어 묘한 대조를 이뤘다.

​낯설어도 너무 낯설었다. 늘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돈 계산기를 두드리거나, 나에게 잔심부름을 시키거나, 아니면 장팔 아저씨 뒷덜미를 잡고 티격태격하던 사람이었다. 저렇게 넋을 놓고 앉아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영업 전, 짧은 숨 고르기 같은 시간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뒷모습이 묘하게 쓸쓸해 보였다. 나는 살금살금 사장 옆에 다가가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 그의 얼굴은, 오늘따라 쓸데없이 진지해 보였다. 평소의 가벼운 허세는 어디로 갔는지, 그저 세월의 파도를 온몸으로 맞고 잠시 쉬러 나온 늙은 고기잡이배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이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내 목소리에 태풍 사장은 살짝 놀란 듯 눈을 떴다. 이어폰을 한쪽 빼며 그는 나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먼바다로 시선을 돌리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또 한 살을 먹어버렸네. 지수야, 넌 아직 모르겠지만… 이게 참 기분이 묘하다. 몸무게는 안 느는데 나이만 자꾸 적립되는 기분이랄까.”


​“아니, 사장님! 분위기 잔뜩 잡으시고 고작 그런 말씀이세요? 저는 또 무슨 빚쟁이라도 들이닥친 줄 알고 얼마나 쫄았는데요! 사람 무안하게 진짜.”


​내 짜증 섞인 외침에 태풍 사장은 그제야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평소의 능청스러운 웃음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고, 어딘가 쓸쓸한 여운이 담겨 있었다.


​2. 나잇값과 600원의 상관관계


“하하… 미안하다, 지수야. 새해 첫날부터 어제 오뎅 팔다 손가락 얼어 터진 네 고생 생각은 안 하고, 내가 너무 주책맞게 감상에 젖었지? 그래도 나이를 먹는다는 건 말이야… 이 바다처럼 잔잔하게 파도도 치고, 어떨 땐 거친 폭풍도 몰아치는 그런 건가 봐. 오늘은 그냥 이 파도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네.”


​태풍 사장의 눈빛에는 여전히 감성의 잔여물이 남아있었지만,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다시 눈을 잠시 감는가 싶더니, 이내 손가락으로 공중에 숫자라도 쓰는 듯 꼼지락거렸다.


​“근데 지수야, 어제 우리가 판 오뎅이 총 몇 꼬치였지? 내 계산으로는 건물 한 층 올릴 기초 공사비는 나온 것 같은데 말이야. 아, 그리고 한 꼬치에 600원 남는 걸로 계산했나?”


​분위기가 깨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감성적인 철학자는 어디 가고, 다시 돈 냄새를 맡은 족제비 같은 사장님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의 잔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그의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에 묘한 여운을 섞어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주방 문이 쾅 열리며 장팔 아저씨의 걸걸한 목소리가 해변의 평화를 박살 냈다.


​“야, 이 사기꾼아! 지수야, 너 사장 옆에서 뭐 해? 새해부터 영업 시작하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농땡이야? 태풍, 너는 이 한겨울에 테라스에서 얼어 죽으려고 작정했냐? 어제 오뎅 팔아 번 돈으로 비싼 보약이라도 한 사발 들이키려고?”


​장팔 아저씨는 앞치마를 질끈 매고 커다란 중식도를 든 채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의 뒤로는 곰탱 아저씨가 커다란 양배추 두 통을 럭비공처럼 들고 묵묵히 걸어오고 있었다.


​“아니, 장팔! 새해 첫날부터 덕담은 못 해줄망정 욕질부터 하냐? 나이 먹는다는 걸 좀 우아하게 받아들여야지!”


​태풍 사장이 다시 감성 모드로 기어들어가려 하자, 장팔 아저씨가 칼등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닥쳐! 이 나이 처먹은 주책바가지 늙은 놈아! 네 나이 타령 들을 시간 없어. 야, 곰탱! 너는 어떠냐? 너도 이 사기꾼 놈처럼 한 살 더 먹어서 막 가슴이 저리고 그러냐?”


​장팔 아저씨의 시선이 양배추를 내려놓던 곰탱에게 꽂혔다. 곰탱은 잠시 멈춰 서서, 아주 잠시 동안 먼바다를 응시했다. 그는 복잡한 말 대신, 자기 손등에 난 낡은 칼자국 흉터를 툭툭 치더니 짧게 대답했다.


​“단단해지는 거..”


​그게 전부였다. 현자 같은 장황한 설명도, 슬픈 비유도 없었다. 하지만 그 투박한 말 한마디가 태풍의 화려한 미사여구보다 훨씬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곰탱은 다시 몸을 돌려 묵묵히 양배추를 썰기 시작했다.


​“봤냐? 저게 진짜 중년이다! 너처럼 왁스 바르고 이어폰 꽂는 게 아니라!”


​장팔의 일갈에 태풍 사장이 툴툴거리며 일어났다.


​3. 지수의 현실적인 대답


​“야, 지수! 너는 어떠냐? 너 같은 애들은 나이 먹는 거 별 감흥 없지?”


​장팔 아저씨가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무 껍질을 다듬다 말고 어깨를 으쓱했다.


​“저요? 저는 그냥 퇴직금 받을 날이 1년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데요. 그리고 사장님들처럼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면 머리 아파요. 하루하루 살아남기도 바쁜데 나이 먹는 거 고민할 시간이 어딨 어요? 그냥 맛있는 거 먹고, 오늘 하루 안 잘리고 잘 버티면 그게 나이 잘 먹는 거죠. 안 그래요?”


​내 대답에 세 남자가 동시에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장팔 아저씨는 "요즘 애들은 현실적이라니까"라며 혀를 찼고, 태풍 사장은 "역시 지수야, 핵심을 찔러"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곰탱 아저씨는 그저 낮게 "허허" 하고 웃으며 도마 소리를 높였다.


​“그래, 지수 말이 정답이다. 나이 타령해 봐야 시간 안 멈춘다. 야, 곰탱! 어제 오뎅 팔고 남은 무로 국물만 내지 말고, 오늘 새해니까 제대로 된 거 하나 해보자. 손님들한테 새해 복이라도 나눠드려야지.”


​장팔 아저씨가 기다렸다는 듯 주방에서 반죽을 꺼내왔다.


​“오늘은 ‘가레트 데 루아(Galette des Rois)’다. 프랑스에선 이거 안 먹으면 새해 시작 안 한다며? 지수야, 너 오늘 이거 서빙하면서 ‘왕이 되실 기회입니다’라고 멘트 좀 쳐라.”


​주방에서는 금세 버터와 아몬드 크림의 고소한 향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곰탱 아저씨가 겹겹이 쌓인 페이스트리 반죽을 조심스럽게 미는 손길은 평소보다 더 정성스러웠다.


​4. 다시 시작되는 왁자지껄한 평강


​오븐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황금빛 파이가 나오자, 요새 안은 달콤한 향기로 가득 찼다. 파이 표면에 새겨진 정교한 잎사귀 문양은 마치 새해의 희망을 수놓은 듯 빛났다.


​“야! 지수야! 무 껍질 너무 두껍게 깎지 마! 아까워 죽겠네! 너는 나이를 먹어도 절약 정신이 안 느냐?”


​멀리서 들려오는 태풍 사장의 비명 같은 잔소리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방금 전까지 나이 먹는 게 서글프다며 바다를 보던 감성 사장님은 어디 가고, 다시 무 껍질 두께에 목숨 거는 장사꾼 사장님으로 돌아와 있었다.

​장팔 아저씨는 여전히 주방에서 화력을 높이며 고함을 질렀고, 곰탱 아저씨는 그 소음 속에서도 묵묵히 파이를 조각내어 접시에 담았다. 베르나르는 카운터 위에서 기지개를 켜며 그 소란을 무심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아마 이 사람들한테는 이런 소란함이 제일 편한 ‘평강’ 일지도 모른다고. 거창한 철학이나 눈물 젖은 감상보다는, 서로 욕하고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이 짭조름한 일상이 그들에겐 최고의 보약일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모난 구석을 더 격렬하게 부딪히면서도 결코 깨지지 않는 단단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3시의 요새는 그렇게 새해의 두 번째 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바다는 여전히 고요가 내려앉은 채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새해의 두 번째 태양이 우리 식당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또 한 해의 왁자지껄한 시작. 어쩌면 이 지긋지긋한 소란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완벽한 축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는 다시 묵묵히 무 껍질을 깎아냈다.


​“야! 지수! 무 다 깎았으면 홀 바닥이나 닦아! 사장님은 오늘 저녁부터 또 대박 쳐서 돈 세야 하니까!”


​사장님의 잔소리가 파도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그래, 이게 진짜 ‘3시의 요새’지.

그때, 태풍 사장이 테라스에 두고 들어간 이어폰에서 가느다란 선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1번>.

Gymnopédie No.1 – Erik Satie


​[오늘의 요리: 가레트 데 루아 (Galette des Rois)]

​프랑스에서 매년 1월 초, ‘주님 공현 대축일’을 기념해 먹는 전통 파이입니다. ‘왕의 파이’라는 뜻으로, 바삭한 페이스트리 속에 달콤한 아몬드 크림(프랑지판)을 가득 채워 굽습니다.

​이 파이의 묘미는 안에 숨겨진 ‘페브(Fève)’라는 작은 도자기 인형에 있습니다. 파이를 나누어 먹다가 자신의 조각에서 페브가 나오는 사람은 종이 왕관을 쓰고 그날의 ‘왕’이 되며, 일 년 내내 행운이 깃든다고 믿습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이 단순한 노화가 아니라, 인생이라는 파이 속에 숨겨진 뜻밖의 행운(페브)을 발견해 나가는 즐거운 과정임을 알려주는 따뜻한 새해의 선물 같은 요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