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소설 : 듣는 사람들]
윤재훈의 삶은 초침 소리처럼 정확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틱, 틱, 틱.
하나의 시간이 끝나면 다음 시간이 시작됐고, 그 사이에는 어떤 여유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퇴근길 지하철 차창에 비친 그의 얼굴은 아무것도 기입되지 않은 빈 서류 같았다.
도심 외곽의 낡은 2층 건물.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은 늘 비스듬히 기울어진 절벽 같았다. 재훈은 낡은 난간을 잡지 않았다. 누군가 문 앞에 내놓은 음식물 쓰레기봉투의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는 보폭을 흩트리지 않고 어둠을 밟고 올라갔다. 기댈 곳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하루 종일 팽팽하게 유지해 온 마음의 근육이 무너져버릴까 겁이 났기 때문이다.
퇴근 후 편의점에서 레트로 캔커피 하나를 사는 일은 재훈에게 ‘품격 있는 질서’였다. 질서는 아무 기대 없이 따라가기만 하면 실망할 일도 없게 해 주었다. 편의점 문을 열 때 울리는 경쾌한 종소리는 낮 동안 민원실에서 들었던 비명들을 잠시 밀어냈다.
커피 매대 앞에 섰을 때, 평소 재훈이 집던 자리가 휑한 빈칸으로 남아 있었다. 재훈은 무의식적으로 뒤쪽에 있던 캔커피를 앞으로 당겨 그 자리를 채웠다. 왠지 그냥 지나치기엔 마음이 허락하질 않았다.
편의점 알바생과의 거리는 딱 ‘바코드 소리’만큼. “봉투 필요하세요?”라는 질문에 “아뇨”라고 대답하는 0.5초가 재훈이 하루 중 유일하게 사과하지 않고 뱉는 말이었다.
옥상 문을 열자 서울의 불빛이 검은 물결 위를 반짝이듯 펼쳐졌다. 12시가 되어 휴대폰을 켰다. 이어폰을 타고 흘러나오는 서은하의 오프닝은 3년째 변함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심야의 대화>, 서은하입니다.”
그 인사말은 재훈에게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았음’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서은하는 재훈에게 일종의 ‘안전가옥’이었다. 재훈은 자신의 상처가 누군가의 야식 메뉴처럼 씹히는 게 싫어 한 번도 사연을 보낸 적이 없었다. 캔커피의 고리를 따는 ‘칙’ 소리가 고단했던 하루의 마침표 같았다.
그런데 그날 밤, 그 견고한 침묵에 균열이 생겼다. 서은하가 라면의 면발 개수까지 세어주며 우아하게 인생을 논하고 있었다.
“여러분, 지금 힘들어도 라면 붇기 전에 드세요. 그래야 내일 또 버티죠.”
재훈은 한 입 들이킨 캔커피의 맛이 유난히 쓰다고 느꼈다. 혀끝에 남은 설탕의 단맛이 오히려 목구멍을 텁텁하게 긁어 내렸다. 그녀의 위로는 너무나 우아해서, 오히려 재훈의 초라한 옥상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세련된 폭력이었다.
재훈은 난간을 꽉 쥐었다. 기댈 곳을 잡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손가락이 하얗게 질리도록 철제를 움켜쥐었다. 그는 처음으로 휴대폰 화면에 글자를 입력했다. 3년 동안 커서만 깜빡이던 빈칸에 짧은 문장 하나를 적었다.
[오늘은 DJ님 말이 틀렸습니다.]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손끝에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손바닥을 타고 번졌다. 옥상 한구석에서 길고양이가 도망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재훈은 멍하니 자신의 손가락 끝을 내려다보았다.
재훈은 답장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니, 무서워서 휴대폰을 주머니 깊숙이 쑤셔 넣었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가벼웠다. 낡은 운동화가 시멘트 계단에 닿을 때마다 경쾌한 마찰음이 났다. 늘 숨죽여 걷던 그 계단에서 처음으로 제 소리를 내며 걷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건, 때로 누군가에게 오답이 되어주는 일이다. 재훈은 그 낯선 감각을 품은 채 방으로 돌아와 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천장에 비친 가로등 불빛이 오늘따라 유난히 노란색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이제, 서은하가 대답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