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흑백 사진 속의 청년

​제3부. 해언(海言)의 과거: 시간을 거스르는 항해자

by 산 사람

[후회라는 이름의 닻을 내리는 법]


​폭풍이 휩쓸고 간 바다는 기이할 정도로 평온했다. 사내는 그 정적이 어쩐지 더 불길했다. 파도가 잦아들수록 바다는 자신이 삼켜버린 것들을 더 깊은 심연으로 감추는 법이니까.


​해언은 아무 말 없이 등대 지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사내는 홀린 듯 그 뒤를 따랐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의 질감은 달라졌다. 눅눅한 습기와 기름 냄새, 그리고 오래된 금속이 부식되며 내뿜는 비릿한 향이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등대의 가장 깊은 곳, 평소라면 결코 열지 않았을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노인은 걸음을 멈췄다.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지르듯 거친 소리를 냈다. 마치 그 안에 갇힌 무언가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거부하는 듯한 저항이었다. 문 안쪽에는 낡은 나무 궤짝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바닷물에 씻겨 빛이 바랜 겉면과 거칠게 마모된 모서리들. 누군가 급히 떼어낸 듯한 금속 표식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이미 알아볼 수 없게 닳아 있었다. 해언은 한참 동안 궤짝 앞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은 과거를 들추려는 자가 아니라, 과거가 자신을 불러주길 기다리는 구도자처럼 보였다.


​“이건…”


​사내가 조심스레 입을 떼자, 해언이 가볍게 고개를 저어 말을 막았다.


​“자네가 보기 전에, 내가 먼저 해야 할 말이 있네.”


​노인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 숨결에는 노구의 쇠약함보다, 생을 가로질러 온 결심의 무게가 더 짙게 배어 있었다.


​“나는 한때 바다보다 더 거친 욕망을 좇던 사람이었네.”


​해언이 천천히 궤짝을 열었다. 안에는 빛바랜 해도 몇 장과 녹슨 항해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금속 파편, 금이 간 렌즈, 닳아버린 손잡이들. 그리고 그 잔해들 가장 아래쪽에 작은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사내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흑백 사진 속에는 한 청년이 서 있었다. 바람에 깃이 꺾인 코트를 걸친 사내. 얼굴에는 오만한 자신감이 넘쳤고, 입가에는 세상을 비웃는 듯한 삐딱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치 온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공전한다고 믿는 자의 표정이었다.


​그러나 눈동자만큼은 지금의 해언과 닮아 있었다. 너무 먼 곳을 응시하느라 정작 자신의 발밑이 무너지는 줄은 몰랐던 사람의 눈이었다.


​“노인장… 이 사람이 정말…”

“나일세.”


​해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변명도, 과시도 없었다. 그저 아주 오래전에 받아들인 명백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어조였다.


​“나는 대단한 사명감으로 바다에 나간 게 아녔네. 명예도, 국가를 위한 헌신도 아니었지. 그저 눈먼 욕망뿐이었네.”


​사내는 마른침을 삼켰다.


​“더 빨리 목적지에 닿고 싶었고, 더 많은 것을 손에 쥐고 싶었지. 남들이 돌아가라고 경고하던 항로를 무시했고, 폭풍의 전조를 오만한 계산으로 뭉개버렸네. 나를 밀어붙인 건 파도가 아니라 내 안의 허영이었어.”


​해언은 해도를 한 장 집어 들었다. 종이는 바스러질 듯 낡았지만, 중앙에는 손가락으로 수없이 덧그은 듯한 흔적이 선명했다.


​“그날도 그랬지. 태풍이 오고 있다는 신호가 분명했지만 나는 계산했네. ‘내 실력이면 충분히 지나갈 수 있다’고. 아니, 사실은 그냥 이기고 싶었던 거야. 바다를 건너려 했던 게 아니라, 바다를 굴복시키려 했던 거지.”


​노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태풍은 내 오만보다 빨랐고, 배는 내 욕망보다 무거웠네. 내가 배에 실었던 건 화물만이 아니었어. 조급함, 독선, 그리고 헛된 꿈… 그 무게가 결국 배를 집어삼켰지.”


​해언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천천히 소매를 걷어 올렸다. 사내의 시선이 노인의 팔뚝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숫자와 기호로 이루어진 흐릿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바다 위 어느 한 지점을 가리키는 정교한 좌표. 너무나 정확해서 오히려 소름 끼치는 낙인이었다.


​“그 자리를 평생 잊지 않기 위해서라네.”


​좌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내는 굳이 묻지 않았다. 어떤 진실은 설명되는 순간 그 무게를 잃는 법이니까.


​“나는 살아남았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내 시간은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지.”


​해언은 궤짝에서 낡은 회중시계 하나를 꺼냈다. 유리는 산산조각 나 있었고, 바늘은 멈춘 채 고정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 시계를 고치면 다 해결될 줄 알았어. 바늘을 억지로 돌리고 부품을 갈아 끼우면 시간이 다시 흐를 거라 믿었지. 고장 난 게 시계라고 생각했으니까.”


​노인이 쓸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한참 뒤에야 깨달았네. 고장 난 건 시간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는 걸.”


“그래서… 시간을 되돌리려 하신 건가요?”


​사내의 물음에 해언이 답했다.


​“되돌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날로 돌아가 선택을 바꾸고 싶어 밤잠을 설친 세월이 얼마겠나. 하지만 과거로 거슬러 헤엄치려 할수록 나는 더 깊은 자책 속으로 가라앉을 뿐이었지. 그게 바로 ‘후회’라는 감옥이었네.”


​노인은 시계를 다시 궤짝 속으로 되돌려 놓았다.


​“후회는 과거에 머무는 게 아니야. 과거에 매달리느라 지금의 손을 놓아버리는 일이지. 그래서 나는 항로를 바꿨네. 과거로 돌아가려는 항해를 포기하고, 대신 멈춰버린 다른 이들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는 일을 선택한 거야.”


​해언이 궤짝을 닫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한 시대의 회한이 봉인되었다.


​“나는 결국 시간을 이기지 못했네. 하지만 그 패배를 인정했기에, 지금은 시간을 지키는 사람이 될 수 있었지.”


​사내는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해언이 왜 늘 자신의 일이 시간을 ‘수선하는 것’이라 말했는지. 후회라는 이름의 무거운 닻을 내리는 방법은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가 더 이상 현재의 키를 제멋대로 휘두르지 못하게 하는 것, 오직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