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소설 : 듣는 사람들]
심야 12시.
온에어(On-Air)의 빨간 불이 들어오면 서은하는 완전히 밀폐된 공간에 혼자 남는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차단되고, 오직 누군가의 한숨과 자신의 목소리만 남는 좁고 고결한 공간.
라디오 부스의 두꺼운 방음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닫히는 순간, 은하는 바깥세상에서 쓰던 얼굴을 미련 없이 벗어두고 들어왔다. 거울 속의 무표정도, 낮에 마주친 피디의 비겁한 눈치도 그 문 너머에 있었다. 이 안에선 오직 FM 98.7 주파수만이 그녀의 유일한 통로였다.
은하는 마이크 앞에 놓인 텀블러의 뚜껑을 천천히 돌렸다. 연한 보리차 향기가 올라와 코끝을 스쳤다. 이 사소한 의식을 치러야 비로소 은하의 진짜 밤이 시작된다.
피디의 손가락이 하나씩 펴졌다.
하나. 둘. 셋.
“안녕하세요. <심야의 대화>, 서은하입니다.”
지난 7년 동안 단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억양과 속도였다. 은하의 목소리는 늘 180도 고온에서 구워낸 바싹한 비스킷 같았다. 담백하고, 건조하며, 금방 부서지기 쉬운 맛. 7년 동안 그녀가 배운 것은 공감이 아니라 반복이었다. 사람들은 진실보다 익숙한 거짓에 더 쉽게 안심한다는 사실 말이다.
모니터 위로 메시지 하나가 흐른다.
[DJ님, 오늘도 야근입니다.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는데,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어서...]
은하는 마이크를 향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라디오 너머로는 절대 보이지 않을 비즈니스용 미소였다.
“야근이라니요. 그건 내가 사는 게 아니라, 회사가 나를 사는 거죠. 내 수면과 피부 탄력까지 묶음 배송으로 가져간 건데. 억울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월급날 찍힌 숫자를 보며 ‘내 영혼값 치고는 좀 싸네’ 하고 웃어줘야지.”
매번 이런 식이었다. 위로인 듯 비수이고, 농담인 듯 팩트 폭격인 것. 청취자들은 은하의 이 ‘매운맛 위로’에 중독되어 있었다. 울어도 되지만, 울다가 정신은 차리게 만드는 말.
은하는 잠시 헤드폰을 벗고 귀 주변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가죽 패드의 온기가 닿았던 자리가 화끈거렸다. 수천 명의 인생을 귓속으로 밀어 넣는 일은 물리적인 통증을 동반했다.
“다음 사연입니다. 어머니 병원 대기실에서 컵라면을 드셨다는 분.”
은하는 찬물 한 모금을 마셨다. 차가운 냉기가 정신을 깨웠다. 차가운 물방울이 컵 표면을 타고 흘러 은하의 손등에 떨어졌다.
“눈물 젖은 라면을 드셔보셨나요? 아뇨, 드시지 마세요. 라면 불어요. 눈물은 다 울고 닦으면 그만이지만, 불어버린 라면은 답이 없거든요. 지금 하셔야 할 일은 어머니 옆을 지키는 게 아니라 본인 몸을 지키는 겁니다.”
그때였다. 사연 스크롤 박스에 낯선 문장 하나가 툭, 걸렸다.
[오늘은 DJ님 말이 틀렸습니다.]
은하의 손가락이 믹서 위에서 멈췄다. 부스 안의 온도가 갑자기 1도쯤 떨어진 것 같았다. 은하는 무의식적으로 가디건 자락을 여몄다. ‘틀렸다’니. 이 바닥에서 7년을 구르며 온갖 소리를 다 들었지만, 그녀의 ‘말’ 자체가 틀렸다고 들이받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은하는 노래가 나가는 동안 그 문장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옆 스튜디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드럼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은하는 그 열 자 남짓한 문장 속에 갇혀버렸다. 음악이 끝났다. 은하는 피디의 큐 사인을 무시했다. 라디오에서 ‘방송 사고’ 직전까지 가는 3초의 공백. 그것은 심해보다 깊고 무거운 정적이었다.
“방금, 아주 짧은 문자 하나를 확인했습니다.”
은하의 목소리에서 건조함이 사라지고 낯선 물기가 배어 나왔다.
“제 말이 틀렸다네요. 라면이 불든 말든 눈물부터 닦아야 하는 밤이 있다고, 제 위로가 오답이었다고 말씀해 주신 분이 계십니다. 생각해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사실은요, 오늘 저녁에 뭘 먹었는지보다 내일 누구한테 욕을 먹을지가 더 걱정되는 겁쟁이일 뿐인데요.”
방송이 끝나고 부스 밖으로 나왔을 때, 새벽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은하는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자신의 발소리가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소리를 들었다. 매일 듣던 소리였지만, 오늘은 유난히 선명했다. 은하는 처음으로 낮게 웃었다. 알 수 없는 해방감이었다.
부스 안의 조명은 꺼졌다. 그러나 은하의 머릿속엔 그 짧은 한 줄이 밤거리의 네온사인처럼 선명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그는 누구였을까.
내 완벽한 문장에 금을 내고 간 침입자는.
심야 12시 59분. 라디오는 끝났지만, 은하는 차에 올라타 핸들 위에 잠시 이마를 기댔다. 차가운 가죽의 감촉이 이마를 타고 전해졌다.
이제 은하의 진짜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