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DJ의 말버릇

​​[연작 소설 : 듣는 사람들]

by 산 사람


​서은하에게는 아주 고약하고도 우아한 말버릇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잘 포장된 직업적 오만이자 타인의 비극을 안전하게 관람하기 위해 쳐놓은 방어기제였다.


​“괜찮아질 거예요.”

“지금은 힘들어도, 결국 지나가는 중입니다.”

“버티는 것도 실력이에요. 당신은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그 문장들은 은하의 입술을 타고 너무나 미끄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잘 닦인 빙판 위를 지나는 스케이트 날처럼. 상대가 부스 너머에서 눈물을 쏟든, 생의 마지막 벼랑 끝에서 문자를 보내든, 은하의 입에서는 늘 같은 위치에서 호출된 단어들이 일정한 온도로 출력됐다.


​은하는 그 정답들이 쌓여 자신의 품격이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오늘 밤, 그 견고한 성벽에 균열이 갔다.


​[오늘은 DJ님 말이 틀렸습니다.]


​그것은 짧았고, 단호했으며, 무엇보다 정중했다. 수많은 악플러의 욕설은 은하를 상처 입히지 못했다. 그건 그들의 수준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이 문장은 달랐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은하의 방송을 지켜본 관찰자가 건네는 정중한 ‘사망 선고’ 같았다.


​“방금, 아주 짧은 편지 하나를 확인했습니다.”


​은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서 7년 된 비스킷 같은 건조함이 사라지고, 낯선 물기가 배어 나왔다.


​“제 말이 틀렸다네요. 라면이 불든 말든 눈물부터 닦아야 하는 밤이 있다고, 제 위로가 오답이었다고 말씀해 주신 분이 계십니다. 생각해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뭐라고 남의 인생에 훈수를 뒀나 싶습니다.”


​그 말은 청취자에게 보내는 사과라기보다, 화가 난 자기 자신에게 허락하는 최초의 고백에 가까웠다.


​“익명의 청취자님. 고맙습니다. 오늘 제 위로가 완벽한 오답이었다는 걸 알려주셔서. 덕분에 저도 오늘 밤엔 누군가를 가르치는 DJ 말고, 그냥 같이 길을 잃는 사람으로 퇴근할 수 있게 됐네요.”


​방송이 끝나고 부스 밖으로 나왔을 때, 새벽 공기는 유난히 차갑고 날카로웠다.

​은하는 코트 깃을 세우며 처음으로 낮게 웃었다. 7년 만에 처음 느껴보는, 조금은 화가 나면서도 알 수 없는 해방감이었다. 하지만 그 해방감은 방송국 정문을 나서는 순간 차가운 냉기로 변해 그녀를 덮쳤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은 지독하게 고요했다. 은하는 핸들을 잡은 손등 위로 맺힌 땀이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집은 은하의 방송 멘트처럼 차갑고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불도 켜지 않은 거실에서 가전제품들의 대기 전력 표시등만이 붉은 눈처럼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은하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조명을 켜자 7년 동안 다듬어온 '서은하'라는 브랜드의 민낯이 드러났다. 타인에게 정답을 배급하느라 정작 자신의 속은 텅 비어버린 허상.


'틀렸다라...'

​은하는 세면대에 차가운 물을 가득 채우고 얼굴을 파묻었다. 숨이 막혀올 때쯤 고개를 들자, 잘 다려진 위로의 가면이 씻겨 내려간 얼굴이 보였다.


​“그래, 나는 무서웠던 거야.”


​은하는 젖은 얼굴로 낮게 읊조렸다. 자신이 틀렸을 때 내놓을 진짜 '나의 말'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탄로 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녀는 침대에 눕는 대신 서재 구석에서 낡은 공책을 꺼냈다. 그리고 첫 페이지에 재훈이 던진 그 문장을 적었다.


​[오늘은 DJ님 말이 틀렸습니다.]


​그 문장 아래로, 은하는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감정들을 쏟아냈다. 세련된 비유도, 고상한 단어도 걷어낸 은하의 진짜 밑바닥이었다.


​'쪽팔린다.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쪽팔리다.'


​그 문장을 적는 순간, 마음 안의 공기가 전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7년이다. 매일 밤 고상한 척, 세상 모든 아픔을 다 아는 척하며 입을 놀렸다. 나는 그저 남의 불행을 소재로 품격을 쇼핑하던 장사꾼에 불과했던 건 아닌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흔들고 있었다.


[라면이 불든 말든 눈물부터 닦아야 한다고? 맞다. 그게 맞다. 뱃속에 들어가는 밀가루 덩어리보다 내 눈에서 흐르는 이 뜨거운 게 훨씬 더 급한 사람들이 있다. 나는 한 번도 그 뜨거움을 만져본 적이 없다. 그저 멀찍이 서서 온도가 어떠니, 색깔이 어떠니 평론만 해댔을 뿐이다.

​내 위로가 폭력이었다는 말, 부인할 수가 없다. 서은하, 너는 오늘 7년 공든 탑을 제 손으로 무너뜨렸다. 그런데 이상하지. 무서워 죽겠는데, 한편으로는 이제야 제대로 숨이 쉬어지는 것 같다.]


​은하는 마지막 문장을 적고 펜을 내던지듯 놓았다. 종이 위에는 잉크가 번진 자국과 펜 끝에 눌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12시 59분. 라디오는 공식적으로 끝났지만, 서은하라는 인간의 주파수는 이제껏 도달하지 못했던 가장 낮고 축축한 곳을 향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결심했다. 자신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든, 그러나 처음으로 자신을 '인간'으로 대해준 그 무례한 침입자를 기필코 찾아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