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해언(海言)의 과거: 시간을 거스르는 항해자
[후회라는 이름의 닻을 내리는 법]
폭풍이 휩쓸고 간 바다는 기이할 정도로 평온했다. 사내는 그 정적이 어쩐지 더 불길했다. 파도가 잦아들수록 바다는 자신이 삼켜버린 것들을 더 깊은 심연으로 감추는 법이니까.
해언은 아무 말 없이 등대 지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사내는 홀린 듯 그 뒤를 따랐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의 질감은 달라졌다. 눅눅한 습기와 기름 냄새, 그리고 오래된 금속이 부식되며 내뿜는 비릿한 향이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등대의 가장 깊은 곳, 평소라면 결코 열지 않았을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노인은 걸음을 멈췄다.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지르듯 거친 소리를 냈다. 마치 그 안에 갇힌 무언가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거부하는 듯한 저항이었다. 문 안쪽에는 낡은 나무 궤짝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바닷물에 씻겨 빛이 바랜 겉면과 거칠게 마모된 모서리들. 누군가 급히 떼어낸 듯한 금속 표식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이미 알아볼 수 없게 닳아 있었다. 해언은 한참 동안 궤짝 앞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은 과거를 들추려는 자가 아니라, 과거가 자신을 불러주길 기다리는 구도자처럼 보였다.
“이건…”
사내가 조심스레 입을 떼자, 해언이 가볍게 고개를 저어 말을 막았다.
“자네가 보기 전에, 내가 먼저 해야 할 말이 있네.”
노인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 숨결에는 노구의 쇠약함보다, 생을 가로질러 온 결심의 무게가 더 짙게 배어 있었다.
“나는 한때 바다보다 더 거친 욕망을 좇던 사람이었네.”
해언이 천천히 궤짝을 열었다. 안에는 빛바랜 해도 몇 장과 녹슨 항해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금속 파편, 금이 간 렌즈, 닳아버린 손잡이들. 그리고 그 잔해들 가장 아래쪽에 작은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사내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흑백 사진 속에는 한 청년이 서 있었다. 바람에 깃이 꺾인 코트를 걸친 사내. 얼굴에는 오만한 자신감이 넘쳤고, 입가에는 세상을 비웃는 듯한 삐딱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치 온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공전한다고 믿는 자의 표정이었다.
그러나 눈동자만큼은 지금의 해언과 닮아 있었다. 너무 먼 곳을 응시하느라 정작 자신의 발밑이 무너지는 줄은 몰랐던 사람의 눈이었다.
“노인장… 이 사람이 정말…”
“나일세.”
해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변명도, 과시도 없었다. 그저 아주 오래전에 받아들인 명백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어조였다.
“나는 대단한 사명감으로 바다에 나간 게 아녔네. 명예도, 국가를 위한 헌신도 아니었지. 그저 눈먼 욕망뿐이었네.”
사내는 마른침을 삼켰다.
“더 빨리 목적지에 닿고 싶었고, 더 많은 것을 손에 쥐고 싶었지. 남들이 돌아가라고 경고하던 항로를 무시했고, 폭풍의 전조를 오만한 계산으로 뭉개버렸네. 나를 밀어붙인 건 파도가 아니라 내 안의 허영이었어.”
해언은 해도를 한 장 집어 들었다. 종이는 바스러질 듯 낡았지만, 중앙에는 손가락으로 수없이 덧그은 듯한 흔적이 선명했다.
“그날도 그랬지. 태풍이 오고 있다는 신호가 분명했지만 나는 계산했네. ‘내 실력이면 충분히 지나갈 수 있다’고. 아니, 사실은 그냥 이기고 싶었던 거야. 바다를 건너려 했던 게 아니라, 바다를 굴복시키려 했던 거지.”
노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태풍은 내 오만보다 빨랐고, 배는 내 욕망보다 무거웠네. 내가 배에 실었던 건 화물만이 아니었어. 조급함, 독선, 그리고 헛된 꿈… 그 무게가 결국 배를 집어삼켰지.”
해언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천천히 소매를 걷어 올렸다. 사내의 시선이 노인의 팔뚝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숫자와 기호로 이루어진 흐릿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바다 위 어느 한 지점을 가리키는 정교한 좌표. 너무나 정확해서 오히려 소름 끼치는 낙인이었다.
“그 자리를 평생 잊지 않기 위해서라네.”
좌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내는 굳이 묻지 않았다. 어떤 진실은 설명되는 순간 그 무게를 잃는 법이니까.
“나는 살아남았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내 시간은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지.”
해언은 궤짝에서 낡은 회중시계 하나를 꺼냈다. 유리는 산산조각 나 있었고, 바늘은 멈춘 채 고정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 시계를 고치면 다 해결될 줄 알았어. 바늘을 억지로 돌리고 부품을 갈아 끼우면 시간이 다시 흐를 거라 믿었지. 고장 난 게 시계라고 생각했으니까.”
노인이 쓸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한참 뒤에야 깨달았네. 고장 난 건 시간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는 걸.”
“그래서… 시간을 되돌리려 하신 건가요?”
사내의 물음에 해언이 답했다.
“되돌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날로 돌아가 선택을 바꾸고 싶어 밤잠을 설친 세월이 얼마겠나. 하지만 과거로 거슬러 헤엄치려 할수록 나는 더 깊은 자책 속으로 가라앉을 뿐이었지. 그게 바로 ‘후회’라는 감옥이었네.”
노인은 시계를 다시 궤짝 속으로 되돌려 놓았다.
“후회는 과거에 머무는 게 아니야. 과거에 매달리느라 지금의 손을 놓아버리는 일이지. 그래서 나는 항로를 바꿨네. 과거로 돌아가려는 항해를 포기하고, 대신 멈춰버린 다른 이들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는 일을 선택한 거야.”
해언이 궤짝을 닫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한 시대의 회한이 봉인되었다.
“나는 결국 시간을 이기지 못했네. 하지만 그 패배를 인정했기에, 지금은 시간을 지키는 사람이 될 수 있었지.”
사내는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해언이 왜 늘 자신의 일이 시간을 ‘수선하는 것’이라 말했는지. 후회라는 이름의 무거운 닻을 내리는 방법은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가 더 이상 현재의 키를 제멋대로 휘두르지 못하게 하는 것, 오직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