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해언(海言)의 과거: 시간을 거스르는 항해자
[부제: 찰나에 깃든 영원을 보는 눈]
등대 꼭대기의 밤은 유난히 투명했다.
빛은 일정한 리듬으로 바다를 가르고 있었고, 어둠은 그 빛을 질투하지 않는 듯 얌전히 물러났다. 사내는 램프 옆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고, 이제는 붙잡아야 할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노인은 창가에 서 있었다.
바다를 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대상보다 조금 안쪽에 머물렀다. 마치 바다를 통해 다른 것을 확인하고 있는 사람처럼.
사내는 한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끝내 피하지 않기로 결심한 질문을 꺼냈다. 이 질문은 오래전부터 그 안에 있었고, 묻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자라 있었다.
“노인장.”
해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듣고 있다는 신호만 보냈다.
“이제는… 다 들었습니다. 사진도, 기록도, 좌표도요. 그럼에도 아직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사내는 숨을 고르고, 문장을 고르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1912년의 그 사건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보통의 시간 위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그는 한 박자 멈췄다.
“노인장, 당신은 죽지 않는 사람인가요.”
질문이 등대 안에 떨어졌다.
그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아주 깊었다. 마치 돌 하나를 바다에 던졌는데, 파문이 아니라 심해로 가라앉는 것처럼.
해언은 그제야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놀람도, 분노도 없었다. 다만 아주 짧은 피로가 스쳤다. 오래전에 수없이 받아왔던 질문을 다시 마주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허허.”
그는 짧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즐거움이 없었다.
“자네가 결국 이 질문까지 왔군.”
해언은 등잔의 불꽃을 조금 낮췄다. 빛이 약해지자, 그림자가 선명해졌다. 그의 얼굴에 생긴 주름 하나하나가 더 또렷이 드러났다.
“죽지 않는 사람이라…”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번엔 대답을 고르는 침묵이 아니라, 대답 자체를 꺼내기 싫어하는 침묵이었다. 그는 아주 오래 창밖을 보았다. 바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바라보는 것처럼.
사내는 그 침묵을 재촉하지 않았다.
이 질문에는 재촉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자네는 왜 내가 죽지 않는 것처럼 보였을까.”
해언이 먼저 물었다.
사내는 곧장 답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 사진 속의 얼굴. 변하지 않는 눈빛. 오래된 기억을 현재형으로 말하는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이… 너무 오래 버텼기 때문입니다.”
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람들은 오래 버틴 자를 보면, 그를 초월자라 부르지.”
그는 천천히 사내 곁으로 와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등잔 하나가 있었다. 불꽃은 작았지만, 확실히 타고 있었다.
“하지만 자네. 나는 죽지 않는 게 아니라… 죽음을 계속 겪고 있는 중이네.”
사내의 눈이 흔들렸다.
“무슨 뜻입니까.”
해언은 등대 불빛을 가리켰다.
“저 불빛을 보게. 계속 켜져 있는 것 같나?”
“아닙니다.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합니다.”
“그렇지. 그런데 우리는 왜 저걸 ‘항상 켜져 있다’고 느낄까.”
사내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람의 삶도 그렇네. 우리는 태어나고, 살고, 죽지. 그런데 진짜 중요한 건 ‘언제 꺼지느냐’가 아니라, 켜져 있을 때 어디를 비추었느냐야.”
해언은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수없이 꺼졌네. 욕망으로 한 번 죽었고, 상실로 한 번 죽었고, 후회로 수십 번 죽었지. 그때마다 이전의 나는 끝났네.”
사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도… 왜 지금까지 이렇게…”
해언은 고개를 저었다.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나?”
그는 잠시 웃었다.
“그건 내가 잘 산 게 아니라… 잘 놓았기 때문이네.”
사내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사람들은 죽음을 한 번만 겪는다고 착각하지. 그래서 두려워해. 하지만 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지 못해서 괴로워하네.”
해언은 등잔을 바라보며 말했다.
“과거의 나를 죽이지 못하고, 끝난 관계를 죽이지 못하고, 실패한 선택을 죽이지 못해. 그래서 몸은 앞으로 가는데, 영혼은 계속 뒤에 남아 있지.”
그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자네도 그랬지 않나.”
사내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파산한 뒤에도, 계속 그때의 나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래서 자네는 살아 있었지만, 흐르지는 않았네.”
해언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가 죽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건 내가 매번 제대로 죽었기 때문일 걸세.”
사내는 숨을 들이켰다. 그 말이 위로인지, 더 큰 형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럼… 시간은요.”
사내가 물었다.
“당신은 시간을 수선한다고 했습니다. 시간을 거스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고치는 게 아니네. 시간은 흐르게 두는 것이지.”
그는 사내의 눈을 바라보았다.
“시간을 멈추려는 자는 늘 현재를 미워해. 과거에 죄책감을 두고, 미래에 보상을 두지. 그래서 지금을 건너뛰지.”
해언은 손바닥을 펼쳤다.
“나는 더 이상 그 짓을 하지 않기로 했네.”
사내가 속삭였다.
“그래서… 영원처럼 보였던 겁니까.”
“아니.”
해언은 단호했다.
“그래서 찰나처럼 살게 된 것이지.”
그는 등대 불빛이 바다를 가르는 순간을 가리켰다.
“저 빛이 바다를 다 비추진 못하네. 아주 잠깐, 아주 좁은 길만 밝히지. 하지만 그게 없으면, 배는 난파하지.”
사내의 가슴이 조용히 울렸다.
“영원은 시간을 늘리는 게 아니네. 찰나를 제대로 사는 능력이지.”
해언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동작은 느렸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그래서 자네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네.”
그는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죽지 않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죽음을 미루지 않는 사람일 뿐이지.”
사내는 눈을 감았다. 그 문장이 가슴에 깊이 박혔다.
“노인장.”
그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당신은 무엇으로 남고 싶으십니까.”
해언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투박하게 말했다.
“남고 싶지 않네.”
그는 웃었다.
“누군가의 인생에 오래 남는다는 건, 그 사람의 항해를 방해하는 일일 수도 있으니까.”
그는 램프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저… 지나가다 등불 하나 켜준 사람이면 충분하네.”
사내는 그제야 알았다.
노인은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신비가 되지 않으려 애써온 사람이라는 것을.
등대 밖에서 새벽이 오고 있었다. 아주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그는 사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다음에는… 자네가 직접 키를 잡아야 하네. 내가 아니라.”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두려움이 아니라, 책임으로.
등대의 불빛이 다시 한번 바다를 갈랐다.
찰나였지만, 그 찰나는 충분히 영원했다.
[ 3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