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오늘은 일요일, 그들은 영업하지 않는다.

시즌1]03:00 PM, 촛불 성의 괴물들

by 산 사람


​1. 덜컹거리는 버스, 멀어지는 비릿함


​서울행 버스는 가차 없이 터미널을 빠져나갔다. 창가 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깊숙이 꽂았지만, 귓가에는 여전히 파도 소리와 장팔 아저씨의 가래 끓는 욕설이 맴도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는 시퍼런 바다가 점점 멀어지더니, 굽이진 산등성이와 메마른 논밭을 지나 어느새 회색빛 콘크리트 방음벽이 시야를 가로막기 시작했다.

​가방 깊숙이 넣어둔 스마트폰이 진동을 울려댔다. 단톡방 이름은 여전히 ‘3:00 PM’.


​[태풍 사장]: 야, 김지수. 너 가고 나서 식당 꼬락서니가 아주 가관이다. 곰탱이가 서빙하다가 와인 잔 세 개 깨 먹고 손님 앞에서 접시 춤을 추질 않나, 장팔이는 아까부터 요리에 소금을 들이부어서 손님들이 바닷물을 원샷하는 중이다. 주방 보조 구인 공고 다시 올려야겠다. 너보다 힘 좋은 놈으로다가.


​[장팔 셰프]: 지랄하네. 태풍 네가 홀에서 멍청하게 지수 이름 부르면서 넋 놓고 있다가 주문 꼬인 거잖아. 너나 잘해. 지수야, 서울 밥은 조미료 덩어리에 맛없을 거다. 힘들면 기어 내려와라. 콩소메나 한 사발 끓여줄 테니까.


​[곰탱 보조]: (사진 전송: 텅 빈 지수의 보조 의자 위에 베르나르가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수들을 바라봤다. 이제 내 앞에는 빽빽한 전공 서적과 숨 가쁜 도시의 소음, 그리고 '현실'이라는 칼날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내 손가락에는 장팔 아저씨가 준 묵주 반지가 든든하게 끼워져 있었고, 내 머릿속에는 태풍 사장의 뻔뻔한 낯짝이, 내 마음속에는 곰탱 아저씨의 묵직한 손마디가 버티고 있었으니까.


​2. 3시, 성벽이 숨을 고르는 시간


​같은 시각, 바닷가 ‘레스토랑 3:00’는 평소와 다른 기묘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오늘은 일요일. 이 식당의 공식적인 휴무일이자, 지랄 맞은 세 남자가 타인의 인생이 아닌 오직 ‘자신들’의 시간을 보내는 날이다. 오후 3시가 되었지만 식당 안에는 촛불도, 클래식 음악도 없었다. 대신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지지직거리는 팝송과 거친 파도 소리가 빈 공간을 채웠다.


​“야, 오늘 파도 진짜 죽이네. 지수도 없는데 우리 간만에 서핑이나 조져볼까?”


​태풍 사장이 왁스를 바르지 않아 부스스하게 뻗친 머리로 롱보드를 챙기며 말했다. 평소의 세련된 슈트 대신 구멍 난 나시티를 걸친 그는 영락없는 동네 백수 같았다. 장팔 아저씨는 입에 담배를 비스듬히 물고 성난 바다를 노려보았다. 조리복 대신 입은 화려한 꽃무늬 셔츠 아래로 문신이 삐져나온 그의 모습은 흡사 은퇴한 건달 같았다.


​“서핑은 무슨. 나 오늘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할 거다. 신도 하루는 쉬셨다는데 나라고 안 쉴 이유가 없지. 그냥 저 모래사장에 처박혀서 담배나 태울란다.”


​장팔 아저씨는 모래사장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습관처럼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하지만 그 손길은 기도가 아니라, 지긋지긋한 주방에서 풀려난 자의 해방감에 가까웠다. 곰탱 아저씨는 커다란 아이스박스에서 성에가 낀 캔맥주를 꺼내 두 사람에게 건넸다.


​“그래도 지수 그 녀석, 서울 잘 도착했겠지? 깡다구 있는 애라 잘 버틸 거야. 너한테 욕먹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애니까.”


​세 남자는 맥주 캔을 부딪쳤다. ‘챙-’ 하는 소리가 시원한 파도 소리에 섞여 포말로 흩어졌다. 장사할 때는 그렇게 서로 잡아먹을 듯이 싸우던 인간들이, 쉴 때는 누구보다 완벽하고 깊은 침묵을 공유했다.


​3. 낡은 맥주와 낡은 이야기들


​“장팔아, 너 가끔 파리로 돌아가고 싶냐? 거기 있었으면 지금쯤 미슐랭 스타도 따고, 돈도 긁어모았을 텐데. 내가 너 낚아서 이 구석진 데다 처박아둔 건 아닌가 싶어서 가끔 생각나더라.”


​태풍 사장의 뜬금없는 질문에 장팔 아저씨가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들이키고 답했다. 그의 시선은 파도가 부서지는 하얀 거품 끝에 머물렀다.


​“돈? 명성? 태풍아, 파리 주방은 그냥 영혼까지 갉아먹는 전쟁터야. 거기는 요리하는 기계들만 넘쳐나지. 소스 한 방울이 1밀리미터만 엇나가도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 근데 여기선 내 요리가 사람 인생이랑 섞이잖아. 너도 봤지? 그 아줌마나 노인네들 얼굴. 그게 진짜 요리인 것 같아. 그래서 안 돌아가. 너 같은 놈 뒤처리해 주는 게 내 팔자인가 싶기도 하고.”


​태풍 사장은 낄낄거리며 보드 위에 대자로 누웠다. 하늘에는 갈매기들이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나도 그래. 사실 나 서울에서 망하고, 진짜 바다에 뛰어들까 생각했거든. 유서도 다 써놨었다니까. 근데 그때 네가 해준 그 수프 한 그릇이 나를 붙잡았어. 죽기엔 너무 아까운 맛이었거든. 그래서 너를 납치한 거야. 나 살리려고.”


​두 남자의 대화에 곰탱 아저씨가 허허 웃으며 안주로 가져온 육포를 뜯었다.


​“둘 다 낯간지러운 소리 그만해. 내일 또 3시 되면 서로 잡아먹을 듯이 싸울 거면서. 지수 없으니까 내일 청소는 사장인 네가 직접 해라. 나도 이제 주방보다 홀에 좀 더 신경 써야겠어.”


​“뭐? 야, 곰탱! 네가 그러고도 내 친구냐? 내가 사장인데 빗자루를 잡으라고? 그리고 너는 홀에 나오지 마, 내 덩치 보고 손님들 움찔거리는 거 안 보이냐? 넌 덩치가 흉기라니까!”


​평화는 잠시였다. 다시 시작된 그들의 투닥거림이 파도 소리를 덮어버렸다. 식당 유리창에는 ‘일요일 휴무’라는 낡은 팻말이 걸려 있었고, 촛불 성의 촛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하지만 그 촛농의 성벽은 어둠 속에서도 육중하고 단단한 존재감을 뽐냈다. 수천 명의 눈물과 기쁨이 굳어 만들어진 그 성은, 이제 세 남자에게는 안식처였고 지수에게는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구석진 자리가 되었다.


​4. 다시 켜질 불꽃을 위하여


​저녁이 되자 식당 마당에는 작은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장팔 아저씨가 주방에서 남은 고기 자투리와 시든 채소들을 대충 던져 넣고 큼지막한 냄비에 끓여냈다. 정교한 요리가 아니라,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끓여낸 정체불명의 잡탕이었다.


​“야, 이건 메뉴에도 없는 거다. 이름하여 ‘인생 잡탕’. 지수가 있었으면 ‘아저씨, 이거 비위생적이에요’라고 한마디 했을 텐데. 그 잔소리가 좀 그립네.”


​장팔 아저씨가 건넨 뜨거운 국물을 한 입 먹은 태풍 사장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역시, 장팔이야. 꼴초 셰프 손맛이 어디 안 가네. 근데 좀 짜다? 내 눈물이 들어갔나?”


​밤은 깊어갔고, 식당 위로 쏟아질 듯한 은하수가 내려앉았다. 내일 오후 3시가 되면, 이들은 다시 부스스하게 일어나 유리창을 닦고, 담배를 피우고, 묵주 반지를 돌리며 성호를 그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절실한 마음으로 이 요새의 문을 두드리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지독한 만찬을 준비할 것이다.

​나는 고속버스 안에서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다.


​[지수]: 아저씨들, 저 잘 도착했어요. 서울 하늘은 뿌연 연기 같아서 별이 하나도 안 보여요. 벌써 그 지긋지긋한 담배 냄새랑 버터 향이 그리운 건 왜일까요? 오늘 쉬는 날 잘 보내시고, 다음 영업일에 봐요!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사진 한 장이었다. 불 꺼진 식당 안, 촛불 성 맨 꼭대기에 단 하나뿐인 작은 촛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베르나르가 보초라도 서듯 늠름하게 지키고 있었다.


​[태풍 사장]: 걱정 마. 네 자리는 불 안 끄고 놔뒀다. 공부하다 짜증 나면 무조건 튀어와라. 일요일이라도 너 오면 문 열어줄 테니까. 넌 우리 식당 식구니까.


​나는 스마트폰을 끄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코끝에 은은한 오렌지 향과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스치는 것 같았다.

​내일은 월요일. 요새의 문은 다시 열릴 것이다. 그들의 심장은 이미 만찬을 위해 가장 뜨거운 온도로 예열되고 있었다. 나의 여름이, 그리고 세 남자의 기적 같은 이야기가 바다의 파도 소리 속에 영원히 각인된 계절이었다.


​- <3:00 PM: 촛불 성의 괴물들> 시즌 1 완결 -