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이름 없는 무덤들: 먼저 떠나보낸 시간들에 대한

제3부. 해언(海言)의 과거: 시간을 거스르는 항해자

by 산 사람


[부제: 묻어주지 못한 과거는 유령이 된다]


안개가 유독 낮게 깔린 새벽이었다.

해언은 아무 말 없이 등대를 나섰다. 바다는 보이지 않았고, 바람은 방향을 잃은 채 절벽을 훑고 있었다. 사내는 그가 향하는 곳이 등대의 정면이 아니라, 늘 그림자 속에 가려 있던 뒤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곳은 파도가 직접 닿지 않는 절벽 아래였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 생긴 좁은 공터. 땅이라 부르기엔 너무 척박했고, 무덤이라 부르기엔 너무 초라한 장소였다. 그러나 그 위에 놓인 돌들은 이상할 만큼 정돈되어 있었다. 둥글고, 납작하고, 크기가 제각각인 돌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해언은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허리를 굽히는 동작이 늙어서가 아니라, 오래 반복해 온 의식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는 잡초를 뽑았다. 뿌리까지 뽑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흙을 파헤쳐, 끊어진 뿌리를 다시 흙 속에 밀어 넣었다.


사내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노인장… 여긴 뭡니까.”


해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장 왼쪽의 작은 돌을 집어 들었다. 돌의 아랫면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흙이 묻어 있었다. 그는 그 흙을 손바닥으로 털지 않았다. 묻힌 채로 그대로 두었다.


“무덤이라네.”


짧은 대답이었다.

사내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비석도 없었고, 이름도 없었다. 날짜조차 없었다. 그저 돌들만 있었다.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되는 것들, 혹은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는 것들처럼.


“누가… 묻혀 있습니까.”


해언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침묵은 망설임이라기보다, 이미 수도 없이 해왔던 대답을 다시 꺼내는 피로에 가까웠다.


“사람은 없네.”

그는 돌을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여기엔 내가 죽여버린 시간들이 묻혀 있지.”

사내는 숨을 들이켰다. 해언은 가장 작은 돌 앞에 멈춰 섰다.


“이건 내가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했던 아침이네. 아직 태풍이 오기 전이었지.”

그 옆의 돌을 가리켰다.


“이건 내가 듣지 않기로 선택한 경고들이고.”

다음 돌.


“이건 끝까지 잡고 있었던 체면이야.”

해언은 마지막 돌 앞에 섰다. 가장 크고, 가장 무거워 보이는 돌이었다. 그는 그 돌을 밀어보려다, 포기했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그는 말을 멈췄다. 이번 침묵은 길었다. 바람이 불어 안개가 잠시 갈라졌다가, 다시 덮였다. 사내는 그가 끝내 말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내가 끝까지 놓지 못했던 사람이지.”

그 말은 설명이 아니었다. 이름도,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사내는 그 한 문장에 들어 있는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상실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설명되는 순간,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해언은 품 안에서 작은 조약돌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아무 표시도 없는 빈자리에 놓았다.


“이건 오늘 묻는 거야.”

사내가 놀라 물었다.


“오늘도… 묻을 게 있습니까.”

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 있다는 건, 매일 무언가를 떠나보낸다는 뜻이네.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사람은 과거를 등에 업고 늙어.”


그는 흙을 덮었다. 손으로 덮었다. 삽도, 도구도 없었다. 손가락 사이로 흙이 파고들었다. 손톱 밑이 검게 물들었다.


“사람들은 애도를 위로라고 착각하지.”

해언이 말했다.


“하지만 애도는 가장 잔인한 노동이야. 떠난 것을 다시 붙잡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매일 맹세하는 일이거든.”


사내는 가슴이 조여왔다. 그는 자신이 아직도 마음속에서 회사 이름을, 직함을, 실패한 회의를 되뇌고 있다는 걸 떠올렸다. 그것들은 이미 끝났지만, 끝났다고 인정하지 않았기에 계속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묻어주지 못한 과거는…”

해언이 말을 이었다.


“반드시 돌아온다네. 유령처럼. 꿈속에서, 결정의 순간에서, 가장 약한 날에.”

사내는 무릎을 꿇었다. 그 행동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어서였다.


“저도…”

그는 목이 메었다.


“저도 묻어도 되겠습니까.”

해언은 대답 대신, 사내 앞의 흙을 손으로 파주었다. 깊지 않았다. 아주 얕았다. 그 깊이가 오히려 더 잔인해 보였다.


“깊게 묻지 말게.”

해언이 말했다.


“깊이 묻으면, 언젠가 다시 파내고 싶어 지니까.”


사내는 그 자리에 자신의 과거를 내려놓았다. 성공했던 순간들, 실패했던 결정들, 끝내하지 못한 사과들. 그는 흙을 덮으며 처음으로 깨달았다. 슬픔은 눈물이 아니라, 손에 묻은 흙이라는 것을.


해언은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위로하지도, 등을 두드리지도 않았다. 애도에는 말이 필요 없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안개가 더 짙어졌다. 이름 없는 무덤들 위로 이슬이 내려앉았다. 돌들은 점점 더 무거워 보였다.


해언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여긴 성소가 아니네. 치유의 장소도 아니고.”

그는 무덤들을 둘러보았다.


“여긴… 내가 도망치지 않기 위해 매일 오는 자리야.”

사내는 그 말이 위로보다 더 깊게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살아남은 자는, 묻고도 계속 살아야 하거든.”

해언은 천천히 일어섰다. 허리가 펴질 때, 아주 미세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등대 쪽으로 돌아가는 그의 등 뒤에서, 사내는 처음으로 이해했다.

이 노인은 과거를 극복한 사람이 아니라, 과거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선택이야말로, 가장 가혹한 형벌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