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오답의 역습

​​[연작 소설 : 듣는 사람들]

by 산 사람


방송 시작 30분 전. 제작진 회의실의 공기는 평소보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았다. 강 피디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본을 테이블 위로 던졌다. 7년을 함께한 동료였지만, 오늘만큼은 그의 걱정이 비겁한 타협처럼 느껴졌다.


​“은하 씨, 오늘 오프닝 원고 톤이 너무 세지 않아? 이건 라디오지, 청문회가 아니라고. 게시판 반응 벌써 갈리고 있어. 제발 프로답게 굴어.”


​메인 작가인 김 작가 역시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소리를 내며 거들었다. 라디오는 감정을 팔기도 하지만, 동시에 광고를 팔아야 하는 상품이었다. 은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대신, 작가가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정답지 같은 원고’를 천천히 접어 가방 깊숙이 밀어 넣었다.


​“오늘은 위로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대신 질문할 거예요. 안아주는 건 어제까지로 충분했어요. 오늘은 그 품이 얼마나 답답했는지 물어볼 차례고요.”


심야 12시. 스튜디오에 빨간 ‘ON AIR’ 불이 켜졌다. 은하는 헤드폰을 고쳐 썼다.


“안녕하세요. <심야의 대화>, 서은하입니다.”


​평소보다 낮고 서늘한 목소리. 폭풍 전야의 바다처럼 고요한 진동이 섞여 있었다.


“어제, 제 말이 틀렸다고 보내주신 분. 지금 이 방송 듣고 계시다면, 다시 한번 연락 주세요. 이름도, 당신이 누구인지도 묻지 않겠습니다. 그냥 알려주세요. 제가 뱉은 그 수많은 위로 중, 무엇이 당신의 삶을 그토록 아프게 찔렀는지.”


​부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엔지니어의 손이 믹서 노브 위에서 멈췄고, 유리창 너머 강 피디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은하는 믹서의 노브를 내리고 헤드폰을 벗었다. 기계적인 화이트 노이즈조차 들리지 않는 완전한 진공의 상태. 그 30초의 정적이 라디오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흘러갔다.


그 시각, 윤재훈은 옥상 벤치에서 이어폰을 뺐다 다시 꽂았다. 환청인가 싶었다. 늘 완벽한 문장만 송출하던 그 여자가, 지금 수만 명의 귀를 빌려 자신을 정면으로 호출하고 있었다.


​재훈의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듯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건 계획에 없던 전개였다. 그는 그저 돌을 던지고 물러나 숨어야 했다. 그게 2년을 '3번 창구'에서 살아온 그의 방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은하는 그에게 숨을 공간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다.


“틀렸다고 말씀하신 분. 저를 장사꾼으로 만들지 말아 주세요.”


​재훈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에 축축하게 땀이 찼다. 이제 그의 침묵은 더 이상 안전한 방패가 아니었다. 메시지 입력창에 커서가 깜빡였다. 재훈은 길게 쓰지 않았다.


[ ID:3번 창구

​괜찮아질 거라는 말이요. 그 말은 지금 제 삶을 통째로 부정하는 말이었습니다. 제 지금은 이토록 엉망인데, 당신은 왜 자꾸만 오지 않은 미래를 빌려와서 지금의 저를 초라하게 만듭니까.]


부스 안, 은하의 모니터에 재훈의 문장이 떴다. 은하는 아주 천천히 그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미래를 빌려와서… 지금의 나를 초라하게 만들지 마라….”


​은하는 고개를 숙였다. 마이크 앞의 그녀가 처음으로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군요. 제가… 지독하게도 오만했습니다. 오늘을 견디는 사람에게 내일이라는 희망을 들이밀면서, 당신의 고귀한 현재를 무시하고 있었네요.

[ID:3번 창구]님,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라디오는 깊은 정적에 잠겼다. 청취자들이 각자의 불어 터진 라면과 각자의 3번 창구를 떠올리며 함께 숨을 참고 있는 소리였다. 은하의 목소리가 다시 단단해졌다.


“오늘 밤 제가 확실히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은 제가 완벽하게 틀렸습니다.”


방송이 끝났을 때, 라디오 게시판은 폭발했다. 최고의 지지와 격렬한 분노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강 피디는 머리를 감싸 쥐고 스튜디오를 나갔고, 김 작가는 원고 뭉치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하지만 은하는 조용히 웃었다.


7년 만에 처음으로, 정답을 주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야 12시 59분. 도시는 여전히 소란스럽고 무례했다. 하지만 그날 밤, 라디오라는 낡은 매체 안에서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은 처음으로 같은 높이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옥상에서 비치는 서울 야경의 불빛들이 재훈의 눈동자에 일렁였다. 처음으로 45도가 아닌, 정면의 밤하늘을 똑바로 응시하는 두 사람의 주파수가 도시의 어둠 속을 뜨겁게 헤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