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이름 없는 청취자

​​[연작 소설 : 듣는 사람들]

by 산 사람


눅눅한 습기가 가득한 구청 앞 식당가. 낡은 환풍기가 삐걱거리는 비명을 지르며 삼겹살 연기를 빨아들이려 애썼지만, 공기는 이미 뿌연 기름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터지는 소리와 취객들의 소란함이 어지럽게 뒤섞인 공간. 재훈은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인, 끈적한 기름때가 앉은 물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통 안에서 흔들리는 얼음 조각들이 식당의 소음을 필사적으로 견뎌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야, 윤재훈. 너는 왜 그렇게 사람이 기계 같냐? 가끔 보면 네 속엔 인공지능 칩이라도 박혀 있는 것 같아.”


​맞은편에 앉은 계약직 동료 미정이 상추쌈을 크게 밀어 넣으며 물었다. 미정은 이 비정한 일터에서 유일하게 재훈의 무표정 너머를 궁금해하는 인물이었다. 재훈은 캔커피 대신 소주잔을 만지작거렸다.


“듣는 게 제일 싸게 먹히니까요.” 재훈의 대답은 무미건조했다.


​“그건 맞는데, 너는 좀 심해. 가끔 보면 네가 ‘듣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소리 수거함’ 같아 보여. 남들 화풀이 다 담아두고 뚜껑 꽉 닫아놓는 쓰레기통 말이야.”


미정의 비유는 비릿했지만 정확했다. 재훈은 소주를 삼켰다. 목구멍이 타는 듯한 감각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잔을 내려놓고 소주병 라벨 끝이 살짝 일어난 부분을 손톱으로 긁어냈다. 사소하고 무의미한 동작이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정의 날카로운 말들이 가슴속까지 쏟아져 들어올 것 같았다.


​“라디오 청취자도 똑같아요. 거긴 번호표가 없거든요. 그냥 듣고만 있으면 아무 책임도 안 져도 돼요. 저한테는 그게 가장 품격 있는 질서였어요.”


“참나, 그게 좋아? 너는 3년 내내 유령처럼 듣기만 한다며. 그게 무슨 관계니? 그냥 관음이지.”


​‘관음’이라는 단어가 재훈의 가슴에 박혔다. 재훈은 젓가락으로 불판 위에서 시커멓게 타버린 고기를 뒤집었다. 연기가 매캐하게 올라와 눈이 따가웠다.


“근데 너 어제는 왜 그랬냐? 너 어제 방송에 문자 보냈다며. 게시판 보니까 난리 났던데. 그 ‘오답’ 어쩌고 한 사람, 너 맞지?”


​미정의 물음에 재훈은 잠시 침묵했다. 어제 전송 버튼을 누를 때 느꼈던 그 짜릿한 전율이 손끝에 다시 맴도는 것 같았다. 천장에 매달린 TV 화면 속 무음으로 흐르는 뉴스 영상을 보았다. 세상은 여전히 시끄러운데, 자신의 머릿속만은 진공상태처럼 고요해졌다.


​“그 여자가 너무 우아하게 굴더라고요. 불어 터진 라면을 먹으면서도 눈물조차 안 나는 밤이 있다는 걸 하나도 모르면서. 어제는 그게 꼭 세련된 폭력처럼 느껴졌어요.”


“와, 윤재훈. 너 드디어 수거함 뚜껑 열렸네?”


​재훈은 식당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았다. 기름기와 연기에 얼룩진 창문 너머로 민원실 3번 창구의 재훈도, 익명의 청취자도 아닌, 처음으로 세상에 '오답'을 내던진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창밖 가로등 아래 흩날리는 먼지들이 빛을 받아 비로소 자신의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서은하 씨가 대답할 차례죠. 내가 던진 오답이 진짜인지, 그 여자의 말들이 진짜인지.”


​재훈은 남은 술을 털어 넣었다. 쓴 소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 가슴에 뜨겁게 자리 잡았다. 식당 밖으로 나오자 밤공기는 여전히 차갑고 날카로웠다.


지하 식당의 매캐한 고기 냄새가 옷깃에 진득하게 배어 있었지만, 재훈의 가슴속에서는 ‘틀렸습니다’라는 네 글자가 어떤 뜨거운 엔진보다 더 강렬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재훈은 주머니 속의 캔커피를 꽉 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소주 기운에 달아오른 손바닥을 기분 좋게 식혀주었다. 그는 처음으로 45도가 아닌, 정면의 길을 똑바로 응시하며 걷기 시작했다. 침묵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