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부 : 드디어 세상으로 — “태양과 바람의 첫 번째 초대”
벌집 안의 공기는 어제와 다름없이 후덥지근하고 분주했다. 하지만 조아의 마음은 어제 알리다에게 들었던 서슬 퍼런 경고가 마음속에 새겨져 무거웠다. 그런 조아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벨라가 다가와 엉덩이를 툭 쳤다.
“조아! 기운 내. 오늘은 알리다 선생님이 안 계시는 틈을 타서 저기 아래쪽 ‘얼음 계곡’ 구경 가기로 했잖아!”
“얼음 계곡? 거긴 너무 위험하다고 하셨는데….”
조아가 머뭇거리자, 어느새 다가온 티나와 루나, 미나가 조아를 에워쌌다.
“걱정 마, 조아. 오늘은 비행 연습이 아니라 ‘물 보급볕’ 할머니들을 따라가 보는 거야. 그분들은 늘 조용히 벌집을 드나들어서 도대체 어디서 그 귀한 물을 가져오는지 궁금했거든.”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조아는 다시 날개를 폈다. 따스한 초봄 햇볕이 숲을 감쌌지만, 벌집을 벗어나 깊은 골짜기로 내려가자 공기는 칼날처럼 차가웠다. 계곡 입구에 도착한 다섯 친구는 일제히 숨을 죽였다.
“저기 봐….”
루나가 가리킨 곳에는 수십 마리의 늙은 벌들이 바위 위를 덮은 이끼 사이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조아와 친구들처럼 번뜩이는 노란 줄무늬도, 팽팽한 날개 근육도 없었다. 몸은 오래된 고목처럼 거칠고 검게 변해 있었고, 날개 끝은 비바람에 닳아 너덜너덜했다.
그중 유독 작고 마른 벌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그녀의 이름은 에스더였다. 에스더는 살얼음이 살짝 덮인 물가 바위에 발을 딛고 있었다.
“할머니! 거기 너무 위험해요! 미끄러지면 큰일 난다고요!”
참지 못한 미나가 소리쳤지만, 에스더는 대답 대신 가늘게 떨리는 더듬이를 물가로 뻗을 뿐이었다. 그녀의 발밑으로 시린 물살이 무심히 지나갔다. 꿀벌에게 찬물은 치명적인 독이다. 체온이 떨어지면 근육이 굳고, 그대로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영영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조아의 눈에 에스더의 조금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늙은 벌 한 마리가 차가운 바위틈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날개는 얼음 조각에 눌린 듯 굳어 있었고, 몸은 미동조차 없었다.
“저기… 저 할머니가 쓰러졌어요! 도와드려야 해요!”
조아가 달려가려 하자 에스더가 떨리는 날개를 들어 조아의 앞을 막았다. 에스더의 겹눈에는 깊은 슬픔과 함께 차가운 체념이 서려 있었다.
“안 된다, 어린 항해사야. 저분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셨어. 저곳은 그렇게 함부로 다가설 수 있는 곳이 아니란다.”
조아는 에스더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죽어가는 동료를 두고 물러서라니. 하지만 에스더는 쓰러진 동료에게 한 번 시선을 던진 뒤, 다시 혀를 물가로 뻗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 한 방울을 혀 끝에 머금자, 그녀의 작은 몸이 미세하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냉기가 가슴을 얼려버리려는 듯 에스더는 날개를 거칠게 떨며 체온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것은 비행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벌이는 처절한 몸부림처럼 보였다. 차가운 물 한 방울을 자신의 체온으로 데워 벌집으로 가져가려는 숭고한 노동.
“할머니…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물이 그렇게 중요해요?”
벨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에스더는 물 한 방울을 힘겹게 삼킨 뒤,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얘들아, 우리 벌집의 모든 생명은 이 물 한 방울에 달려 있단다. 너희가 아는 달콤한 꿀도 사실은 물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 꽃에서 가져온 꿀은 너무 끈적해서 어린 애벌레들이 먹기 힘들거든. 이 물로 묽혀야 영양 가득한 먹이가 되지.”
에스더는 힘겹게 혀를 내밀어 또 한 방울의 물을 머금었다.
“또 한 가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어. 햇볕이 뜨거운 여름날, 벌집 안이 너무 더워지면 아기 벌들이 견딜 수 없어. 그때 우리 ‘물 보급병’들이 가져온 물을 벌집 곳곳에 뿌려서 너희 언니들이 날개로 힘껏 부치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단다. 이걸 ‘기화 냉각’이라고 하는데, 이 물이 없으면 벌집은 뜨거워져서 다 죽게 돼.”
말을 하는 동안에도 에스더의 해진 날개 끝에 날카로운 고드름 파편이 박혔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꿀주머니가 투명한 생명수로 가득 찰 때까지, 그녀는 차가운 바위를 움켜쥔 발끝에 모든 힘을 쏟았다.
마침내 물을 가득 채운 에스더가 힘겹게 날개를 세웠다. 비틀거리며 허공으로 솟구치는 그녀의 비행은 조아 일행의 경쾌함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마치 온 세상의 슬픔을 짊어지고 가는 듯한 느릿한 날갯짓이었다.
조아와 친구들은 조용히 에스더의 뒤를 따랐다. 벌집 입구에 도착하자, 에스더는 기다리고 있던 어린 일벌들에게 머금었던 물을 정성스레 나누어 주었다. 그 물은 벌집 내부의 온도를 낮추고, 아기 벌들이 먹는 식량을 반죽하는 소중한 재료가 될 것이다.
모든 물을 나누어 준 에스더가 구석진 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조아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할머니… 왜 그렇게까지 하세요? 날개도 다 망가졌는데….”
에스더는 힘겹게 겹눈을 뜨고 조아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지혜롭고도 평온한 빛이 서려 있었다.
“어린 항해사야, 우리처럼 낡은 벌들은 이제 먼 숲까지 날아가 꽃가루를 가져올 힘이 없단다. 하지만 이 차가운 물은 길어 올릴 수 있지.”
에스더가 너덜너덜해진 날개를 가볍게 떨었다.
“내 날개가 닳아 없어지는 대가로 너희가 시원한 집에서 꿈을 꿀 수 있다면, 이 낡은 날개는 가장 아름다운 훈장이 되는 거란다. 비행은 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거든.”
조아는 할 말을 잃었다. 어제 알리다가 말했던 ‘동료의 무게’가 무엇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에스더의 해진 날개는 단순한 노화의 흔적이 아니라, 수만 번의 고비를 넘기며 지켜온 사랑의 지도였다.
노을이 벌집 입구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조아는 에스더의 곁에 나란히 앉아, 자신의 팽팽하고 눈부신 네 개의 날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 날개가 언젠가 에스더처럼 닳아 없어질 때까지, 조아는 누구를 위해 날아야 할지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