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소설 : 듣는 사람들]
서은하에게는 아주 고약하고도 우아한 말버릇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잘 포장된 직업적 오만이자 타인의 비극을 안전하게 관람하기 위해 쳐놓은 방어기제였다.
“괜찮아질 거예요.”
“지금은 힘들어도, 결국 지나가는 중입니다.”
“버티는 것도 실력이에요. 당신은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그 문장들은 은하의 입술을 타고 너무나 미끄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잘 닦인 빙판 위를 지나는 스케이트 날처럼. 상대가 부스 너머에서 눈물을 쏟든, 생의 마지막 벼랑 끝에서 문자를 보내든, 은하의 입에서는 늘 같은 위치에서 호출된 단어들이 일정한 온도로 출력됐다.
은하는 그 정답들이 쌓여 자신의 품격이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오늘 밤, 그 견고한 성벽에 균열이 갔다.
[오늘은 DJ님 말이 틀렸습니다.]
그것은 짧았고, 단호했으며, 무엇보다 정중했다. 수많은 악플러의 욕설은 은하를 상처 입히지 못했다. 그건 그들의 수준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이 문장은 달랐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은하의 방송을 지켜본 관찰자가 건네는 정중한 ‘사망 선고’ 같았다.
“방금, 아주 짧은 편지 하나를 확인했습니다.”
은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서 7년 된 비스킷 같은 건조함이 사라지고, 낯선 물기가 배어 나왔다.
“제 말이 틀렸다네요. 라면이 불든 말든 눈물부터 닦아야 하는 밤이 있다고, 제 위로가 오답이었다고 말씀해 주신 분이 계십니다. 생각해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뭐라고 남의 인생에 훈수를 뒀나 싶습니다.”
그 말은 청취자에게 보내는 사과라기보다, 화가 난 자기 자신에게 허락하는 최초의 고백에 가까웠다.
“익명의 청취자님. 고맙습니다. 오늘 제 위로가 완벽한 오답이었다는 걸 알려주셔서. 덕분에 저도 오늘 밤엔 누군가를 가르치는 DJ 말고, 그냥 같이 길을 잃는 사람으로 퇴근할 수 있게 됐네요.”
방송이 끝나고 부스 밖으로 나왔을 때, 새벽 공기는 유난히 차갑고 날카로웠다.
은하는 코트 깃을 세우며 처음으로 낮게 웃었다. 7년 만에 처음 느껴보는, 조금은 화가 나면서도 알 수 없는 해방감이었다. 하지만 그 해방감은 방송국 정문을 나서는 순간 차가운 냉기로 변해 그녀를 덮쳤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은 지독하게 고요했다. 은하는 핸들을 잡은 손등 위로 맺힌 땀이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집은 은하의 방송 멘트처럼 차갑고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불도 켜지 않은 거실에서 가전제품들의 대기 전력 표시등만이 붉은 눈처럼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은하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조명을 켜자 7년 동안 다듬어온 '서은하'라는 브랜드의 민낯이 드러났다. 타인에게 정답을 배급하느라 정작 자신의 속은 텅 비어버린 허상.
'틀렸다라...'
은하는 세면대에 차가운 물을 가득 채우고 얼굴을 파묻었다. 숨이 막혀올 때쯤 고개를 들자, 잘 다려진 위로의 가면이 씻겨 내려간 얼굴이 보였다.
“그래, 나는 무서웠던 거야.”
은하는 젖은 얼굴로 낮게 읊조렸다. 자신이 틀렸을 때 내놓을 진짜 '나의 말'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탄로 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녀는 침대에 눕는 대신 서재 구석에서 낡은 공책을 꺼냈다. 그리고 첫 페이지에 재훈이 던진 그 문장을 적었다.
[오늘은 DJ님 말이 틀렸습니다.]
그 문장 아래로, 은하는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감정들을 쏟아냈다. 세련된 비유도, 고상한 단어도 걷어낸 은하의 진짜 밑바닥이었다.
'쪽팔린다.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쪽팔리다.'
그 문장을 적는 순간, 마음 안의 공기가 전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7년이다. 매일 밤 고상한 척, 세상 모든 아픔을 다 아는 척하며 입을 놀렸다. 나는 그저 남의 불행을 소재로 품격을 쇼핑하던 장사꾼에 불과했던 건 아닌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흔들고 있었다.
[라면이 불든 말든 눈물부터 닦아야 한다고? 맞다. 그게 맞다. 뱃속에 들어가는 밀가루 덩어리보다 내 눈에서 흐르는 이 뜨거운 게 훨씬 더 급한 사람들이 있다. 나는 한 번도 그 뜨거움을 만져본 적이 없다. 그저 멀찍이 서서 온도가 어떠니, 색깔이 어떠니 평론만 해댔을 뿐이다.
내 위로가 폭력이었다는 말, 부인할 수가 없다. 서은하, 너는 오늘 7년 공든 탑을 제 손으로 무너뜨렸다. 그런데 이상하지. 무서워 죽겠는데, 한편으로는 이제야 제대로 숨이 쉬어지는 것 같다.]
은하는 마지막 문장을 적고 펜을 내던지듯 놓았다. 종이 위에는 잉크가 번진 자국과 펜 끝에 눌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12시 59분. 라디오는 공식적으로 끝났지만, 서은하라는 인간의 주파수는 이제껏 도달하지 못했던 가장 낮고 축축한 곳을 향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결심했다. 자신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든, 그러나 처음으로 자신을 '인간'으로 대해준 그 무례한 침입자를 기필코 찾아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