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사과라는 이름의 비겁한 무사함

​[연작 소설: 듣는 사람들]

by 산 사람


그의 일터는 구청 민원실 3번 창구다. 숫자 3은 참으로 고약하다. 1번처럼 모든 주목을 받지도 않고, 마지막 번호처럼 마감의 해방감이 있지도 않다. 그저 앞과 뒤에 끼인 채, 적당히 화가 난 사람들이 몰려드는 자리. 재훈은 그 ‘집요한 분노’를 온종일 상대해야 하는, 계약직이라는 이름의 감정 쓰레기통이었다.


재훈은 민원인이 바뀔 때마다 창구 유리에 묻은 손가락 지문들을 안경 닦이로 공들여 지웠다. 뽀득거리는 마찰음이 들려야 비로소 다음 파도를 맞이할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재훈의 입술 끝에는 늘 빨간 사과가 매달려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발이 밟혀도, 빗줄기 때문에 늦어지는 버스 앞에서도 그는 조용히 사과를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굴복이 아니라, 타인의 날카로운 신경이 내 살에 닿는 것이 싫어서 펼치는 가장 효율적인 방어막이었다.


“아니, 이봐요! 내가 이 서류 한 장 떼려고 연차까지 냈는데, 도장이 틀렸다면 내 하루치 일당은 당신이 줄 거야? 당신이 내 상사한테 대신 욕먹어줄 거냐고!”


오전 열 시 십오 분. 분노는 어제부터 잘 데워진 것처럼 정확히 재훈의 콧등을 향해 날아왔다. 사내의 고함이 창구 유리를 진동시켰다. 재훈은 익숙하게 고개를 45도 각도로 꺾었다. 상대의 눈을 정면으로 보지 않으면서도 경청하고 있다는 착각을 주는, 지난 2년의 계약직 생활이 골격에 새겨 넣은 생존의 각도였다.


“연차까지 내셨는데 번거롭게 해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규정이란 게 참 사람 마음보다 야박해서 그렇습니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 해드리고 싶은데, 제가 힘없는 계약직이라 이 종이 한 장에 휘둘리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재훈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 마치 겨울 아침, 잘 닦인 대리석 바닥처럼 차갑고 매끄러웠다. 사내는 재훈의 매끄러운 사과 위에서 몇 번이나 헛발질을 하더니, 결국 축축하게 젖은 한숨을 내뱉으며 돌아섰다. 재훈은 사내가 남긴 땀 냄새가 흩어질 때까지 마음속으로 열까지 숫자를 세었다.


사과는 해결책이 아니었다. 단지 상대의 기운을 빼서 안전하게 돌려보내는 가장 가성비 좋은 전략일 뿐이었다. 무사함이란 계약직에게 정규직 전환보다 절실한 생존의 문제였으니까.


점심시간, 재훈은 편의점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메뉴는 항상 ‘제육 듬뿍 도시락’이다. 전자레인지 안에서 360도로 뱅글뱅글 돌아가는 도시락을 보며, 재훈은 자신의 인생도 저 유리판 같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돌아는 가는데 결국 1cm도 나아가지 못하는 삶.


​2분 30초. 짧은 시간이 지나면 도시락은 온통 뜨거운 척 김을 내뿜지만, 젓가락을 넣는 순간 속은 여전히 차가울 때가 많다. 그렇다고 3분 30초를 돌리려니 뜨거운 것이 부담스러워 선택한, 딱 그만큼의 온도. 겉은 번지르르한 예우를 갖추지만 속은 결코 데워지지 않는 냉소. 재훈의 현재가 딱 그 정도의 온도였다. 재훈은 인공적인 불 맛을 씹으며 창밖의 눈부신 햇살을 외면했다. 혀끝이 얼얼해질수록 창구에서 쌓인 비릿한 불쾌감이 조금씩 휘발되는 것 같았다.


재훈은 다 먹은 도시락 용기를 비닐봉지에 담아 매듭을 꽉 조였다. 공기 한 점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 단단한 매듭이었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자 어젯밤 옥상에서 만졌던 이어폰의 차가운 질감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오늘 밤에도 그 목소리를 들어야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은 창구 뒤에 숨겨진 그의 진짜 얼굴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는 무색무취의 존재로 남는 법을 배웠고, 그것이 상처받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정교한 계산 속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쯤이었다. 이어폰 너머, 정답만을 말하는 그 여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