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베르나르의 눈빛이 부드러워질 때

시즌1]03:00 PM, 촛불 성의 괴물들

by 산 사람

​1. 요새의 권력자가 허락한 온기


​“지수야, 너 그거 아니? 고양이는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는지 아닌지가 아니라, 자기가 이 공간에서 안전한 지를 본대. 베르나르가 너한테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건, 네가 이제 이 ‘미친 요새’의 진정한 일원이 됐다는 뜻이야.”


​오후 3시 10분. 태풍 사장이 평소보다 낮은 채도의, 제법 진지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 무릎 위에는 이 식당의 최고 권력자이자 까칠함의 대명사인 고양이 ‘베르나르’가 웬일로 몸을 둥글게 말고 잠들어 있었다. 처음 알바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내가 1미터 근처만 가면 하악질을 해대며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던 녀석이었다.


​창밖의 여름 매미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한낮의 열기는 여전했지만, 바닷바람 끝에는 아주 미세하게 가을의 건조함이 묻어있었다. 나의 여름 방학도, 그리고 이 식당에서의 짧고도 강렬했던 알바 기간도 이제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지수 너, 개강하면 서울 올라간다며? 이제 이 꼴통 아저씨들 뒤처리는 누가 하나. 곰탱이는 고기만 썰 줄 알지 머리는 장식이고, 태풍이는 입만 살아서 접시 하나 제대로 못 닦는 인간인데. 우리 식당 이제 망했네.”


​장팔 아저씨가 주방 입구에 기대어 평소보다 더 진하고 매캐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투덜거렸다. 그는 평소처럼 가슴에 성호를 긋는 대신, 내 무릎 위에서 가르랑거리는 베르나르를 아주 한참이나, 마치 떠나보낼 사람을 미리 보는 것처럼 쓸쓸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투박한 손에는 낡은 요리책 대신 ‘졸업 선물’이라고 삐뚤삐뚤하게 적힌 작은 쪽지가 들려 있었다.


​“아저씨, 저 없어도 잘들 지내실 거면서 왜 그래요. 태풍 사장님은 벌써 눈에 불을 켜고 서울에서 온 예쁜 알바생 구하려고 공고 올릴 준비 하실걸요?”


​나의 농담 섞인 핀잔에도 주방의 분위기는 평소처럼 시끌벅적하지 않았다. 곰탱 아저씨는 주방 구석에서 묵묵히, 평소보다 세 배는 더 공을 들여 오렌지 껍질을 깎고 있었다. 칼날이 과육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릴 만큼 식당은 고요했다. 오늘은 단 한 팀의 예약 손님도 받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손님 예약을 단 4명으로 줄였다. 나머지 시간은 오직 한 사람, 나의 ‘졸업 만찬’을 위해서였다.


​2. 크레페 수제트, 기억을 박제하는 불꽃


​“오늘의 테마는 ‘작별의 불꽃’이다. 지수야, 주방으로 들어와. 마지막 수업이다.”


​장팔 아저씨가 하얀 앞치마를 고쳐 매며 비장하게 나를 불렀다. 오늘 그가 선택한 요리는 프랑스 디저트의 꽃이라 불리는 ‘크레페 수제트(Crêpe Suzette)’였다.


​“디저트는 말이야, 식사의 마침표가 아니라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쉼표’야. 크레페의 얇은 밀가루 반죽은 우리 인생의 겹겹이 쌓인 기억들이지. 이걸 오렌지 주스와 버터, 그리고 설탕이 녹아든 시럽에 적시는 건 그 기억들을 달콤하게 박제하는 과정이야. 하지만 진짜 마법은 마지막에 일어난다. 바로 ‘플람베(Flambé)’지.”


​아저씨는 구리 팬에 오렌지 향이 진하게 감도는 술인 ‘그랑 마르니에’를 아낌없이 부었다. 그리고 가스레인지의 푸른 불꽃을 팬 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화아악—!’


​순식간에 푸른빛을 띤 거대한 불꽃이 천장 근처까지 솟구쳤다. 잠들어 있던 베르나르가 놀라 눈을 번뜩였고,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장팔 아저씨는 그 뜨거운 열기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팬을 흔들었다.


​“이건 ‘알코올의 기화와 풍미의 고착’이라는 과학이야. 높은 도수의 술이 타오르면서 알코올의 불쾌한 쓴맛은 날려버리고, 오렌지의 향기 성분만 반죽 속에 강제로 밀어 넣는 거지. 불길이 지나간 자리에는 비로소 진짜 달콤함만 남게 돼. 지수야, 네 청춘도 가끔은 이렇게 무모하고 뜨겁게 타오르겠지만, 그 불길이 꺼지고 나면 향긋한 결과물만 남을 거다. 이 아저씨들이 보증하지. 그러니까 겁먹지 말고 타올라봐.”


​그는 불길이 잦아든 팬 위로 오렌지 제스트를 뿌렸다. 주방 안은 금세 상큼하고 달콤한 향기로 가득 찼다.


​3. 요새를 지킨 소녀를 위한 VVIP 만찬


​오후 7시. 촛불 성의 불꽃이 평소보다 더 고요하고 경건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태풍 사장은 오늘만큼은 제대로 된 정장 재킷까지 갖춰 입고 지배인 포스를 뿜어냈다. 그는 나를 알바생 자리가 아닌, 손님 테이블 중에서도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상석에 앉혔다.


​“김지수 양. 지난 몇 달간 이 지랄 맞고 대책 없는 요새를 지켜주느라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오늘 당신은 우리의 알바생이 아니라, 우리가 전 생애를 걸고 대접하고 싶은 유일한 VVIP입니다.”


​태풍 사장의 우아한 서빙과 함께 코스 요리가 하나둘씩 나왔다. 장팔 아저씨가 처음으로 내게 가르쳐준 전복 에멀전, 그 까칠하던 마을 노부부의 마음을 녹였던 꼬꼬뱅의 가장 부드러운 안심 부위, 그리고 지친 간호사 언니를 울렸던 그 진한 브야베스 국물까지. 지난여름, 이 식당을 거쳐 간 모든 손님의 사연과 눈물, 그리고 기쁨의 맛이 내 접시 위에 차례로 놓였다.


​한 입 한 입 먹을 때마다 지난여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새벽에 장을 보러 가던 길, 태풍 사장과 투닥거리던 오후, 장팔 아저씨의 지독한 담배 냄새, 그리고 곰탱 아저씨의 묵직한 안심까지.


​마지막으로 대망의 크레페 수제트가 서빙되었다. 태풍 사장이 촛불 성 앞에서 직접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파란 불꽃이 식당 안을 환상적으로 비췄고, 장팔 아저씨와 곰탱 아저씨도 어느새 주방에서 나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수야, 서울 가서 공부 힘들거나 세상 사람들이 너 괴롭히면 이 불꽃 생각하고 무조건 내려와라. 여기 네 전용 자리는 항상 비워둘 테니까. 밥 굶고 다니지 말고.”


​곰탱 아저씨가 수줍게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열어보니 장팔 아저씨가 매일 돌리며 기도하던 것과 똑같은 디자인의 ‘묵주 반지’였다. 다만 내 것은 조금 더 작고 반짝였다.


​“그거 끼고 있으면 마귀 같은 교수님들이나 나쁜 놈들이 너 못 괴롭힐 거다. 내가 어제 밤새도록 기도 많이 넣었어. 내 손가락은 굵어서 안 들어가니까 너라도 껴라.”


​장팔 아저씨의 퉁명스러운 말에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베르나르가 내 발치에 와서 털을 비비며 나지막하게 가르랑거렸다. 녀석의 노란 눈빛이 평소보다 훨씬 부드럽고 따뜻했다. 고양이는 안전한 공간을 안다던 태풍 사장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나는 이 지독하고 이상한 아저씨들 틈에서, 이 바닷가 유리 집에서,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하고 넘치도록 사랑받고 있었다.


​4. 3시의 요새를 떠나며


​밤 11시 반. 모든 정리가 끝났다. 내일이면 나는 이 요새를 떠나 다시 복잡하고 차가운 도시로 돌아간다. 태풍 사장은 내 손에 묵직한 흰색 봉투를 쥐여주었다.


​“이건 원래 주기로 한 월급이고, 이건 보너스다. 그리고 이건… 우리 식당 ‘평생 무료 이용권’이야. 네가 오면 우리는 언제든 오후 3시에 깨어날 준비가 되어 있어. 혹시 우리가 자고 있으면 문을 발로 걷어차고 들어와라.”


​나는 문을 열고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촛불 성을 돌아보았다. 수천 명의 인생이 녹아내린 그 성벽 위에, 오늘 나의 눈물과 작별의 온기가 또 한 겹의 두터운 촛농으로 쌓여가고 있었다.


​“아저씨들, 건강하세요! 담배 좀 제발 줄이고, 술 적당히 마시고, 싸울 때 프라이팬 던지지 말고요! 곰탱 아저씨, 고기 너무 많이 먹지 마요!”


​나의 외침에 세 남자가 마당까지 나와 손을 흔들었다. 곰탱 아저씨는 허허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태풍 사장은 특유의 윙크를 보냈다. 장팔 아저씨는 입에 문 담배 연기로 하트 모양을 만들려고 애쓰다 콜록거리며 헛기침을 해댔다.


​바다 위로 달빛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멀어지는 식당 건물을 뒤돌아보며 무릎 위의 베르나르가 남겨준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3시의 요새는 이제 내 기억 속에 영원히 침범 불가능한 성역으로 남을 것이다. 가장 과학적으로 요리하고, 가장 비과학적으로 사랑을 나누던 기적 같은 그곳.


​나는 오늘 마지막 알바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의 결론: 수플레는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고 크레페는 먹어 없어지지만, 촛불 성의 온기는 서울 한복판까지 나를 따라올 것이다. 그리고 베르나르는 사실 나를 제일 좋아했다. 그건 고양이의 눈빛이 증명했다.]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뺨을 스쳤다. 나의 청춘 한 페이지가 장팔 아저씨의 플람베처럼 화려하게 타오른 뒤, 향긋한 오렌지 향을 남기며 천천히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